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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봉황 "국새(國璽)" 2008년 2월부터 새로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국새는 건국이래 네번째 국새이다. 지난 2005년 국새에 균열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어 그때부터 새로 제작해와 지난 12월 4일에 시험 날인 공개를 가진바 있다. ▲.2005년부터 준비하여 2008년 2월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새 대한민국 국새. 봉황 인뉴가 있다. ▲. 국새의 인문은 한글로 '대한민국'이라 되어 있다. 정부수립 후인 1949년 5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첫번째 국새는 1963년 제3공화국 출범 때까지 그 모델의 원형이 분실되어 어땠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 때인 제3공화국에서 두번째 국새를 제작하였을 때 그 모델은 조선시대 국새를 본따 거북이 인뉴(손잡이)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 1998년까지 우리나라 국새로 유지되어 왔었다. 이 거북이 국새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산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거북이는 꼭 명, 청의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물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가야에서 거북이는 국가 엠블렘의 의미가 있었고 이순신의 거북선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온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사신도 중에 북현무는 거북이와 커다란 뱀 수호신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하지만, 거북이 국새는 제1호 국새의 모델을 찾지 못하여 새로 만든 국새였다. 1998년 보다 자주적인 새로 만든 국새는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의 의미에 맞추어 우리 역사의 전통을 살린 봉황 인뉴를 가진 국새를 제작했던 것이다. 1998년 봉황국새를 제작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거북이 국새는 5백년 조선시대 기간 사용했던 모델로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용 손잡이 국새를 가진 것에 대한 하사받은 의미릴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새는 오직 명나라,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 들어와서 우리 자체의 국새를 만들었다. 이때 제작된 국새는 인뉴는 거북이가 아닌 서수(瑞獸)의 인뉴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대한국새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3년 제작했던 국새는 조선시대 국새를 모델로 한 것이지 대한제국 국새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국새는 나라를 일제에게 강탈당했던 국새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해 전 제1호 국새에 대한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대한제국 때의 국새 모양 그 사진을 모델로 제1호 국새를 다시 복원해 놓기도 했다. 몸체는 용을 닮아 있으나 다리는 짐승의 다리이며 머리 또한 용이 아닌 사자나 다른 동물의 수호신상이다. ▲.2008년 2월부터 사용할 봉황 국새를 제작했던 민홍규씨가 복원한 조선시대 국새와 대한제국의 국새 모습 국새 제1호를 찾아낸 배경은 다음과 같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당대 대표적인 옥새 전각 장인이었던 석불 정기호씨가 남긴 국새 관련 자료인 ‘고옥새간회정도 (古玉璽看繪鄭圖)’에서 본인이 1949년 국새를 제작했다는 증언과 함께 인뉴(印 손잡이)는 '용의 형태'로 돼 있다는 관련 기록을 찾았다 국가 기록원은 제1호 국새를 새겼던 곳이 서울 충무로의 천상당(天賞堂)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용의 형태'란 전통적인 용 이미지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그 렇게 '용'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국새 1호의 인뉴가 용을 닮은 면도 있는 신수상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문화공보부로 넘겨진 자료에 남아 있는 제1호 국새 사진자료에 의하면 그 인뉴는 용을 닮기도 하고 해태를 닮기도 한 대한제국 때의 국새 모양과 같은 신수상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민홍규씨가 복원한 것은 이 사진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정면 모습이 용은 아니며 해태상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문화공보부에 있던 국새1호의 사진. 