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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고기가 둔갑한 노새 고기의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한 동시대적 시적 고찰
김바다
노새 고기를 먹는다
당연히 노새 고기 맛이 난다
여우 고기를 먹는다
당연히 여우 고기 맛이 난다
여우 고기로 만든 노새 고기를 먹는다
당연히 노새 고기 맛이 난다
여우 고기였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수퍼노멀의 세계
-복년전-
1.
다시 시작되었다. 쿵쿵쿵 머리 아홉 달린 도둑이 열여덟 개의 손으로 절굿공이를 통에 힘껏 메다 꽂는 소리가 말이다. 엄마의 귀에만 들린다던 그 소리가 얼마 전부터 복년의 귓가에서도 맴돌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이었던가 시간을 셈해보던 일도 일흔이 다 된 마당에 귀찮기만 하다. 복년은 통영 원문고개 너머 북한군이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오던 때를 회상하다 다시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당시 엄마와 다섯 살 된 여동생 복리와 복년은 인평동 굴다리 밑 동굴 속에 숨어 지냈다. 밤에도 오빠가 싸우고 있을 고개쯤에선 총성과 정체를 알 수없는 섬광들이 번쩍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복년이 동굴 밖으로 머리라도 내밀라치면 어김없이 엄마의 주먹질을 받아야했다.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소리내는 법을 잊은 양 말이 없었다. 가끔 고뿔로 열이 오른 복리의 칭얼대는 소리만이 약하게 들리다 끊기곤 했다. 고된 농사일로 부르튼 엄마의 손에 입이 막힐 때면 복리의 감은 눈에선 주르르 오줌같은 눈물이 흘렀다. 먹을 게 없어 밀가루를 푼 물을 끓여먹던 것도 열흘이 지나자 동이 난 탓에 아픈 복리도 굶은 지 꽤 되었을 때였다. 전쟁통 피난시절이라 먹을 것이 귀했다. 지금 같아선 그 흔한 감기약 한 첩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밤이면 몸 하나 감쌀 이불 한 장도 없었다. 복년은 눈을 뜰 기력조차 없이 엄마의 품에 안겨있던 여동생이 안쓰러워 침을 뱉아 열 오른 이마에 발라주곤 했다. 죽기 하루 전날 복리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엄마, 밀장국 한 번만 먹어봤으면. 한 숟가락만도 좋겠다.
전쟁이 끝난 뒤 엄마는 즐겨만들던 밀장국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치매가 오기까진 말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진 게 오빠 내외에게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 엄마의 증세가 확실해지자 오빠는 새언니의 우울증이 악화될까 염려된다며 엄마를 복년에게 맡겼다. 복년의 집에 와서 엄마는 제일 먼저 부엌을 꾸몄다. 콧구멍만한 부엌이 딸린 작은 방 한 칸이 전부인 복년의 집에서 자신의 공간으로 부엌을 선택한 것이다. 결혼해 지금까지 무엇 하나 버리는 걸 질색하는 엄마의 살림살이는 생각보다 간소했다. 보따리 몇 개를 풀자, 찌그러진 냄비 몇 개와 이 빠진 사기 그릇, 국자, 쇠수저 한 벌, 반짓고리 같은 물건이 잡다하게 쏟아져 나왔다. 제일 덩치가 컸던 건 기름때가 꼬질꼬질 묻고 그을음이 눌러붙은 석유곤로였다. 가지고 온 것들을 부엌 한 구석에 몰아 놓고는 이것들과 어울릴만한 것들이라며 짐 하나를 더 풀었다. 시집올 때 혼수로 해왔다는 빨강 초록의 이불과 땀자국으로 얼룩진 베개 그리고 냄새 배인 오래된 놋쇠요강이 차례로 선을 보였다. 이것들도 어른 한 명 움직일 정도의 부엌 한 가운데 턱하니 자리를 잡았다.
엄마는 큰 개집만도 못한 작은 부엌에서 먹고 싸고 입고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는 이불도 개지 않은 채 밀장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침밥도 점심밥도 저녁밥의 메뉴도 이것 하나로 영원히 동결되었다. 엄마는 빨래를 넣어 삶는 커다란 양동이를 석유곤로 위에 얹어놓고는 애 하나 목욕시킬 만큼 많은 물을 붓고 밀장국을 끓였다. 밀가루를 하얗게 온 몸에 뒤집어 쓴 채 알 수 없는 민요조의 노래를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엄마는 쇠국자로 국을 휘저었다. 때론 그런 모습이 성호를 긋는 마리아처럼 보였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를 때쯤이면 얼굴은 열 사우나탕에 들어간 사람처럼 온통 젖어 있었다. 히죽대는 눈꼬리에선 그 옛날의 복리가 그랬듯이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엄마가 서있던 바닥 위론 샛노란 오줌이 몸빼바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보다못한 복년이 들어설 때면 엄마는 쭈글대는 얼굴에 기묘한 웃음기를 띄우며, 아가, 밀장국 먹어라, 라고 말했다. 밀가루 공장같은 부엌 한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불도, 베개도, 엄마의 살림살이들은 대부분 검댕투성이였다. 뿌연 쌀뜨물같은 공기속에 배여든 국 냄새를 맡으며 엄마는 밀가루 묻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밀가룬 분으로 칠해진 엄마의 얼굴은 어린 시절 지병으로 누워계셨던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허옇게 떠 있었다. 어린 복리가 죽은 것을 믿을 수 없어 눈을 까뒤집었을 때 보았던 그 빛깔이었다.
2.
