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겨울호를 펴내면서
자리가 비었다
권혁재
한 차장이 면직되고 자리가 비었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신입을 뽑지 않았다
그가 키우던 죽은 나무를 내다 버렸다
먼지에 덮인 의자가
눈치 보며 비꼈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못할 빈 자리
지나간 공문이 폐지 더미로 쌓여도
한 차장을 기억하는 직원은 없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와
붙여대는 담뱃불처럼
한 사람의 청춘이 연기로 사라졌다
-----{애지} 여름호에서
면직免職이란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그 일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을 말하지만, 일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생존의 근거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이고, 일자리가 있고 나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한 여가선용과 예술과 취미활동이 가능해진다. 자기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반납하고 타인의 말과 명령에 복종하는 것도 일자리 때문이고, 타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짓밟고 언제, 어느 때나 수많은 사람들을 면종복배시킬 수 있는 것도 일자리를 배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자리는 밥줄이고, 밥줄을 끊는다는 것은 농부에게는 농토를, 상인에게는 상점을, 배우에게는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를 빼앗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형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는 데, 왜냐하면 사형은 이 세상의 생존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냐 하면 삼일을 굶으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열흘을 굶으면 이웃집 담장을 넘거나 그 어떠한 더러운 짓도 다하게 된다. 일자리가 좋으면 도덕군자의 탈을 쓰고 더없이 인자하고 자비로운 웃음을 웃을 수도 있지만, 일자리가 나쁘면 그 모든 명예와 명성은 한낱 뜬구름 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한 차장이 면직되고 그의 자리가 비었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새로운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키우던 죽은 나무를 내다 버렸고, 먼지에 덮인 의자마저도 여러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비껴났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못할 빈자리”에는 “지나간 공문이 폐지 더미로 쌓여도/ 한 차장을 기억하는 직원은 없었다.” 면직이란 임용행위의 일종이지만, 본인의 의사에 따른 의원면직과 불미스러운 일에 따른 징계면직이 있다. 한 차장의 면직이 징계면직인지, 본인의 의사에 따른 의원면직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권혁재 시인의 [자리가 비었다]의 행간에 묻어 있는 의미는 아마도 불미스러운 일에 따른 징계면직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모든 동료들이 다같이 한 차장과의 추억이나 기억들을 아예 묵살하고, 그에 대한 어떤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차장이 면직되고 그의 자리가 비었지만, 새로운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면직을 구조조정의 호기로 삼았다는 것을 뜻하고, “한 차장을 기억하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방어기제로서 그와의 공범관계임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차장의 면직은 그의 잘못 때문이고, 나와 한 차장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처지에서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은 있지만, 공범자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심리적인 방어기제는 한 차장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다 전가하게 된다. 그렇다. “문상을 마치고 나와/ 붙여대는 담뱃불처럼// 한 사람의 청춘이 연기로 사라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장이란 가족과 씨족, 또는 농촌마을과도 같은 공동체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적대시 하는 이익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유재산제도를 신성시 하고 개인의 이익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사회이며, 무리를 짓는 동물, 즉, 공동체 사회에 반하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공동체 사회, 즉, 직장의 목표에 따라서 서로가 분업과 협업을 하되, 동료의 불행은 나의 행운이 되는 이러한 적대적 관계는 타인들을 인간(동료)이 아닌 자기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익은 나의 손해가 되고, 나의 이익은 그의 손해가 된다. 그의 명예는 나의 불명예가 되고, 그의 초고속 승진은 나의 탈락을 의미하게 된다. 함께 웃고 일을 할 때에도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고, 어느 누가 입원을 하거나 휴가를 갈 때에도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다. 유비무환, 임전무퇴, 초전박살의 산업전사의 정신으로 자기 자신의 마비된 정신과 의식을 일깨우며, 그가 조그만 방심을 보이거나 허점을 드러내면 그 사나운 잔인성으로 재빨리 물어뜯고 씹어 삼킨다.