옥새전각장인 정기호 씨의 '고옥새간회정도'(왼쪽). 여기에는 옥새를 만든 장인들의 계보와 국새 1호의 위쪽 및 정면 모양이 담겨 있다. 오른쪽은 1958년 촬영된 국새 1호의 사진 (국가기록원 자료 사진) 해태를 닮은 대한제국 국새모양을 닮아 있다. 일설에 '삽살개'를 닮아 있다는 것도 역사적인 연유가 있다. 제1호 국새는 대한제국 때의 국새 형태로 은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삽살개'를 닮아 있다는 것도 역사적인 연유가 있다. 일본의 신사나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 가라구니나 가라시지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청삽살개와 황삽살개라는 면에서 집 앞을 지키는 살살개의 의미가 사찰이나 궁궐을 지키던 역사적 연유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삽살개는 신라 때의 궁중개로 궁궐을 지키던 개였다는 것은 그러한 배경을 설명해준다. 삽살개는 그런 면에서 어처구니의 영향과 함께 광화문 앞 해태상의 배경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삽살개 국새'라고 할만한 제1호국새의 인뉴에 사용된 수호신은 일면 궁궐의 어처구니에 속하는 해치 또는 해태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처구니는 궁궐의 지붕에 올리는 잡상 또는 전우로 불리는 아홉가지 수호신상이다. 그 아홉가지 어처구니는 龍, 鳳, 사자, 천마, 해마, 산예, 押魚, 해치, 斗牛로서 각각 조금은 형태를 고전적인 신수상을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한 글은 광화문 해태상은 문헌상으로도 화재 방어용에서 볼 수 있다. ▲.불타기 전의 숭례문의 아홉가지 어처쿠니들. 그 가운데 하나가 한동안 상실된 채 방치되어 논란이 있기도 했다. 이들 어처구니는 화재 등 재앙을 막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해태는 용과 관련된 어처구니로서 광화문 앞에 세워왔던 바로 그 해태이다. 그러나 본래의 궁궐 지붕에 올려져 있는 해치상은 오히려 대한제국의 국새와 정부수립후의 제1호 국새 모양을 닮아 있다. 대한제국 국새를 모델로 했다는 정도의 유사성 외에 국새 제1호가 어떤 모델을 한 것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근거가 없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종임금이 광화문에 해태상을 만들어 세울 때 국새도 아울러 해치상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국새 1호의 인뉴와 비교해보면 그 모습은 거의 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볼 때 고종황제가 세운 광화문 해태상과 그때의 국새는 같은 면에서 대한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나라의 상징으로서 제작되었던 같은 신수상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해태상을 모델로 하여 국새 제1호를 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진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경복궁 근정문 계단 해태상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국새 중 하나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으로는 대한제국 국새를 모델로 한 제1호 국새의 이미지를 '삽살개' 인뉴로 해석하기도 한다. 건물 앞에 세웠다는 면에서 해치가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전통 개인 삽살개의 신화적 이미지가 해태에 서려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수호신으로서의 '삽살개'는 단순한 삽살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화문 앞에 세워져 온 해태상은 일본의 신궁이나 신사 앞에는 '고마이누'로서 개를 닮은 신수상이 세워져 있다. '고마이누'는 한자로 ' 拍犬'라고 쓰지만 본래 '고마'라는 말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고마(高麗)'를 의미하여 '고마이누'는 우리민족문화에서 건너간 수호신 이미지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고마이누'를 '가라이누(韓犬)'이라고도 한다. 그 '가라이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삽살개 신수상이다. 어처구니의 동물 수호신들이 나름대로 신화적으로 강조되었던 고려시대의 불교문화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로 바뀌어지면서 신수상들은 많이 현실의 동물들로 전이되었다. 