어쩌다 한번씩 엄마의 눈동자가 복년의 얼굴에 고정되는 때가 있었다. 동공이 점점 커지다가 미간이 구겨질 즈음이면 정신이 돌아왔다는 걸 의미했다. 복리에서 복년으로 이름을 고쳐부르며 동굴같던 부엌에서 몸을 구부리며 나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서는 목욕을 시켰다. 김장용 빨간 고무 다라이에 뜨뜻한 물을 가득 붓고 아기처럼 작고 가벼운 엄마를 달랑 들어 집어넣고 등을 밀다보면 국수처럼 때가 밀려나왔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진 때는 물 위를 가득 메우며 떠다녔다. 복년은 이태리 타올을 끼운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럴때면 엄마는 아프다는 말 대신 어깨를 움츠리다 아이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네 년 때미는 게 꼭 너거 아버지가 날보고 임자, 보지가 벌름벌름 안하요 하며 덤벼들 던 거 겉다. 라고 말하며. 복년은 시큰둥하게 알겄소 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뻘개진 등판을 들썩이며 다시 웃어댔다. 그럴때면 복년도 희끄무레한 물안개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언뜻 본 듯 했다. 오래된 기억속의 아버지는 항상 힘차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통영 평림동 바다 어디쯤에서 두 팔과 다리를 죽어라 휘젓고 있는 아버지 곁에 쫓기는 북한 인민군들이 있었다.
1950년 8월 중순, 한국군 최초로 단독 상륙 작전이 실시되어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통영을 완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북한군은 9차례에 걸쳐 원문고개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좌절당했고 한달 뒤엔 완전히 패주했다. 패잔병들은 육군이 반격해 내려와 원문고개를 봉쇄하고 바다에선 해군이 함포사격을, 하늘에선 공군이 공격을 가세하자 독안의 쥐가 되었고 악착같이 찾아낸 탈출로가 바로 고성으로 가는 바닷길이었다. 인도자를 물색하던 놈들에게 걸려든 이는 바로 복년의 아비였다. 전쟁이 터지기 몇 달 전에 있었던 통영읍 씨름 대회에서 장사 소리를 듣게 된 그를 지목한 사람은 일등상이었던 황소를 그에게 뺏긴 강추달이었다. 그들은 민짐 부락에 살고 있었다.
민짐 부락은 지세가 드센 곳이었다. 백성 민, 볕 양자에 민양부락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옛날 이순신 장군에게 거의 몰살되었던 왜군 시체들이 끝없이 밀려들었기에 민짐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한산대첩 때에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게 쫓기던 왜군들은 통영 나폴리 바다로 들어왔다가 목이 좁아 퇴로를 내기위해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게 된 곳이 판데목, 혹은 사투리로 폰데목 이라 부르며, 아군의 공격을 받아 무수히 많은 왜군들이 도망치다 죽었으므로 송장목이라고도 불렸다. 유속도 심한지라 바다에서 출렁대던 시체들은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둥둥 떠올라 어선들에게 와서 염치없이 부딪히곤 했다. 일부는 여수로 흘러갔고 일본으로도 돌아갔으며 이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유람삼아 중국까지 흘러들어간 시체들도 있었다. 왠만한 시체는 다 건져서 묻어주던 인심좋던 어부들도 이때만은 미운 일본놈들이 썩게 내버려두어야 된다며 피해 다녔다고 한다. 거두어서 장사지내 준적도 없건만 세월이 지나자 어디서 어떻게 잘 썩었는 지 한 놈도 보이지 않았고 민짐은 지금까지도 민짐이란 이름으로 통영사람들 입에 더 잘 오르내리고 있다.
민짐부락에서 오랫동안 장사로 추앙받아오던 추달을 바깥다리걸기로 한번에 자빠뜨린 자가 바로 김봉식, 복년의 아비였다. 그 후 곧바로 봉식은 여세를 몰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통영읍 씨름 대회에서 보기좋게 챔피온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일로 민짐은 몇 날 며칠 연이은 잔치로 술렁거렸다. 당시 백 세대가 모여살 정도의 큰 어촌이었던 민짐은 다른 부락들에 비해 풍요로운 곳이었다. 땅에서 거둔 곡식을 장에 내다 팔아 매년 현금을 만져볼 수도 있었고 꿈을 잘 꾼 다음날 아침에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그득하게 싣고 돌아올 때도 많았기에 통영읍 최고 부자라는 부러움을 살만큼 부를 축적한 이도 많았다. 봉식의 집도 할아버지 때부터 어장을 해 온지라 돛이 세 개인 큰 배를 두 척이나 가지고 있었고 메꾸리라 불리는 머슴까지 두고 있었다. 봉식은 어릴 때부터 자기 이름도 부모 이름도 모르는 메꾸리에게서 씨름 기술을 익혔다.
