산 행 지 : 한북정맥 09차(윗배다리~장명산~곡릉천) 경기도 고양시, 파주시. 산 행 일 : 2017. 04. 22.(토) 산행코스 : 윗배다리~견달산~문봉동고개~고봉산~중산고개~310번 지방도~56번 지방도~장명산~곡릉천 (거리 22.6km) 산행참가 : 24백두.
<산행코스>
대통령 선거가 보름쯤 남았다. 후보자들의 공약이나 능력 검증보다는 이념적 성향이나 분위기에 따른 선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짙어지면서 선거에 대한 관심도는 생각보다 높아 보이지 않는다. 워낙 첨예한 대립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정세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중위권 후보들의 다수 출마에 따른 선두권 후보자와의 뚜렷한 지지율 차이로 말미암은 듯하다. 아무튼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아서 좀 더 평온한 나라, 좀 더 희망이 있는 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찌 되었던 세월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우리 백두산우회가 1대간 9정맥 종주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산행을 앞두게 되었다. 백두대간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지리산 산행이 백두대간을 왕복하고 9정맥 종주를 마치기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삼복더위에도 북풍한설에도 때가 되면 배낭을 메고 나섰던 일상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대한민국 산행의 커다란 마침표를 찍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우리 백두산우회 회원들의 희생과 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양재에서 버스에 올라 한북정맥 마지막 산행길에 나선다.
양재에서 출발한 버스가 산행 출발지인 고양시 원당동까지 가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은 듯하다. 버스가 도착하였을 때쯤에 한번 눈을 뜨고서 현장을 확인한 뒤, 무려 세 시간을 버스에서 곤히 잠들었다가 출발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다른 분들의 부산한 움직임에 눈을 뜨고 산행 준비에 나선다.
39번 국도가 지나는 윗배다리재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윗배다리재> 옛날 서해에서 밀물이 몰려들면 하천까지 차올랐는데, 배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고양 시청이 있는 곳의 행정지역명은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이다. 주교(舟橋)란 배로 만든 다리라는 뜻이다. 공식적인 행정명이 '주교리'가 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실재 윗배다리리재는 교외선 성서 건널목 부근이라 한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5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다.
39번 국도에서 소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여 언덕 위에 서니, 언덕 아래로 지금은 운행하지 않고 있는 교외선 철길이 내려다 보인다. 언덕을 내려와 철길을 건너 반대편 언덕을 오르면,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건너편 군부대 입구 방향 도로로 들어서서 진행한다.
이 도로는 군부대 전용도로로 일반차량은 통행을 하지 않는 곳이다. 즉 '자동차 없는 거리'인지라 편안히 도로를 넓게 사용하며 걷는다.
군부대 정문 직전에 우측 숲으로 인도하는 표지기를 따라 숲으로 들어서니, 이내 여러 기의 묘지들이 나타나며 등로가 우측 아래로 내려가는 듯하다. 방향이 아닌듯이 보여 바로 등로가 없는 좌측 능선으로 붙어서 진행하니, 이내 부대 정문 앞 도로로 다시 내려서게 된다.
군부대 정문 앞에서 우측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군부대 울타리 경계 조명이 밝게 비추고 있어서 굳이 렌턴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다.
누군가 울타리 안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을 왔는데도 경계병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부대가 얼마나 넓은지, 20여 분을 걸어왔는 데도 아직 울타리가 끝나지 않는다.
마침내 따르던 군부대 울타리를 벗어나 부대 후문쯤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올라서서,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도로 좌측으로는 가야 할 견달산이 조망되더니,
잠시 후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2차선 도로에서의 한북길 이어가기> 이 곳은 고양시 식사동 지역을 통과하는 2차선 도로인데 교통량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도로를 따르다가 우측 소로로 들어서서 광목장으로 항하는 것이 편한 방법이지만, 도로를 건너 옹벽 끝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서서 한북길을 밟아 가기로 한다.
도로를 건너 숲으로 들어서는 백두들.
언덕쯤의 봉우리에 올라서니 우측으로 시야가 트이며 일산동구 사리현동 방향이 조망되고,
능선이 온통 파헤쳐지고 있어서 조만간 이 한북능선도 사라지게 될 듯 보이고,
공사 자재와 폐기물들이 쌓여있는 공터에 내려서서 잠시 쉼을 한다.
공터 좌측편 한북정맥꾼들의 이정표가 되는 광목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온통 공사장으로 변해 있다.