삽살개 수호신상을 모델로 한 '가라이누'이겠지만, 국새 제1호의 모델이었던 대한제국 국새에 새겨진 인뉴의 신수상은 실제의 '삽살개'보다는 보다 신화적인 표현을 가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삽살개가 아닌 삽살개를 닮은 어처구니와 같은 신수상 즉 해치의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치'를 모델로한 대한제국의 국새는 을사늑약으로 일제 총독부가 탈취하여 국제외교에 무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일합방조약 문서에도 이완용은 국새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는데 있어서 우리나라 국새 관리는 나라의 주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새는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이 봉황과 무궁화로 되어 있는 것을 본 따 봉황 인뉴를 가진 국새에는 무궁화가 봉황 가슴에 새겨져 있다 청와대 대통령 문장을 기본으로 대통령의 명함에도 대통령 봉황 - 무궁화 문장이 들어간다. ▲.새 국새 제작 모델로 채택된 민홍규씨의 작품인 이 봉황국새는 본래 가슴에 무궁화를 달고 있어 전체적으로 청와대의 대통령 엠블렘의 축소형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 전통한방 휴양관광지내 국새전각전 건립현장에서 국새 모습 우리나라의 국새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였다.최초의 국새는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의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당나라 등과의 외교문서에 국새를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왕조시대에 국새는 바로 국가이자 임금의 상징이었다 국왕의 즉위식이니 그 계승은 선왕으로부터 국새를 물려받음으로서 그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요, 금, 원 등의 금인을 받아 국새로 썼다 1392년 건국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3년(태종 3)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지인 이라는 금인을 받아 이것을 '대보'라고 하여 1636년 (인조14) 까지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에만 썼다. 나중에 일본관계 문서에는 소신지보 (昭信之寶)라는 것을 따로 사용했었다. 이 소신지보는 조선 후기에 이덕보 (以德寶)라는 이름으로 고쳐져 사용되었다. 일본에 덕을 베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리라. 인조 14년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서 만들어준 국인을 썼으나 숙종 때 명나라 때의 옛 국인을 다시 찾아서 왕위 계승 때 썼다는 것은 국새에 관련하여 그 권위의 이미지가 왕위 계승에서 그 배경 의미를 찾는데도 고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대주의적인 '대보'는 1894년(고종 20) 갑오개혁 후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끝내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대신에 고종임금은 '大朝鮮國寶' 또는 '大朝鮮大君主之寶'를 만들어 썼다. 대한제국 이전이지만, 1894년을 전후하여 고종임금은 자주적인 국가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해치를 모델로 인뉴를 만든 대한제국 때의 국새는 엄격히 말하여 조선말기의 국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국새도 '대한국새'(大韓國璽) 또는 '황제지새(皇帝之璽)' 등으로 칭해졌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뒤 1949년 5월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다. 그것이 정부수립 이래 제1호 국새이다. 그 인문(印文)에는 '大韓民國之璽'라는 한자로 새기고 내각사무처에서 관리했다. 이러한 한자 국새가 한글로 고쳐진 것은 1970년 3월이었다. 고대 삼국시대 이전부터의 국새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글로 국새를 만든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국새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한글 국새는 새 국새규정을 따라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 4자를 가로로 새기고 총무처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지금까지 사용하는 한글 '대한민국' 국새의 인문(印文)의 아키타입이다. 1998년 이후의 제3대 국새는 고대 우리민족의 역사에서부터 이어져온 난생신화의 전통인 봉황을 인뉴로 만든 국새로서 균열이 갔기 때문에 2005부터 새로 준비하여 2008년 2월부터 사용되는 제4호 국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의 국새는 그렇게 한글로 '대한민국'이 새겨져 있으며 봉황 인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과 대만 일본에도 국새는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부터 국새를 제작했다. 중국의 국새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지인'이라는 한자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국새는 1954년 제 1차 전국인민대표자 회의 이후 사용하지 않고 국가박물관에 1급 국가문물로 보관되어 있다. 