별보다 먼저 일어나서 소를 몰고 일하러 나가 별이 뜰 때쯤 돌아오는 메꾸리를 기다리다 보니 씨름을 배울 시간이 여간해선 나지 않았다. 점심을 먹을 때쯤 칼리바위산 아래 묏등으로 달려가면 어김없이 소는 풀을 뜯어 먹고 있었고 그 근처엔 소꼴을 가득 채운 지게 하나가 보였다. 그 밑에선 바지를 둘둘 걷어올리고 대나무 소쿠리에 담긴 꽁보리밥을 김치와 멸치 하나를 반찬삼아 메꾸리가 맛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또 왔냐? 땀을 철철 흘리고 뛰어오는 봉식을 보다 흘린 밥알을 입에 쓸어넣으며 그는 벙긋 웃어보였다. 주인보다 나이가 많은 메꾸리가 처음 봉식의 집에 나타났을 때 새경은 받지 않을테니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 십여년이 넘었다고 했다. 보통 사람보다 지능은 많이 모자라지만 순박하고 성실했던 그는 늘 소와 함께 다녔고, 소는 그를 잠시도 놀게 내버려 두지 않았기에 일년 열두 달 아플 새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고뿔에라도 걸린 날은 이불을 덮고 방에서 나오지 않고 끙끙 앓는 소리를 부러 내었다. 그럴때면 저 놈의 자식이 꾀병을 부린다는 질책이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한번 맘 편하게 아플 수도 없는 머슴은 자신의 몸이 탈이나지 않을 정도의 일만 했다. 늙은 메꾸리는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봉식을 당대의 씨름 장사로 키워낸 일은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대회에서 우승을 한 뒤 봉식은 인사를 하느라 부락 사람들에게 술을 계속해서 사야했다. 이 일로 오히려 황금보다 비싸다는 소를 팔고도 갚지 못할만큼의 빚을 지게 되었다. 빚을 지게 되었든 어떻든 장사가 된다는 것은 장원급제의 영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김봉식이 구리빛으로 그을린 팔뚝을 내어보일 때면 복년과 복리는 손에 깍지를 끼고 매달리며 놀았다. 한팔을 잡고 버둥대는 아이 둘을 번쩍 들어오리던 봉식을 떠올릴 때마다 복년은 언제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비를 닮아서 복년도 힘이 좋고 달리기를 잘했다. 십리 길을 왕복하는 일이야 다리에 기별도 안 올 때쯤, 복년은 여섯 개 초등학교가 참가한 마라톤 대회에서 일등을 할 정도의 달리기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빨갱이들에게 잡혀 죽지않기 위해 할 수 없이 길안내를 떠난 아비는 어찌되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가던 길에 바닷물에 빠져 익사했는지 고성에 다 닿아서 총살되었는지, 아님 그놈들에게 끌려 북쪽으로 넘어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헤엄 잘 치기로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웠던 아비가 그렇게 사라진 뒤 복년은 바다가 싫어졌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염없이 바다를 보며 서 있던 엄마의 뒷모습도 귀신같아 보였다.
왠지 모를 덩어리가 가슴 저 한켠에서 목울대를 치받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날이면 복년은 아비가 사준 빨강저고리에 파랑 치마를 입고 무작정 집 밖을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전날 잡은 물고길 내다팔러 부모랑 통영 장에 나간 일이 있었다. 물고기 판 돈으로 생필품 몇 가지를 사고보니 돈은 오간데가 없었다. 복년은 빨강 저고리에 파랑 치마를 입고 지나가는 여자애를 보고는 너무 부러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계속 아비를 졸랐다. 아비는 사주마고 약속을 했지만 이미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버린 뒤라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는 저고리와 치마를 바로 살 수는 없었기에 먼저 옷감을 사서 삯을 주고 옷을 만들어 주는 아낙에게 맡겨야 옷 한 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비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옷감 가게로 가는 길을 손짓하다 울고 또 우는 복년을 부모는 억지로 배에 태웠다. 아비는 민짐을 향해 손수 배를 저어갔다. 복년은 파란 바다 위로 쏟아지는 생선 비늘같은 빛들을 보며 목놓아 울었다. 울음이 그치질 않자 집이 바로 눈앞이었건만 아비는 갑자기 배를 돌렸다. 기나긴 하루 해에 지쳤을 법도 한 아비는 묵묵히 다시 십리나 되는 거리를 되돌아 노를 저어 저자로 돌아갔고 외상으로 옷감을 끊었다. 빨갛고 파란 옷감들을 쳐다보며 복년은 눈이 부셨다. 아비가 생각날 때면 복년은 어김없이 그 옷을 꺼내 입고 달음박질을 쳤다. 무릎 밑에까지 오던 치마가 깡총하니 짧아져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가 될 때까지 입고 또 입었다.
복년의 파랑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날이면 사내아이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복년의 집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다 달아나는 녀석들을 잡으려고 오빠가 쫓아나간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방 두칸 짜리 흙벽집 마당은 아침 일찍부터 낡은 평상 주위로 무언가가 여기저기 가득 흩어져있곤 했다. 모두가 다 복년을 향한 사탕들이거나 편지들이었다. 이런 일은 복년이 마산 작은 아버지 댁으로 일하러 가기 전 해까지 몇 년동안 계속 되었다. 특히 복년의 첫번째, 두번째 남편이 된 장복만과 이동식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찾지 않은 날이 없었다.
3.
첫번째 남편이 된 장씨는 다찌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그는 소주를 시키고 전복에 해삼, 멍게, 개불에 참가재미 참돔같은 생선 구이를 즐겨먹었고 호래기 젓갈에 해삼창자 고나다, 파래 무침도 좋아했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불그죽죽한 얼굴로 복년이 민짐에서 제일 가는 미녀였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얼굴이 훤한 달덩이 같았고 하얀 피부에 키도 컸다고 말이다. 촌에 살아도 촌년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기에 자기가 결혼해 주었다는 허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살아생전 한번도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았다. 산달이 다 된 복년이 허리 펼 새도 없이 굴껍데기 수백 수천 개를 줄줄이 끼워 쌓아두는 동안 그는 뗏목에 나가 이를 쑤시며 누워 있거나 낚시를 하며 소일했다. 한산도엔 형님 어장막이 있었다. 어장막은 배에서 쪄온 멸치를 말리는 곳이다. 멸치잡이 배는 멸치 그물 속으로 흡입 파이프를 내려 배 위의 어창으로 빠른 속도로 빨아올린다. 그 멸치를 작은 그물로 퍼내 발 위에 얹은 뒤 차곡차곡 쌓아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어 삶아 낸다. 삶겨진 멸치는 다시 갑판 뒤로 옮겨져 해풍으로 말려 운반선으로 실어 어장막으로 나른다. 여기서 햇볕과 열풍기로 다시 건조한다. 이때 멸치를 따까리라는 발에 펼쳐 두는데, 이것은 사각 나무판자로 둘레엔 이 센티미터 가량 높이의 테두리가 있어 쌓을 때 멸치를 상할 염려가 없다. 여기에는 멸치뿐만 아니라 꼴뚜기, 새우, 잡어, 쥐치, 띠포리 등이 섞여있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일당을 주고 골라내게 한다. 그는 이곳에 들를 때면 동네 아이들이 멸치 서리를 하지 못하게 지키는 정도의 일만 하고는 형수에게서 멸치를 한부대씩 얻어오곤 했다. 그런 날이면 멸치가 굵고 떼깔이 고와 먹을만 하겠다며 어서 고추장을 내오라고 복년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장씨는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반드시 복어국을 찾았다. 미나리, 무, 콩나물을 곁들인 복어국을 먹어야 속이 확 풀리고 소변이 잘 나와 술독이 몸에 쌓이지 않는다며 먹고 난 뒤엔 소감 발표를 잊지 않았다. 그는 복어 중에서도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졸복으로 끓인 것을 선호했다. 그의 복어 사랑은 대단해서 죽을 때도 복어독으로 황천행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왕왕 입에 담았다. 바다의 돼지로 불리는 복어의 독은 청산가리의 열세배로 제대로 손질하지 않고 먹을 경우 죽을 수 있기에 복어 한 마리에 물 서말이라는 말처럼 다량의 물로 피를 충분히 씻어 주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씨는 무지 심심했는지 이동식과 복어 간 먹기 내기를 하다 평소 바램대로 북망산천으로 떠났다. 이씨 역시 중독이 되어 송장처럼 변해 장례를 치르고 화장하려는 순간 깨어나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저승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이씨는 과부가 된 복년에게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말로 마음을 얻어 결혼에 성공했다.