한남길은 공터 옆 절개지로 올라 좌측으로 다시 내려서야 하는데, 우측 방향 방향으로 잠시 알바를 다녀온다.
돌아본 한북능선 방향 우측 아래 공터가 잠시 전 쉼을 하던 곳이다.
내려다본 공터.
짧은 알바를 마치고 돌아서는 백두들.
절개지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며 광목장 입구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옛날 산행기에서 보았던 광목장 입구는 신축 공장 건물이 차지해 버렸다.
광목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서, 한북길은 도로를 건너 공장 건물 옆으로 이어가야 한다.
광목장 방향.
옛 산행기에서 보았던 광목장 입구는 공장 건물들이 차지해서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변해서,
신축 공장건물 옆 공터를 가로질러 앞쪽 숲으로 진행한다.
공터를 가로질러 견달산 방향으로 진행하는 백두들.
신축 공장건물을 지나니 견달산으로 이어지는 임도에 접속하여 견달산으로 진행한다.
근처에 '견달산천'이라는 개울이 있는지, 발원지 방향 표지판이 있고,
우측 화살표 방향의 따르던 임도를 두고 좌측 묘지 옆으로 들어가서 오름길을 이어가면,
조금 가팔라지는 오름길에 조그마한 돌무더기들이 보이고,
이내 헬기장이 있는 132봉을 지나,
체육시설이 있는 견달산 정상부에 도착한다.
한북길은 견달산 정상 직전에서 좌측 문봉동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눈앞의 견달산을 지나칠 수야 없으니,
견달산 정상 전경.
<견달산(見達山, 138.7m)>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과 고봉동의 경계를 이루며 한북정맥 산줄기에 걸쳐있는 산이다. 정맥 종주꾼들에게는 '현달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본달', '번달'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풍수지리상 산봉우리가 마치 중국을 향해 절하는 형상이라 해서 역적산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중국 황제의 세숫대야에 비쳐 그 기운이 중국까지 도달했다 하여 견달산이라 불렸으며, 하늘과 잘 통하는 산이라 해서 고양시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높이는 야트막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모양새가 좋다고 한다.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조망이 괜찮아서 고양시 일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삼각점이 3개나 설치되어 있는데, 서울시, 고양시, 군부대 등에서 각기 따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군사 요충지로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지역으로, 지금도 산 곳곳에 군사 시설들이 있다.
견달산 정상 증명.
견달산 인증을 마치고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돌아 나와,
견달산을 뒤로하고 문봉동 방향으로 한북길을 이어간다.
잠시 내려서니 이내 견달산 날머리가 나오고,
앞쪽으로 문봉동재 삼거리가 보인다.
문봉동재 삼거리에 도착하여, 정면으로 보이는 골프연습장 방향 도로를 따라 한북길을 이어간다.
<문봉동재 삼거리>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과 덕양구 식사동을 잇는 문봉동재는 그 옆에 임도 수준의 구 문봉동 재가 있고 새로 생긴 문봉동재가 있다. 이곳 문봉동재는 공장 지대가 밀집되어 있고, 그 이외는 특이할만한 것이 없다.
여기도 우측에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는 듯, 도로를 따라 한참을 진행하게 된다.
인도(人道)가 따로 없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인데, 커다란 덤프트럭들이 자주 지나다녀, 주의하지 않으면 사고의 위험성이 커 보인다.
다행히 토요일 이른 아침이라 차량 통행이 뜸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짧게나마 인도가 따로 마련된 곳도 있고,
거의 20여분 만에 '원각사' 입간판이 있는 우측 소로(小路)로 들어선다.
한적한 소로(小路)를 잠시 따르면,
우측으로 보수공사 중인 원각사를 지나게 되고,
좌측으로 군부대 초소가 자리한 곳을 지나면,
앞쪽으로 가야 할 고봉산이 조망되는데, 빤히 보이는 고봉산으로 가는 길도 군부대를 우회하여 이리저리 돌아야 한다.
공장 건물이 있는 마을길로 들어서고,
정면으로 보이는 T자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다시 T자 삼거리에서 좌측 9사단 사령부 후문 위병소 방향으로 좌틀한다.
잠시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9사단 사령부 후문 위병소를 지난다.
부대 후문 위병소를 지나오는 백두들.
부대 담장을 따라 진행하다가, 부대 울타리가 숲으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울타리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따르던 군부대 울타리 옆길이 원형 철조망으로 막혀 있는 지점에서 우측 능선으로 꺾어서 내려서면,
따르던 군부대 울타리를 버리고 능선을 따라 내려서는 백두들.