반면에 대만은 청동이 아닌 옥으로 만든 옥새로서 '중화민국지새(中華民國之璽)'라는 인문을 쓰고 있다. 대만은 '옥새'라는 전통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새는 메이지 유신이후인 1874년부터였다. 일본의 국새는 '大日本國璽(대일본국새)' 그리고 '天皇御璽(천황어새)'라는 인문을 가진 금으로 만들어진 국새로서 궁내청에서 사용 관리한다. 일본국새도 내각임명장과 훈장 등에 날인한다. 다음 장에서 서양의 봉황 전통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겠지만, 서구의 국가 인장은 글자 인장이 아니라 그 찍히는 인문이 그림을 중심한 문장 (紋章) 즉 엠블렘 미국의 국새는 'The Great Seal'이라고 하며 독수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것을 기본으로 백악관 대통령 엠블렘(Presidential Seal)이 만들어졌다 프랑스도 전통적으로 독수리 엠블렘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유의 여신상 문장(紋章)을 사용하는데 왁스를 녹여 붙인 뒤에 그 위에 날인하지만, 19세기 프랑스의 전통 엠블렘은 계림 신라처럼 닭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서양에서도 닭은 봉황과 관련하여 오랜 신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쌍봉황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성 로마제국의 쌍두 독수리상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사용하는 국새는 봉황 국새이다. 그것은 세계사 전체에 나타나는 봉황(鳳凰, Phenix)의 불사조 엠블렘에 연맥이 닿아 있는 국새라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제1호 국새가 분실된 뒤에 그 원형을 몰랐을 때엔 거북이 국새는 나름의 조선시대 5백년 역사를 잇는다는 정통성의 의미가 있었다. 그 후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을 때 봉황 인뉴를 사용한 것은 1967년부터 제정된 청와대 봉황엠블렘을 국새에 확대시킨 의미를 가진다. 봉황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이미지도 아니며, 중국이 강조해온 용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엠블렘으로서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을 가진 국새가 금년 2008년 2월부터 사용하게 된 봉황 인뉴 한글 국새이다. 특히 국새와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으로 사용되는 봉황은 우리의 국기인 태극문양과 관련이 있다 특히 새로 만든 봉황 국새의 제작 방식은 주물 방식이 아니라 거푸집 방식을 택했다는데서 또 하나의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국새 제작이 거푸집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갖는 특유의 방법이다. 밀랍으로 만든 거푸집 안에 쇳물을 녹여 부어 만드는 거푸집 방식은 우리나라의 옛 청동기 시대의 청동거울이나 통일신라시대 에밀레 종 등의 제작방식을 말한다. 다음장에서 논하겠지만, 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상은 봉황 이미지의 하나인 음악의 신선인 가루라 이미지를 바탕하고 있다. 그러한 봉황 이미지에 닿아 있는 비천상을 부조로 새긴 에밀레종을 만든 거푸집 방식이 봉황 국새 제작에 도입되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깊은 역사적 의미가 서려 있다. 에밀레종은 소리를 울리는 음악의 의미에서 오색 오음을 낸다는 봉황의 역사적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제작기법이 오늘날 우리나라 새 국새의 제작 기법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밀랍형주조법 즉 거푸집 방식은 밀랍에 섬세한 조각을 미리 해놓고 그것을 주물에 넣어 만든 방식이다. 이러한 밀랍형 주조방식으로 에밀레 종의 섬세한 비천상 조각을 만들 수 있었던 전통을 이번 국새 제작자들은 잘 수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수천년 전수되어 온 것으로 알려진 이러한 거푸집 방식의 제작 기법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 만들 수 없는 특별한 기술이다. ▲.고려시대 청동인장. 따라서 우리의 현재의 국새는 전통 봉황과 섬세한 제작기술 그리고 우리민족이 만든 한글을 사용하는 그런 자랑스러운 국새인 것이다. 특히 새로 사용하는 봉황 국새는 그 거푸집 제작 과정에서 오합토 (五合土)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색과 오음은 봉황의 캐릭터에 들어 있는 오방사상 예술의 핵심이 국새 제작 기술에 들어 있는 것이다. 국새 제작은 겨울동안 밀랍 덩어리를 세밀히 조각해 뉴를 만들고 이어서 봄, 여름에는 오합토를 배합하여 조각이 완성된 밀랍 위에 덮어 씌운다. 그 오합토의 흙은 장호원토, 강화토, 포천토, 합천토, 강진토 다섯 곳의 진흙을 섞어 옥새 밀랍조각 위에 씌우는데 이 진흙의 배합도 극비에 부쳐져 왔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오합토 거푸집은 가을 동안 건조시키고 숫가마라고 부르는 가마에서 1500℃ 이상으로 그것을 굽는다고 한다.