오래 전 그는 주로 엿을 종이에 정성스레 말아 복년 집 대문 앞에 던져놓고는 염소소리를 서너번 내고 도망을 치곤했었다. 복년의 생일에는 자신이 신던 고무신을 팔아 깨엿을 샀다. 깨엿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거였기에 복년에게도 한번 맛을 보게 해 주고 싶기도 했었고 엿장수의 무쇠가위질 소리를 들으면 엿판이 궁금해져서 쇠숟가락이나 밥그릇을 갖다주고서라도 엿 한두 가락을 떼어와야 직성이 풀려서였다. 또 한편으론 몇 년 뒤에쯤 맞을 법한 큰 고무신이 싫기도 했다. 아이들과 짚으로 엮은 공으로 축구라도 할라치면 신이 헐렁대다 벗겨져버리는 통에 짜증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은 금방 자라기에 비싼 신발값을 생각하면 딱 맞는 것을 사신을 수 없다는 형편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신이 없어졌다고 하면 더 좋은 걸로 새로 사 줄까하고 바랬기 때문이기도 했다. 엿장수가 동네를 다녀간 날은 이 집 저 집에서 아이들 곡하는 소리로 줄초상이 나곤했다. 귀한 물건이 엿과 바꿔진 걸 알아차린 부모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아버지에게 번쩍 들려 집 앞 바닷물에 던져진 녀석도 있었고 밥 때가 되어도 감히 얼굴을 디밀지 못해 빈 장독 안에 숨어 산에서 캔 칡뿌리나 씹으며 잠드는 일도 다반사였다.
4.
치솟는 인기에 기분이 좋을 법도 하건만 중학생 시절 복년은 마음이 애정공세에 달떠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다니고 있는 학교도 다 마치지 못할까봐 늘 전전긍긍이었다. 아비의 실종에 연이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로 인해 큰 빚을 진 큰아버지 김봉석은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부터 배, 어장막까지 모두 팔았으나 결국 살고있는 집 한 채와 농사짓는 밭 조금을 겨우 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족 중 그 누구도 봉석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잣집 장자로 태어난 봉석은 어릴 적부터 무얼하든 부모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 해왔기에 선대부터 번영해 온 가업이 망하는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는 물론 형제, 아내와 자식들도 그를 욕하기 보단 자기의 복이 없음을 한탄하는 것에 그쳤다. 한편으론 가족들에게 육이오 전쟁 이후 상이군인이 된 봉석은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할 도리를 다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류탄 던지기 모의대회에서 일등을 했던 그는 수류탄 병사로 뽑혀 인해 전술을 펼치며 내려오는 중공군을 맞아 최전선에서 싸워야했다. 호를 파고 숨어 있다가 적과의 간격이 삼십 미터 정도로 좁혀지는 것을 기다려 수류탄을 던지고 숨는 과정에서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중상을 입었다. 바로 옆에 날아와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 잽싸게 던졌건만 허공에서 터지는 바람에 목숨만 겨우 건진 것이었다. 전보를 받고 미군병원에 입원한 큰아들을 만나던 날을 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두고두고 이야기 했다. 봉석은 오른쪽 뺨에 박힌 파편들로 턱은 내려앉고 입은 돌아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오리 맞추기 대회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봉석이 던지기를 잘하게 된 것이 다 매년 겨울마다 날아드는 검은 바다오리 떼를 향해 돌팔매질을 한 결과라는 이유에서였다. 두어 달 넘게 바다 위에 동동 떠 있는 오리들은 식량이 귀한 시절 좋은 표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오리를 잡기 위에 작고 매끄러운 돌멩이들을 준비했다. 돌을 많이 주워갈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멍청한 오리라도 인기척이 날 때 날 잡아잡수하고 기다리는 놈은 없는 지라 일단 돌을 던지게되면 다 날아가기 전까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세 개 정도를 던질 수 있을 뿐이었다.