이내 따르던 능선길을 두고, 좌측 길로 들어서라고 표지기들이 안내한다.
성동재 도착.
<성동고개> 고양시 일산서구 성석동과 중산동을 잇는 고개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성동고개'를 잘 모른다. '잣골고개' 또는 '성석동고개'로 해야 알아 듣는다. 성동고개 건너편 고봉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한 출입금지 지역이므로 우회해야 된다. 군부대로 향하는 가파른 시멘트 도로를 따라 고봉산으로 올라간다.
성동고개를 건너는 백두들. 좌우로 도로가 굽어 있어서 차량 통행에 주의해야 할 듯하다.
성동고개를 건너 만경사 방향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는 백두들.
우측 산사면에 무엇이 있길래?
버섯과 산나물에 일가견이 있는 덕현 형님이 자세히 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 두릅을 채취하러 올라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치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술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만경사가 나타난다.
만경사 전경.
잠시 후, 군부대가 자리한 고봉산 정상을 두고, 좌.우로 우회하는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좌측 녹색 화살표 방향이 군부대 정문 앞을 통과하는 조금 더 짧은 우회길이고, 우측 청색 화살표 방향은 장사바위를 지나는 조금 더 긴 우회길이다.
군부대 정문 방향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부대 정문 직전에서 좌측 영천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도착하는데, 영천사 입간판 뒤편 숲길로 들어선다.
<고봉산(高峰山, 206.3m)> 고양시 일산동구 상석동에 있는 산으로 일산에서 제일 높은 일산의 진산이다.
고봉산과 관련된 이야기로, 고양군지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고양시가 개벽현으로 불리던 백제시대에 이 지역에 한(韓)씨 성을 가진 부자(富者)가 있었는데, 이 부자한테는 한주라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한주가 길에서 옷차림은 남루하나 비범해 보이는 청년을 만나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다가 그 청년이 길을 떠나 헤어지게 되었는데, 청년이 길을 떠나면서 자신은 고구려의 왕자이며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을 수복하기 위해 정탐하러 왔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사를 끌고 다시 와서 아내로 맞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 했다. 그가 바로 519년에 왕위에 오른 안장왕이다. 그러던 중, 개벽현의 태수가 한주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했으나 한주는 거절했다. 한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신하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때 을밀(乙密)이라는 장수가 나서서, 개백현을 되찾고 한주를 구해 올 터이니 이기고 돌아오면 왕의 여동생인 공주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했다. 안장왕은 쾌히 승낙하고, 을밀은 용감한 병사 수십 명을 광대패로 변장시켜 백제 땅 개벽현으로 잠입시켰다. 태수는 자신의 생일에 맞춰 한주를 옥에서 끌어내어 재차 청혼을 했다. 이때 을밀이 이끄는 광대패들이 생일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백제군과 광대패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 틈을 타, 한주는 관아에서 빠져나와 고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이 신호를 보고 안장왕이 개백현을 공격하여 옛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내용이 흡사 춘향전과 비슷하다. 그래서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가 춘향전의 원형이라는 설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씨 미녀가 높은 산 위에서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이했다고 해서 고봉산(高峰山)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벚 꽃잎이 흩뿌려진 호젓한 등로를 따라 고봉산 정상을 우회한다.
고봉산 정상을 우회하여 고봉산 정상을 넘어온 한북능선에 다시 접속하고, 좌틀하여 능선 아래쪽으로 진행한다.
고봉산 정상을 우측으로 우회하여 오는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을 지나는데,
장사바위가 지척인 듯하여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홀로 장사바위를 향한다. 도대체 장사바위가 어떻게 생겼길래...ㅉㅉ
장사바위 전경.
아마도 커다란 바위 위에 놓인 작은 바위가 장사바위쯤으로 짐작되는데, 아래 사진에서 커다란 바위 위의 작은 바위를 가볍게 들어 올린 장사의 이야기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발길을 돌려 장사바위를 뒤로하고 한북능선으로 복귀하여 고봉산 내림길을 이어간다.
잠시 후, 철망 울타리 문을 통과하여,
고봉산 헬기장에 도착하니, 앞서 갔던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돌아본 고봉산 정상.
헬기장을 뒤로하자 이내 다시 철제 울타리가 나타나고,
설치된 삼각점이 덩그러니 도드라질 정도로 주위가 침식된 128봉 정상을 지난다.