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국새 즉 어보의 제작은 정도전의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그 제작 비법이 기록되어 있는 ‘영새(榮璽)부’라는 것이 전해져 오는데 어보 위조 문제가 가끔 발생하여 옥새 전각장 1인에게만 그 내용이 비전으로 이어져 왔다. 그 계보는 철종 때의 옥새전각장인 ‘황식’으로 계승되었고 다시 ‘전홍길’로 이어져 조선왕조 마지막 옥새장인은 '황소산'이었는데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어보를 제작했었다. 황소산 뒤를 이은 '정기호'는 동양 삼국 중 유일한 옥새 제작 계승자로서 그의 제자가 '정기호'이며 정기호의 유일한 제자가 ‘민홍규’라는 사람으로 현재의 우리나라 국새를 만든 사람이다 우리의 봉황 국새는 그 전통적인 이미지와 국가의 자주성 및 기술의 전통에서도 세계성과 독자성을 가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청와대 대통령 엠블렘에만 봉황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새에도 깊고 오랜 우리의 역사적인 봉황 인뉴를 가진 국새라는 면에서 봉황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상징 이미지이다. 그 어떤 면에서도 제거되거나 손상되어서는 안된다 ▲.2007년 12월 4일 국새를 시험 날인한 모습 옥새 이야기 |
1. 국새의 명칭과 의미
(1) 국새의 명칭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印章)의 명칭은 새(璽), 寶, 어보(御寶), 어새(御璽), 옥새(玉璽), 국새(國璽),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져 있다. 여기서 새(璽), 보(寶)는 인장(印章)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보(御寶), 어새(御璽)는 왕실의 인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옥새(玉璽)는 재질을 옥으로 만들어졌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이름으로는 국새(國璽)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2) 국새의 의미
국새는 국사(國事)에 사용하는 관인으로서 나라의 중요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국새의 날인은 국가 주요 행위의 최종적 완성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한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국권(國權)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우리의 국새는 오늘 날에 와서는 과거의 절대왕권을 나타내던 불가침적 권위와 신성성은 퇴색되었다.
그러나, 그 사용과 상징적 의미는 여전하다. 오늘 날 국새의 사용은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서 행하는 헌법공포문, 훈.포장증, 5급이상 공무원의 임명장, 외교사절의 신임장, 이 밖에 중요 외교문서 등에 날인되고 있다.
2. 국새의 역사와 관리기관
(1) 국새의 기원과 역사
우리나라 관인사(官印史)에 관한 유물이나 기록 등 대부분의 자료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의 것 들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역사를 바로 고증해 체계적인 관인사를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남아 있는 몇 명 문헌들의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의 관인제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왔으며, 그 용도는 치민(治民)의 장(長)이 전신(傳信)의 표시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옛날 환웅(桓雄)이 아버지 환인(桓因)으로 부터 받아가지고 왔다는 천부 3인(風伯, 雨師, 雲師)이 우리나라 역사상 나타난 최초의 국새라는 주장이 있고, 증보문헌비고 예고새인조(禮考璽印條)에 부여(夫餘) 예왕이 예왕지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국새의 사용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되는 국새는 고려.조선시대에는 국인(國印), 새보(璽寶), 어보(御寶), 대보(大寶)라 하여 왕의 인장이 국새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문서와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개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 계승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되었으며, 왕의 각종 행차시 그 위의(威儀)를 과시하기 위하여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하였다.
국새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외교문서(특히 대중국 관계)에 사용되는 국인(國印, 大寶로 통칭)과 국내용 어보(御寶)로 대별된다.