봉석은 걸음마를 떼자마자 오리잡기 대회에 끼어들기 시작해서 열일곱 살 무렵은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낮은 포복으로 바다를 향해 기어가 오리 대가리 정중앙을 조준해 정확히 맞추어야 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은 하루에도 몇 마리는 대가리에 피를 흘리고 바다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배를 타고나가 건져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대개는 팔이 빠져라 하루종일 돌팔매질을 해도 한두 마리 잡을 둥 말 둥 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돌을 던질 때면 푸드덕 눈 깜작할 새 날아올랐다가 얼마뒤 다시 돌아와 출렁이는 바다 위를 윈드서핑하듯 즐기며 천진한 눈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구경하는 형국이었다. 어쩌다 한 사람이 먼저 오리를 잡을 때면 모두 자기 일처럼 환호성을 올렸고, 오리를 건져 돌아가는 순간은 영웅호걸이 따로 없었다. 닭 한 마리 삶아 먹기도 어려웠던 시절 오리가 몰려드는 날은 그야말로 경사스런 순간이었다. 간혹 칼빈총을 어깨에 멘 검찰청 직원들이 형사들과 함께 오리사냥을 나올 때면 봉석의 어머니는 집에서 가장 귀한 음식만 골라 손님 대접에 분주해지곤 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장총으로 오리를 사냥했고 잡은 오리는 가져가지 않았다. 봉석은 중학교를 중퇴하였으나 글씨를 반듯하게 잘썼고 독서를 즐겼다. 그는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였던 시절에도 세무서에서 이년을 일했고 삼촌의 도움을 받아 검찰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가족의 자랑이었고 민짐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행복 하지 않았다. 구름이 짙게 드리워지거나 파도가 높게 일렁일때면 몸속 구석구석 박힌 파편이 혈관을 타고 도는 듯해서 고통을 잊으려 술을 자주 마셨고 담배를 매일 피웠다. 전쟁이 끝난 지 십수 년이 흐른 뒤에도 기침을 심하게 할 때면 입 안에 박혀있던 팥알 반쪽만한 수류탄 조각이 튀어나왔다. 그러던 어느 해 그는 폐암 판정을 받았고 아무도 죽지않을 것 같던 아름다운 가을날 삼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 복년의 엄마와 복년이 임종을 지켰다. 그들은 그가 그렇게 쉽게 갈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를 건네며 고인을 추억했다. 죽기 하루 전날 갑자기 기운을 회복한 일이며 입맛이 돌아와 쇠고기 국을 끓여 달라는 말도 하더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봉밥을 국에 말아 맛있게 한그릇 다 먹고는 웃으며 이제 살 것 같다고 했다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전날 먹은 국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똥을 한무더기 싸더니 정신줄을 놓았다는 대목에서는 다들 눈시울을 붉혔다. 그순간 복년은 자신은 죽기 전에 아무 것도 먹지 않을 것이며 똥오줌은 절대 싸지 않고 죽을 거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 말에 엄마는 복년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칠일 전 자리에 누워 자신이 죽을 것을 안다며 물만 조금씩 드시다가 정말 똥오줌 한번 안 싸고 깨끗하게 가셨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그가 저승사자가 보인다며 구석으로 도망가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떨던 순간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5.
엄마는 어릴때부터 반에서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복년을 볼 때마다 신세타령이 절로 나왔다. 김봉식은 영특한 복년을 무척 아꼈다. 읍내에 나갔다오는 날이면 연필과 칸이 그어진 공책을 사와서 선물로 주곤했다. 여기에 학교 문턱에 가본 적도 없던 아비는 한자 열 십자를 무슨 대단한 글자라도 되는 양 정성껏 적어주었다. 복년은 연필 끝에 침을 묻혀가며 이것을 열심히 따라 썼고 아비의 칭찬을 받을 때면 마음이 뿌듯했다. 한 번 익힌 것을 잊는 법이 없던 복년에게 아비는 자신의 꿈을 걸었다. 그녀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복년을 끝까지 공부시켜서 훗날 봉식을 만나 자식 자랑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고 결국 그녀는 복년을 마산 갑부인 작은 아주버님 댁으로 보낼 결심을 했다.
그는 술도가를 시작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마산 땅 삼분의 일이 다 그의 것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그녀는 친척 집에서 고생할 복년을 생각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공부를 더 시키기는 커녕 먹이고 재워주기만 한다 했어도 불평할 처지는 못되었다. 엄마가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일때면 잠든 척하고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던 복년의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흙벽을 뚫고 들어오던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슬픔이 복년의 가슴으로 밀물쳐 들어왔다.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간 오빠는 감감 무소식이 된지 오래였고 엄마는 갯벌에 나가 조개를 파서 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것도 열흘에 한두번은 동네 어귀 큰 나무 뒤에 숨어있던 도적놈에게 돈주머니를 털리기 일쑤였기에 의욕이 꺽이기 십상이었다.