고봉산 내림길은 좌우로 여러 개의 등로가 갈라져 나가는데, 황룡산 방향의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면 된다.
'고봉정'이라는 정자 옆을 지나,
잠시 내려서면 고봉산 날머리가 나오고,
고봉산 날머리를 나서면 앞쪽으로 고봉산 삼거리(중산고개)가 나온다.
일산과 봉일천을 연결하는 9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봉산 삼거리(중산고개) 전경. 한북길은 도로를 건너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로 올라야 한다.
파주에 사시는 권선생님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공양하겠다고 하여 어렵게 찾은 식당에서,
맛난 아침식사를 한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본디 아침식사를 준비하지 않는 식당으로 특별히 부탁하여 어렵게 마련한 식사라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대보다 훨씬 맛나게 먹었다.
식사 후 모닝커피까지 제공받고, 다시금 한북길 잇기에 나서는 백두들!
한남길은 도로를 건너,
고양누리길 황룡산 들머리로 이어진다.
들머리로 들어서면 장승들이 '금정굴'이라는 표지판을 이고 있다. 뭐지?
돌아본 고봉산 삼거리 전경.
금정굴 앞을 지나는데, 금정굴이 그저 단순한 동굴만은 아니었나 보다!
<금정굴> 금정굴은 6.25 당시 밀고 밀리는 교전 중에, 고양 일대가 수복되면서 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곳이다. 가해자들은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폐광으로 버려져 있던 금정굴에서 부역자란 명목으로 양민들을 처단했다. 적극적인 좌익 세력들은 이미 인민군을 따라 월북을 해 버렸고, 빨갱이로 물린 양민들은 월북자들의 가족들이나 친척, 그리고 소극적인 부역자나 개인감정으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이었다. 친.인척들의 주검을 확인하지 못하고 평생을 빨갱이 가족이란 오명을 쓰고 천추의 한을 간직한 채 살아온 유가족들이, 명예 회복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1995년 1차에 발굴된 유골을 감정한 결과 사망자가 최소 153명에 이른다고 한다. 요즘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곳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을 비롯한 좌익이란 명목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복권시키는데, 이곳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대에 따라 정의의 기준이 달라질지언정 상식이 통하는 세상의 정의는 별반 달라지지 않을 듯하니!
다시 군부대 울타리를 만나 울타리를 따라 좌측 능선으로 진행한다.
한북길은 이 능선에서 좌측으로 꺾어져 내려가야 되는데, 좌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여러 군데 있어서 알바를 많이 하는 곳이다. 울타리를 따라 황룡산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체육시설이 있는 곳, 특히 철봉이 있는 곳에서 좌틀하여 내려서야 한다. 네이버 지도의 108봉 정상쯤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능선상의 뚜렷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좌전방으로 시야가 트이며 아파트들이 조망되고,
잠시 더 등로를 따라 진행하면,
산행기에서 보았던 '풀향기'라는 찻집이 나온다.
찻집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서 호곡중학교 울타리를 따라 이마트 에브리데이 앞 도로로 내려선다.
이제 이곳부터 일산 가구단지를 거쳐 파주 운정 주택단지를 지날 때 까지는 한북정맥 능선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그냥 시가지를 더듬어서 희미한 한북능선 언덕을 가늠하며 지나야 하는 구간이다. 따라서 정맥꾼들이 선택한 노정이 서로 다르고, 능선 또한 개발로 사라진 상태라, 어느 길이 정확한지를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우리는 옛 한북정맥 능선에 가장 근접해서 걷는 길을 택해 진행할 요량으로, 도로를 건너 이마트 우측 옆길로 들어선다.
탄현큰마을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고,
대림아파트 앞에서 도로를 따라 좌틀하여 진행하면,
일산 가구단지로 이어지는 도로와 만나 우틀하여 진행하면,
경의선 철로를 건너는 탄현마을교가 나온다.
탄현마을교를 건너며 좌측편으로는 두산건설에서 미분양으로 고생한 두산위브 아파트가 보이고,
우측 아래로는 경의선 철도가 내려다 보인다.
탄현마을교를 건너는 백두들.
탄현마을교를 건너면 일산가구단지 입구에 서게 되고,
도로를 건너 일산가구단지 안으로 진입한다.
도로를 건너는 백두들.
가구단지 내로 진입하여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이곳에서 한북능선은 우측의 건물 뒤편 언덕으로 이어진다.
우측의 능선이 한북능선임을 확인하며 가구단지 도로를 끝까지 따라 걸으면,
앞쪽으로 넓은 도로가 막아서고 우틀하여 진행한다.