권혁재 시인의 [일자리가 비었다]는 한 차장의 면직에 대한 후일담이며, 사회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생존경쟁, 즉,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성이 가장 적나라하고 싸늘하게 배어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희생양이란 어떤 사건과 사고, 또는 공동체 사회의 위기를 어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덮어 씌우고, 그 사회적 위기를 수습하는 가장 사악하고 나쁜 전통과 풍습을 말한다. 한 차장은 ‘만인 대 만인의 싸움’ 속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문상을 마치고 나와/ 붙여대는 담뱃불처럼// 한 사람의 청춘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적인 이익공동체 사회이며,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이 그토록 사납고 잔인하게 펼쳐지면서도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는 힘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특성 이외에도 매 위기마다 어느 특정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만인들의 폭력을 행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권혁재 시인의 역사 철학적인 지식은 자본주의 사회를 꿰뚫어 보고, 그의 사회 심리학적인 시선은 한 차장, 혹은 희생양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함께, 한 차장의 넋을 위로하고 쓰다듬어 준다.
권혁재 시인의 [자리가 비었다]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인간에 대한 조종弔鐘이자 한 차장의 넋을 위로함으로써 공동체 사회를 복원하려는 그의 시인 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듯 하면서도 매우 깊이가 있고, 어느 개인의 비극인 듯 하면서도 자본주의 전체를 강타하는 푸르고 푸른 인문주의와 제일급의 시인 정신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기획특집: 논쟁문화의 장’은 아흔 네 번째로 반경환의 명시감상을 내보낸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는 주경림 시인과 황인찬 시인, 그리고 이병연 시인을 초대했다. 주경림 시인의 [루시Lucy의 진화] 외 4편과 권온의 작품론 [아이로서의 시인, 예술가로서의 시인], 황인찬 시인의 「부서져버린」과 김지윤의 작품론 [문을 여는 시, 떠나는 시, 계속되는 시], 그리고 이병연 시인의 시 [바위를 낚다]와 김병호의 작품론 [응시와 통찰로 이르는 투명한 깊이의 세계}를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조명한다’에서는 한연희 시인과 이진진 시인, 그리고 백지 시인의 시들을 내보낸다. 한연희 시인의 시, [미래에 없는]과 임지훈의 작품론 [지나간 미래와 남겨진 감정], 이진진 시인의 [산의 내장] 외 4편과 반경환의 작품론 [시인의 행복], 그리고 백지 시인의 [혀] 외 4편과 오홍진의 작품론 [과즙과 칼날 사이에서 피어나는 언어 감각]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계간 시전문지 {애지}가 제정하고 실시하고 있는 제21회 애지문학상 시부문에는 권혁재 시인의 [자리가 비었다}, 문학비평부문에는 김수이 교수의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김기택의 시세계]가 선정되었고, 제10회 애지문학작품상에는 김정웅 시인의 [북극항로]가 선정되었다. 애지신인문학 시부문에는 [아버지의 술래] 외 4편을 응모해온 김자향 씨와 [꾹꾹 누른다] 외 4편을 응모해온 김길중 씨를 당선자로 내보낸다. 애지문학상, 애지문학작품상, 애지신인문학상 시상식은 2023년 12월 1일 금요일 오후 3시 충남대학교 정심화홀에서 있을 예정이다.
박설화 시집 {화요일의 목록}, 김평엽 시집 {박쥐우산을 든 남자}, 이병연 시집 [바위를 낚다}, 민정순 시집 {따뜻한 모서리}, 황박지현 시집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이향이 시집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조옥엽 시집 {거실에 사는 고래}, 박정란 산문집 {월반하세요} 등이 출간되었고, 유계자 시집과 정동재 시집 등이 출간 대기중에 있다.
애지편집위원으로 배옥주 시인 겸 문학평론가와 그동안 애지편집장으로 수고해준 임현준 시인을 영입했다.
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애지} 필자 선생님들과 독자 여러분들, 그리고 애지문학회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무튼 계간시전문지 {애지}와 편집진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고한 걸음으로 ‘애지의 창간 이념과 목표’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
애지 겨울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