1894년 갑오경장 이전까지의 국인(國印)은 대부분 중국 역대왕조의 황제들에 의해 사여(賜與)되어 들어왔고, 기타의 어보들은 국내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부여에서는 일찌감치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인을 사용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중국과의 외교관계 문서에 국인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1172년(명종 2년) 금나라에서 금인을 보낸 것을 비롯, 요.원.명나라 등에서도 여러 차례 고려왕의 인장을 만들어 보내왔다. 1370년(공민왕 19년)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에게 보낸 금인(金印)에는 '고려국왕지인'이란 인문(印文)이 있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종은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주도록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다가 1403년(태종 3년)에 성조(聖祖)에 의해 비로소 '조선국왕지인'의 국인(國印)이 수여되었다. 이를 '대보' 혹은 '어보'라 하여 1636년(인조 14년)까지 대중국 외교문서에만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어보들이 제작, 사용되었는데, 교서.교지 등에 찍는 '시명지보(施命之寶)', 과거시험의 문서에 찍는 '과거지보(科擧之寶)'. 교린문서, 특히 대일본관계에 찍는 '소신지보(昭信之寶)' 등이 있었고, 소신지보는 조선 후기에 '이덕보(以德寶)'로 고쳤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만들어 준 국인을 공식 대보로 사용하였으나, 숙종 때 명나라에서 준 옛 국인의 인문을 찾아 별도의 것을 모조하여 두고 왕위계승 의식 때만 사용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특수 목적의 어보들이 사용되었는데, 서적을 반포.하사할 때 쓰는 '선사지기(宣賜之記)', 서책의 발간에 사용하는 '동문지보(同文之寶)', 왕이 지은 글에 찍는 '규장지보(奎章之寶)', 각신(閣臣 : 규장각의 벼슬아치)의 교지에 쓰는 '준철지보(濬哲之寶)', '명덕지보(明德之寶)', '광운지보(廣運之寶)'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인장들은 모두 도승지의 책임하에 상서원(尙瑞院)에서 제작.보관.관리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후에는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종식하여 이전의 대보를 폐지하고, 1881년~1882년경에 제작한 '대조선국보'와 '대조선대군주지보(大朝鮮大君州之寶)' 등을 사용하였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국새로 '대한국새', '황제지새', '황제지보', '칙명지보(勅命--)', '제고지보(制誥--)', '시명지보(施明--)',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 등을 제작 사용하였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5월 새로운 국새가 마련되었는데, 사방 두치(약 6CM)의 정방형 인면(印面)에 한자 전서(篆書)로 '대한민국지새'라 전각하였다.
1963년 1월에는 국새규정을 고쳐, 사방 7CM의 정방형 인면에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 넉자를 가로로 새겨 사용하였다.
1999년 2월 1일부터는 민족의 자존과 문화적 자긍심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국새규정을 전면 개정하여 사방10.1CM의 정방형 인면에 훈민정음체로 '대한민국' 넉자를 가로로 새겨 사용하게 되었다.
<자료:http://blog.korea.kr/jin0114/category/40010801>
3. 국새의 용도
오늘날 국새의 사용은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서 행하는 헌법공포문, 훈ㆍ포 장증, 5급 이상 공무원의 임명장, 외교사절의 신임장, 이 밖에 중요 외교문서 등에 날인되고 있다.<자료:행정안전부>
4. 국새의 부분적명칭
인뉴(印紐):국새의 손잡이가 되는 부분
인면(印面):국새에서 글자가 새겨진 면
인문(印文):종이에 찍힌 인장의 흔적
영수뉴(靈獸紐):신비하고 영험한 동물
5. 옥새와 국새의 형태
세종의 옥새(世宗金寶). 조선 1450년. 궁중유물 전시관 소장
마패(馬牌). 조선 1434년. 성암 고서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의 각종 인장
<자료:http://blog.eduhope.net/song>
대한민국 1대 국새 '삽살개 2호 국새'
왼쪽의 그림이 바로 대한민국 1대 국새 '태극익룡 1호 국새'
대한민국 2대 국새, '거북 국새'
대한민국 3대 국새, '봉황 국새'
국새의 안쪽 깊숙히까지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제작전, 대한민국 제4대 국새의 계획모형
완성된 대한민국 제4대 국새 '봉황 국새'
(자료:http://abetterplace.tistory.com/21>
역대 국새들이 보관되어있으며 모형으로 실물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자료:http://1stcabinet.tistory.com/>
첫댓글 대한민국 국새에 대하여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