가구단지를 통과하여 우틀하여 도로로 내려서고,
도로를 따라 한참을 진행하면,
한소망교회 앞 사거리에 도착한다.
도로를 건너 전면에 보이는 한소망 교회 안으로 진입하면,
한소망교회 건물 뒤편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한소망교회 건물 뒷편으로 진행하는 백두들.
한소망교회를 통과하여 나오면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져 있고,
휘어진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아미가 골프연습장 앞에서 좌측 언덕길로 진입하면,
이곳이 능선쯤으로 짐작되는데 주변은 창고와 공장 건물이 즐비하다.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 백두들.
우측 칼국수집 옆 골목으로 들어가,
동서대로 옆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동서대로 옆, 도로를 따르는 백두들.
기왓돌지하차도 사거리에 도착하여,
우틀하여 우측 언덕이 한북정맥 능선인데, 우리는 대각선 방향으로 도로를 건너 길을 따라 진행하였으나, 녹색 화살표 방향의 언덕으로 진입하여 공원길로 가는 게 더 좋을 듯하다.
운정신도시를 가로지르는 8차선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이마트 앞을 지나게 되고,
사거리를 건너 경기인력개발원 앞으로 진행한다. 우측의 공원 숲길로 진행하게 되면, 녹색의 화살표처럼 육교를 건너 운정겅강공원으로 바로 진입하게 된다.
좌측의 건물이 경기인력개발원으로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서거리를 건너 계속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무등산의 서석대를 연상케 하는 조형물 앞에 도착하고,
운정건강공원 조형물 앞에서 기념 인증을 남기고는,
좌틀하여 운정건강공원 안으로 진입한다.
심학산로를 건너 운정건강공원을 연결하는 에코브리지를 통과하면 널찍한 정자가 있다.
정자에서 바라본 운정건강공원 전경.
에코브리지를 건너 정자로 오는 백두들.
정자에서 과일을 나누며 느긋한 쉼을 한다.
정자에서의 편안한 쉼을 뒤로하고 다시금 한북길 잇기에 나서서,
심학산로 북쪽 공원으로 내려서서 공원 내 산책로를 따라 한북길을 이어간다.
정자를 뒤로하는 백두들.
삼부르네상스 5단지 아파트를 우측에 두고 공원내 산책길을 따르면,
산책길을 따르는 백두들.
공원 산책길은 자전거 도로와 함께 이어져 있고,
좁게 이어지는 도심공원 산책길을 따른다.
생리문제 해결을 위해 좌측 아래쪽 길로 잠시 내려섰다가는 다시 우측 도로가 산책로로 올라서고,
점점이 흩어진 벚꽃잎들을 밟으며 북쪽으로 진행한다.
좌측으로는 신축한 산내중학교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공원 내 산책길 옆으로 인공수로도 만들어 놓았다.
와석순환도로를 건너는 에코브리지 위로 올라서니,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인공수로가 시작되는 발원지?를 배경으로.
이제 한북정맥과 더불어 1대간 9정맥 종주가 끝나려 하니, 긴 세월의 무용담을 나누며 편안한 쉼을 즐긴다.
쉼터에서 바라본 와석순환로 동쪽 방향 모습.
와석순환로를 건너는 특이한 에코브리지 위 모습.
와석순환로 서쪽 방향.
에코브리지를 지나 가재울공원으로 들어서는 백두들.
우측 파주시 묵동동 방향 전경.
가재울공원 안내판.
가재울공원이 이제막 만들어 지고 있는 듯, 공원 조경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돌아본 가재울공원.
이제 한북정맥은 파주 운정지구 시가지 구간을 지나 다시 숲으로 들어서는데,
숲길 들머리에는 이곳이 '고인돌 산림욕장'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고인돌 산림욕장 안내도도 세워져 있다.
비포장 임도 갈림길에서 좌측 파평윤씨 묘소 가는 길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이곳 파주는 조선조 세도정치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파평윤씨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던 곳이다.
널찍한 임도를 따라 쉬엄쉬엄 걷다가 4거리 갈림길을 만나 직진하고,
잠시 후, 따르던 임도를 두고 우측 소로로 접어든다.
끝물의 벚꽃잎이 점점이 흩날리는 오솔길을 잠시 따르다가,
수레길을 만나 우틀하고,
잠시 후, '파주로'로 이름 지어진 56번 지방도를 건너야 하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동물이동통로 방향으로 가기 위해 지도를 보며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언덕 위로 올라간다.