남편의 남동생인 김동팔은 가난한 집안에서 시집왔다는 이유로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남편을 마주할 때마다 이혼하라 종용했다. 그리하면 마산에서 복년 하나쯤은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릴때면 서러움이 복받쳤지만 남편이 없는 마당에 복년이 제 아무리 뛰어난 수재라고 한들 그녀 홀로 학업을 계속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팔의 술도가는 마산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술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마산 사람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술을 명주라 했다. 마실 때 거부감이 없이 부드럽게 넘어갈 것, 잔을 입에 댈 때의 그윽한 향이 입안에 오래 남을 것, 취하게 마셔도 뒤끝이 깨끗해야 할 것과 같은 세 가지 조건에 어김이 없다는 평 때문이었다. 공장에는 어른 대여섯 명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의 큼지막한 술독들이 백여개가 족히 넘게 있었다. 전 직원은 모두 육십명으로 쌀푸대를 뜯어 쌀을 씻어 불린 뒤 쪄서 식힌 다음 누룩을 넣어 버무렸다. 발효에는 보름 정도가 소요되며 두 차례에 걸쳐 술을 짜냈고 술 한 병이 되는데 대략 스무날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모두들 아침 일곱시경에서 밤 열시경까지 꼬박 일을 했다. 여자들은 앉아서 술집에서 수거해 온 헌 유리병의 낡고 지저분한 상표들을 떼어내고 새 것으로 갈아 붙였으며 솔을 집어넣어 깨끗이 세척하는 일을 도맡았다. 남자들은 보다 더 힘들고 고된 일을 했다. 고들밥과 섞인 누룩이 발효되면서 술이 끓어오르기 시작할 때면 장대를 집어넣어 넘치기 전에 휘젓는 일과 다 된 술을 나무통에 옮겨담아 어깨로 져 나르는 일들을 맡았다. 이 독 저 독에서 술이 익기 시작할 때면 남자들은 술을 젓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걸어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항상 활기가 넘쳤다. 일거리가 없을 시기에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곳에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복년은 일꾼들의 식사 준비를 하는 것과 유리병 씻는 일을 사오년 했다. 상을 차리고 필요한 곳에 반찬과 국을 나르던 어느 날, 복년은 박태호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향은 함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답을 팔아 아들의 학비를 대었고 이 일로 두고두고 동네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부모의 기대 속에 졸업은 했건만 일자리가 워낙 귀한 시절이라 태호는 술도가에 취직을 했다. 일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를 할 때면 뼈가 다 주저앉는 것처럼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멍할 정도로 피곤했다. 꿈은 원대하나 현실은 따라주질 않아서 마음은 몸보다 더 지쳐있었다. 그는 딱 이년만하고 일을 그만둘 결심을 했다. 자신에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대를 걸고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뭔가 좀 더 스케일이 큰 일, 많은 돈을 벌어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그런 일을 찾아서 뛰어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술지게를 져 나르는 일에 신물이 날 무렵, 그의 심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복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무작정 마음에 들었다. 복년도 몸가짐이 바르고 남성답게 근육이 도드라진 그가 싫진 않았다. 그는 복년의 곁을 지나칠 때면 어김없이 말을 붙였다. 농담을 건네기도 했고 힘들거라 위로도 했다. 점심때는 반찬이나 밥을 더 달라고 하거나 처음부터 미리 많이 담아준 날은 물을 여러 번 청했다. 그러다보니 둘은 자연스레 가까워져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갈때면 언제부턴가 그가 복년을 바래다주기 시작했다. 길을 오고가며 주로 말은 그가 먼저 하는 편이었고, 내용은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일과 야망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는 중학 시절, 아래채에 기왓장을 올릴 큰 돈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긴 적이 있었는데, 그 돈을 들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연락선을 타고 도망가려다가 깡패를 만나 돈을 다 털린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가는데 성공했더라면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운 맘이 들곤 했으나, 복년을 만나고는 그런 맘이 깡그리 없어졌다고도 했다.
걸어가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두려고 애썼고 손 한번 잡아본 적 없었건만 눈이 밤새 내린 어느 날 아침, 그는 복년에게 자기랑 결혼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술도가에 가려고 복년이 집 문을 나섰을 때 그 말을 하기 위해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아침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눈길은 둘의 발자국으로 폭폭 패여 뒤에 올 사람들에게 그 흔적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 날, 복년은 술도가에 나타나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태호는 그녀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으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복년도 그를 좋아한 것이 분명한 마당에 그녀가 원하던 결혼신청을 받고는 왜 사라졌는지 그는 죽는 날까지도 알 지 못했다.
복년이 갑작스레 떠나자 태호도 다니던 술도가를 그만두었다. 그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소화기와 그 안에 들어갈 약을 제조해 파는 일이었다. 이 일은 당시 마산 소방서장이던 삼촌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에 독점으로 판매가 가능했고 엄청난 돈벌이가 되었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아내들은 모두 그보다 빨리 죽었다. 가끔 그는 기사에게 차를 운전시켜 통영을 둘러보고 가곤했다. 꿈길 육십리라 불리는 산양면 일주 도로를 돌다가 서씨 묘와 달아공원에 들려 한려수도의 섬들이 황금 물결 위로 곱게 흩어진 양을 그윽히 바라보기도 했고 미래사에 내려 약수를 마시고 사찰 안을 잠시 거닐기도 했지만 법당 안은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간암으로 죽기 육개월 전 그는 모든 코스를 생략하고 구름다리 한가운데 홀로 바다를 보며 서너 시간을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멸치잡이 어선 한척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곡을 쩌렁쩌렁 울리며 다리 밑을 지나갔다. 그 배 뒤론 갈매기들이 뭔가를 얻어먹을 요량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펴며 바닷바람에 부딪혀 보았다. 시원했다. 높게 혹은 낮게 비상하는 물새들이 파도소리를 지휘하듯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짭짤한 해풍이 은색으로 변한 그의 머리칼을 흩으며 불어댔다. 영국 신사같은 그의 바바리코트도 바람을 잡으려는 듯 부풀어 올랐다. 기사가 다가와서 그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차를 탔다. 가는 길에 그는 복년의 둘째 남편 집 앞에서 잠시 머물렀고 아이들이 나오자 천원짜리 한장씩을 손에 잡혀주고는 말없이 마산으로 떠났다.
6.
어느 여름, 복년은 버스를 타고 시원스레 뻗은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통영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복년은 동백아가씨라는 곡을 가만히 흥얼거렸다. 그녀의 엄마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엄마는 이십여년 전에 돌아가셨다. 병세가 심해져서 집을 나가서 자주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자, 복년은 엄마의 외가가 있는 통영시 산양면 풍화리 양지 바른 곳에 방 두칸 짜리 작은 촌집을 하나 구했다. 허리께까지 밖엔 안오는 양철 대문을 삐걱 밀고 들어서면 왼편엔 부엌과 뒷간, 오른편엔 텃밭, 그 뒤엔 입구는 작지만 깊이는 삼미터는 족히 넘는 돌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곳으로 이사하자 엄마는 밀장국을 만드는 대신 텃밭의 채소들을 반들반들 윤나게 키워냈다. 더 이상 나돌아다니려 하지도 않았다. 어느 햇볕 좋던 날 복년은 시내 미장원으로 나가서 파마를 하고 돌아왔다. 엄마는 흙마당에 잠든 듯이 업드려 있었다. 엄마, 좋겄소. 그 보고접던 복리 이제 실컷 만나게 됬으니. 복년은 산사람에게 말을 걸듯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도 맞장구를 치는 듯 몸을 뒤집자 야릇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렀던 노래를 몇 번 되풀이하며 스쳐가는 창 밖 풍경을 음미하다 보니 벌써 세시간이 지나 있었다. 요즘들어 복년은 달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시간 앞에 놀라곤했다. 젊은 날 그렇게 무겁고 느리던 시간은 엄마가 죽고나자 가벼워지고 빨라져갔다. 하루하루가 꿈 같았고 꿈은 생시같았다.