다시 T자 갈림기에서 좌틀하여 오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좌측 길을 따르면,
56번 지방도(파주로) 절개지 위에 서게 된다.
절개지를 따라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 파주로가 내려다 보이고,
동물이동통로 방향으로 이리저리 얽힌 등로를 쫒아 내려서면,
56번 지방도(파주로)를 건너는 동물이동통로 위에 서게 된다.
동물이동통로에서 바라본 남서쪽 방향.
동물이동통로로 내려서는 백두들.
동물이동통로를 건너 능선으로 올라서고,
능선으로 올라서는 백두들.
능선 위로 이어진 비포장 도로를 따라 가면,
4거리 갈림길에서 직진 길은 성재암으로 이어지고, 한북길은 좌틀하여 진행한다.
갈림길 한견에 자리한 성재암 표지석.
<성재암> 성재암은 조선 세조(재위 1455~1468) 비 정희왕후 윤씨가 창건한 가람이다. 무진(1448)년 비의 친정아버지 파평부원군(윤빈)이 졸하고 친정어머니 흥령부대부인 인천이씨마저 졸하매, 애통한 나머지 의경세자(성종의 생부, 추존 덕종대왕)을 보내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36칸의 가람을 창건하고 성재암이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왕비가 목불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수양하는 스님 20여분을 상주케 하였다. 파평윤씨 종중은 경내에 파평부원군 내외분의 재실인 본방능재를 짓고 족보 편찬 사업도 한 곳이다.
성재정 안내판.
우측 아래로 성재암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이 파평윤시 정정공파 묘역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제 한북길은 파평윤씨 묘역 방향으로 이어지며,
좌측으로 파평윤씨 묘지 이정석을 만나 직진하고,
폐교된 교하중학교가 보이는 갈림길에서 직진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우측에 '고인돌'이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아마도 당하리 지석묘를 가리키는 듯하여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당하리 지석묘군 전경.
지석묘군 안내판.
지석묘 전경.
잠시 후 갈림길에서 우측은 파평윤씨 묘역과 성재암 방향이고, 직진의 좌측 길이 한북정맥 장명산 가는 길이다.
전방에 군부대가 있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능선길로 진행하고,
우측으로 갈 꾸며진 가족묘역에 있는 정자가 보이기에,
정자 위에 올라서 바라본, 동쪽 교하동 방향으로 파주시의 고층아파트들이 보인다.
파주시 오도동과 교하동을 연결하는 교하로가 지나는 핑고개에 도착한다. '핑고개', 누가 어떤 연유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고개가 높지 않아 오르는데 핑 돌 것 같지는 않고 총알 소리 정도가 언뜻 떠 오른다.
핑고개에서 바라본 남쪽 운정지구 방향.
북쪽 교하동 방향의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가 한북정맥 장명산 방향이다.
돌아본 핑고개 날머리.
<교하(交河)> 교하동 지역은 조선조 광해군 때 도읍지가 될 뻔했던 곳이다. 수도권 서북부 거점도시, 생태도시 파주 교하지구 개발이 한창이다. 교하(交河)란 한강과 임진강, 두 강이 교차한다는 뜻에서 나온 땅 이름이다. 교하는 광해군 당시(17세기 초) 조정과 온 나라를 몇 년간 시끄럽게 했던 곳이다. 또 1990년대 초에는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가 통일 후 수도 후보지로 언급하면서 유명세를 탄 곳이다. 1612년(광해군 4) 6품 벼슬 이의신이 한 장의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 후 조정 대신들이 그의 상소를 반박하는 글 속에 그 편린이 조금씩 드러난다. 이를 모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 조정의 관리들이 분당하는 것, 한양도성 주변 산들이 벌거벗은 것, 이 모두가 도성의 왕기(旺氣)가 쇠퇴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도성을 교하현에 세워 순행(巡行)을 해야 합니다. 교하 땅은 한양과 개성의 중간 지점으로서, 동으로는 멀리 삼각산의 영산이 병풍 같이 보이고, 북으로는 송악산이 웅장하게 서 있으며, 남으로는 옥야천리(沃野千里)가 기름지게 펼쳐져 오곡이 풍성하고, 서로는 한강이 넓게 흘러 배가 다니기에 좋은 땅입니다.' 광해군은 산과 물이 얼싸안고 달리는 길지라는 이의신의 상소를 예조에 내려 의논토록 했다. 예조 판서 이정구는 가당치도 않은 내용으로 혹세무민 한다며 이의신의 처벌을 주장했다. 홍문관과 사간원도 지속적으로 이의신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애당초 이의신을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파문은 전국으로 번져갔고, 광해군 6년(1614)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이의신을 처벌하자는 상소 횟수가 100회를 넘었을 정도였다. 3일에 한번꼴로 처벌을 주장하는 삼소가 이어졌으니,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결국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교하 천도는 이뤄지지 못한다. 17세기와 20세기, 두 풍수학자가 도읍지로 언급한 교하는 과연 풍수적으로 그만한 땅일까? 당시 조정 대신들은 '교하는 하나의 작은 현(縣)인 데다, 포구에 치우쳐있어 성을 쌓고 부서를 만들기에 결코 적절한 곳이 아니다'라고 했고, 영의정 이덕형은 '교하는 습한 저지대로서 도읍을 세우기에 부적합하다'라고 했다.
시멘트 도로를 따르다가 미진봉투사 직전에서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숲이 있던 장소는 파헤쳐져 있고 조만간 건물이 들어설 듯하다. 대지조성 공사장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선다.
미진봉투사 우측 능선을 밀어버린 모습.
능선에 올라서서 돌아본 핑고개 방향.
잠시 능선을 따르면 지도상에 장명산으로 표기된 봉우리가 좌측으로 보이고, 우측은 폐기물 처리장 가림막이 쳐져있다. 백두들은 이곳에서 우측 폐기물 처리장으로 내려서서 건너편 장명산으로 향하고, 나는 좌측에 보이는 지도상의 장명산으로 오른다. 그놈의 궁금증 땜시!
네이버 지도에는 이곳을 장명산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러나 산행기에서 보던 정상석이나 탄피종은 보이지 않는다.
봉우리를 지나 건설폐기물 처리장으로 내려서고,
건설폐기물 처리장에서 찻길로 급우틀하여 진행한다.
돌아본 지도상 장명산 모습.
건설폐기물이 장명산보다 높게 쌓여 있다.
가야 할 장명산 방향.
이곳에서 좌측 아래로 찻길을 따라 내려서면,
좌.우측 쓰레기산(山)의 덮어 놓은 토사 사이로 흉물스러운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속 검은 쓰레기산.
그래도 나는 1대간 9정맥의 종지부를 찍으려, 정면으로 보이는 장명산만 보고 전진한다.
폐기물 처리장 전경.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희미한 족적을 쫒아 오르면,
장명산 정상부에 도착한다.
아침에 지나왔던 고봉산의 통신탑이 저 멀리 보인다.
내려다본 건설폐기물 처리장 전경.
장명산 보다 높게 쌓아 올린 폐기물 산(山).
지도상 장명산 직전에 헤어졌던 백두들이 하나 둘 장명산 정상에 도착하며,
기어코 백두들이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 '장명산'에 도착한다.
<장명산(長命山, 102.1m)> 파주시 교하읍 오도리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별게 아니지만 교하지역에서는 주산으로 대접받고 있다. 더욱이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라서 정맥꾼들에게는 유명세를 톡톡히 하는 산이다. 정상석 좌측에 국기게양대와 탄피종이 걸려있어서, 함께 걸려있는 쇠망치로 '땡땡땡~' 세번 두드리며 한북정맥 졸업과 1대간 9정맥 완주를 고(告)한다. 일명 약산이라고도 한다. 고양의 고봉산 서북맥 내령으로 와동산을 거쳐 끝머리 벌판 가운데로 우뚝 서있는 장명산은, 산아래 공릉천(휴률강)이 흘러 경관이 아름다우며 산 주위로 구절초가 자생하여 주민들이 이를 많이 복용하여 수명이 연장되었다고 하여 장명(長命)이라 유래된 것이라 한다.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던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숫물에 밥을 지어먹고 구절초 달인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이 한양땅에 퍼지게 되어, 아이를 갖지 못한 양반님네 부인들이 매년 음력 9월 9일에 장명산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다린 물을 먹어서 아이를 갖게 된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구절초는 여자의 냉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장명산에서 바라본 오두산 전망대 방향.
동쪽 감악산 방향.
당겨본 동쪽 감악산 방향.
서북쪽 방향으로 공릉천과 한강 그리고 강화도가 어렴풋이 조망된다.
1대간 9정맥을 완주한 백두들이 못다 한 북쪽의 대간과 정맥은 걸어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우두커니 북쪽을 바라고 있다.
남쪽 운정지구 방향.