대진고속도로가 사오년 전에 개통된 뒤로는 일곱 시간 걸리던 시간이 네 시간으로 단축되어 고향으로 가기가 여간 수월해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이렇게 빨리 통영에 도착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 편이었다. 오랜만에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기억들이 새삼 반가워서 버스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기도 했다. 과거의 서랍들을 뒤지자 두 번째 남편의 자개공장이 나타났다. 자개를 깎아대는 시끄러운 기계음과 공중을 가득 채운 자개 먼지들이 숨을 쉴 때마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악조건 속이었지만 남편도 복년도 돈이 올라오는 재미에 처음엔 힘든 줄을 몰랐다. 자개주문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만드는 족족 차례를 기다리던 상인들이 급하게 사갔다. 한동안 일이 잘 되어가자 그는 작은 마누라를 얻어 딴 살림을 차렸고 십여년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복년은 그와의 사이에서 난 딸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좁은 고향 바닥에서 자꾸만 그들과 부딪히는 게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동식은 자신의 바람기를 다 복년의 탓으로 돌렸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편네랑 더는 살 수 없다며 말이다.
이씨가 공장에 차 배달을 오던 다방레지랑 눈이 맞은 뒤로 복년은 하루도 두드려 맞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혼해 주지 않는다고 독한 년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딸이 훗날 컸을 때 애미 애비가 이혼했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모진 매를 견디고 또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댁은 이씨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들을 연년생으로 내리 둘을 낳았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날 복년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마음이 아프지도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지도 않았다. 남편들은 사는 동안 집에 돈을 갖다 준 적이 없었기에 그녀가 홀로 세상에 대면해야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던 터였다. 장씨가 죽었을 때도 남편의 매가 쏟아질 때도, 이혼을 당할 때도 울어본 적 없는 복년이 딱 한 번 눈물을 흘린 때가 있었다.
열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보따리를 싸서 통영 원문초소 사거리를 넘어가다가 왼편에 보이는 바다를 보고서였다. 문둥이 들이 몰려사는 나환자촌이 바다 한 쪽을 배어먹으며 웅크리고 있었다. 나무를 하다 옻독이 몸에 올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오빠를 위해 어릴 적 아비의 손을 잡고 문둥이 마을로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곳엔 피부병에 잘 듣는 연고뿐만 아니라 고질병에 효험이 있는 정체모를 약들이 많아 통영 사람들은 종종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복년은 붕대를 둘둘 감은 손이 무서워 아비가 곡식을 주고 약을 받을 때 그의 뒤에 숨어 얼굴도 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비가 사준 왕사탕을 뺨이 불룩해지게 입안에 물고 뱅뱅 돌며 춤을 추던 기억이 통영을 등지고 떠나던 복년의 목을 자꾸만 졸라댔다. 소리내어 울지 않는 문둥이처럼 눈에선 바닷물같이 짠 눈물이 고였다 흐르길 반복했다.
살아생전 다신 오지 않으리라 입술을 깨물고 바라보았던 통영 바다는 밝고 파랗게 나부끼던 파랑치마처럼 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그 빛나는 물살위론 연탄불 석쇠 위에 구워지는 뽈래기 등 터지듯 힘차게 팔다리를 놀리며 헤엄쳐가는 아비의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아비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를 협박해 바닷길을 건너갔다는 빨갱이들도 한 놈도 보이지 않았다. 복년은 아비의 수영 실력이 놈들을 따돌린 거라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꿈인가 싶어 눈을 꿈쩍여 봐도 아비는 여전히 북신만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징집된 군인들을 태우고 부두위에 선 가족들에게 인사하는 배처럼 한 바퀴 돌더니 가는 듯 하다 다시 돌고 다시 돌며 복년의 애간장을 녹였다. 번뜩이는 전어처럼 유영하던 아비를 바라보는 복년의 심정을 알 길 없이 버스는 제 속도 그대로 가던 길을 재촉했고 그녀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때 그 바다가 그립기도 하고 또 하나, 수십 년 전의 약속 때문에 일흔이 다 되어 통영 가는 버스를 다시 타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옛날 그런 약속을 했던가 싶어질 때면 언제고 한번은 고향을 다시 찾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었지만 통영행을 감행하긴 쉽지 않았다. 불임으로 고생하던 딸이 시험관 아기 시술로 한꺼번에 세 쌍둥이를 낳게 되어서 복년은 십여 년을 하던 간병인 일도 접고 딸의 육아를 도와야했기 때문이었다. 태어난 아이 하나는 아토피 피부병을 갖고 있었다. 가려워서 밤잠을 못자고 우는 아이를 안았다 업었다하며 달래는 통에 잠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다. 산후 도우미 아주머니도 와서 며칠 일을 하더니 너무 힘들다며 사흘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우체국에 다니는 사위도 육아휴직을 하고 함께 아이를 돌보았다. 복년은 몸이 예전같지 않아 도저히 더 이상 딸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딸이 안쓰러웠지만 사람을 다시 불러 쓰라 하고는 짐을 챙겼다.
복년은 꿈속에 수십 차례 나타났던 통영을 한 번은 다녀오고 싶었다. 생일이 지날 때마다 나이를 계산하며 일흔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 언젠가 술도가에서 같이 일했던 태호와의 약속이 자꾸만 생각나서였다. 태호는 통영을 가 본 적이 없다며 복년에게 언제 한번 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다. 그때 복년은 일흔이 되는 해 칠월 칠일 일곱시경 통영 폰데다리에서 기다릴테니 인연이 있으면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보자고 농을 했었다. 그는 그녀와 달리 진지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며 되물었다. 정말 그때 나올거냐고.. 그럼 그가 통영에서 제일 좋은 곳에 가서 밥을 사겠다고 했다. 그런 약속을 나누며 그들은 그날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말하며 한참 웃었다.