아침에 함께 출발한 백두들이 모두 장명산 정상에 모였는데, 손 지점장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뒤에 떨어졌다가 장명산 오름길 들머리를 찾지 못하여 헤매고 있는 듯하여 데리려 내려가는데, 공릉천 날머리에서 되짚어 올라왔다고 연락이 와서 다시 장명산으로 복귀한다.
손점장 데리러 가는 길에 본 난초가 백두들의 1대간 9정맥 완주를 축하하는 듯하다.
다시 장명산 정상으로 돌아와,
백두산우회 한북정맥 졸업과 1대간 9정맥 완주를 기념하는 인증을 남긴다. '백두 행복하게 ~~~!'
백두산우회가 지리산에서 대간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13년의 세월을 지나서야,
오늘 마침내 대간길 왕복종주와 9정맥을 완주하였다. 긴~새월 변함없이 함께한 백두산우회 여러분! 축하드리며, 감사합니다!
졸업 산행에 참가한 24명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다시 한번 휴전선 북쪽의 마룻금도 밟아 볼 것을 결의한다.
나도 1대간 9정맥 종주 인증을 남기고,
13년이 걸려서 밟은 장명산 정상을 뒤로한다.
북쪽 탄현리 너머로 북녘의 이름 모를 산들을 당겨보고,
파주시 월릉산 방향도 살짝 당겨 본다.
장명산 정상을 뒤로하고 교통호를 따라 내려서면,
이내 공릉천 날머리에 도착한다.
장명산 날머리에 내려서서 돌아본 모습.
한북정맥이 잦아드는 공릉천.
<공릉천(恭陵川)/곡릉천(曲稜川)> 공릉천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챌봉(51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고양시 고봉동과 파주시 조리면, 금촌읍 일대를 지나 파주시 탄현면 송촌리 북쪽에서 한강 하류 동쪽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강의 중류 지역인 고양 부근은 심천, 조리면 부근은 봉일천, 금촌읍 남쪽은 금성진, 하류인 교하 부근은 방천이라 부른다. 공릉천이라는 이름은 파주시에 있는 파주 삼릉(공릉, 순릉, 영릉)의 공릉에서 유래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반세기 넘도록 곡릉천이라 불렸는데, 이것은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임의로 하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파주시의 요청으로 국토해양부가 2009년 1월에 곡릉천을 공릉천으로 다시 개명하면서 원래 이름을 회복했다.
공릉천 상류 방향.
늘 우리와 함께한 애마(버스) 앞에서 앞으로도 안전한 산행이 계속되길 기원하고,
한북정맥이 잦아든 공릉천과 가지 못한 북쪽의 대간과 정맥길에 대한 백두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길 소원한다!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한 백두들이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펑크 난 버스의 타이어 교체가 진행되는 잠시 동안,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 감회에 젖어 본다.
파주 운정신도시에서 목감을 하고, 야당동에 있는 '무고래'라는 곳에서 한북정맥 졸업과 1대간9 정맥 완주 뒤풀이를 시작한다.
행복하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삽시다!
13년간 1대간 9정맥 완주하며 마신 병들을 모두 모으면...ㅋㅋ
뒤풀이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백두들.
식당 정원에 있는 석화된 나무화석이 우리의 삶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13년도 찰나처럼 지나갔듯이 다가올 13년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니, 혹여 하고 싶은 것은 미루지 말고, 쓸데없는 근심 걱정은 찰나의 뒤로 미루시길~~!
오늘 버스는 영등포까지만 운행했다. 영등포 단골 중식당에서 그간의 소회와 앞으로의 다짐을 공개하는 자리를 갖는다.
백두산우회 상머슴 손총무님!
타칭 군기반장으로 통하는 천걸음님!
곰손님!
순회님!
혁배님!
병철님!
두규님!
갑순님!
보성님!
찬화와 교화님!
경숙님!
영임님!
분덕님!
복순님!
덕현님!
영식님!
회장님과 기대주!
우리 모두 지나간 세월이 찰나였음을 압니다. 남은 시간도 그렇게 찰나로 변할 것임도 압니다.
찰나로 변할 금쪽같은 시간들을, 새로운 도전으로 채워지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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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두님들의 에겐 짧지만 제겐 좋았던 기억 납니다 아침에 식당식사 하는 재미도 좋았구요 역시 산행의 빠지면 허전한 뒷풀이 까지 지난시간이지만 즐겁네요..
좋은추억 올려주셔 감사드립니다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