7.
이런저런 추억이 복년의 뇌리를 스쳐가는 동안 버스는 벌써 통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갈대숲만 무성히 우거졌던 죽림은 신도시로 변해있었다. 곧게 뻗은 길과 성처럼 생긴 모텔들 우뚝우뚝 솟은 아파트들로 예전의 모습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시외버스터미널도 북신동에서 죽림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복년은 택시를 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택시 운전사에게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을 알려달라 부탁했다. 택시는 복년을 항남동 엔젤호 터미널 부근에 있는 한산호텔에 내려주고 떠났다.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시설이 깨끗하고 전망이 좋다는 게 추천 이유였다. 복년은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방을 하나 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바다가 들어왔고 방도 밝고 정갈했다. 군함처럼 큰 배가 여러 척 물 위에 떠 있었고 맞은편 조선소에선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은 물개처럼 엎드린 바다를 보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들었다. 복년은 밖으로 나가 서호 시장 대장간 골목에 있는 한 시락국집을 찾아갔다.
사오십년 전처럼 여주인은 무쇠 가마솥에서 연방 장어로 끓인 된장 시락국을 퍼 나르고 있었다. 갈치 젓갈 된장에 박은 고추, 무채, 김치 등 열대여섯 가지 반찬이 푸짐하게 나왔다. 새벽 세시 반부터 문을 여는 이 집은 언제나 속이 출출한 어민과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밥을 말아 국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자 복년은 그제사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그녀는 여행용 가방 안을 한참 뒤적여 봉투 하나를 꺼냈다. 누렇게 색이 바랜 편지 한 장이 나왔다.
태호씨, 아주 오래 전 아무 말 없이 당신 곁을 떠났던 일을 변명하고자 이렇게 펜을 듭니다. 당신을 떠나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한동안 일을 하며 숨어 살았었죠. 당신이 제게 결혼 신청을 하던 날, 얼마나 기뻤던지요. 하지만 새벽이 오도록 이런저런 염려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우린 서로 사랑했죠. 네……. 그건 분명한 사실 이었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진실도 있다고 느꼈었거든요. 당신은 꿈이 컸던 사람이었죠. 간혹 제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날 지 모르겠어요. 복년씨, 이 엄청난 술도가가 작은 아버님 거라서 정말 좋겠어요. 저는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저는 당신이 절 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고, 우리의 결혼이 술도가에서 당신 출세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땐 어떻게 될까하는 염려가 들기도 했어요. 제가 떠나드리는 게 당신의 앞길에도 좋을 거라 여겼습니다.
예전에 적어둔 편지를 다시 읽다보니 마치 어제 일처럼 그날의 아픔이 떠올라 복년은 눈물을 글썽였다. 날이 밝으면 오래 전에 그와 약속한 날이 된다. 복년은 그가 나올 지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혹시나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졸였다. 그가 복년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통영을 몇 번씩 다녀가더라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다. 복년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념들을 씻어내려는 양 세면대로 향했다. 클렌징오일로 얼굴을 문질러 티슈로 화장을 지우고 폼클렌징으로 다시 꼼꼼하게 세안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수분과 탄력이 부족해 피부가 갈라지고 굵고 미세한 주름살이 잡혀있었다.
거울을 보다 그를 떠올리자 불현듯 지나간 젊음이 아쉬웠다. 하지만 추억이 깨질까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발걸음을 돌려버린다면 이제까지 해 온 가슴앓이를 죽는 날까지 지고가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갑자스런 이별 뒤로 해가 바뀌고 또 바뀌는 동안 한번도 소식을 주고 받은 적이 없이 살아왔다는 게 별안간 한스러웠다. 그가 그녀를 무정한 사람이라 욕했을 것 같았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복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꿈에 그가 나타났다. 그는 헤어지던 순간의 모습 그대로 판데다리 위에 서 있었다. 두 눈은 따뜻하게 빛났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 수록 그녀의 심장 고동 소리도 빨라졌다. 그의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세월이 비껴간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다시 보니 그는 얼굴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절을 했다. 제 부친은 박자 태자 호자 이십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복년은 발을 딛고 있는 다리가 무너지며 바다로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작년 여름 부친께서 돌아가시면서 지켜야 할 약속을 못 지키고 가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고 하시며 저보고 대신 아주머니를 만나보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잊은 날이 없다는 한 마디만 전해달라 하셨구요. 시신은 화장해서 이곳 판데다리 밑 바다에 뿌려달라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말하는 도중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난폭하게 나부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마주할 기력이 없어 바다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는 약속을 지켰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볼 수 없기에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이미 늦게 날아든 전보처럼 헛헛한 것이 되어버렸다. 꽉 차 있던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한순간 복년은 바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사랑과 그리움을 머금은 아비의 눈동자를 닮아있었다. 다 알고 있다고, 괜찮다고 그녀에게 말하는듯 했다. 복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파란 바다 알갱이들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지만 복년은 잠에서 깰 기척이 없었다. 아마도 아비를 다시 만나 꿈에서 꿈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쥐고기로 만든 양꼬치를 먹는다
오리고기로 만든 쇠고기 육포를 먹는다
당연히 양고기와 쇠고기 맛이 난다
복년이에 대한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려다 모던하지 못한
그저 이야기를 쓴다 숱한
목소리의 본질에 대한
현대 소설로 둔갑한 시를 쓴다
부채를 펼치고 접듯
가짜 육포와 가짜 양꼬치 사이에 끼워 팔려한다
내 모든 시를
앞으로도 다시 읽을 생각이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