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건넷 주인장과 이런저런 얘기중 '이번달 기사는 로마군...'이라고 흘려 말했는데 11월달 예고편 제목에 <로마군은 왜 짧은 칼을 썼는가?>라는 타이틀이 달려 버렸다. 헐...머 답을 달자면 너무 짧고,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간단히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기술하면서 로마군의 '짧은칼'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총싸이트에서 칼얘기 하는건 반칙 아닌가...
1. 로마의 시작
근래에 들어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시작해서 <트로이>, <킹아더> 그리고 개봉 예정인 <알렉산더>까지 '칼쌈'이 주가 되는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되고 있다. <킹아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흥행에도 성공하고 있다. 총기액션보다 좀더 실감나는(사지가 절단나는 장면 쯤은 우습게 나온다) 활극이 주가 되므로 자극적인 것을 찾는 관객의 구미에서도 쩍..들어붙을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 <트로이>, <킹아더>, <알렉산더> 모두 로마와 관련이 무쟈게 깊은 영화라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기원전 13세기 무렵, 트로이와 그리스의 10년간의 전쟁은 트로이의 목마 작전으로 허무하게 끝난다. 살아남은 트로이인은 트로이왕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와 그의 일족 뿐이었다. 그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기도 했는데, 그리스군의 손에 아들내미가 죽는 것은 보기가 싫었는지 아프로디테는 그와 그의 일족을 무사히 탈출시킨다.
아이네이아스의 탈출
아이네이아스와 그의 일족은 흘러흘러 방황하다가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도달하게 된다. 아이네이아스가 맘에 들었는지....원주민의 왕은 딸을 아내로 주었고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그 후로 400여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날, 알바룽가의 왕이 서거하자 동생되는 작자가 왕위를 차지하고 조카되는 왕녀를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버뜨....한 미모하는 그녀에게 군신 마르스가 한눈에 반해, 눈물의 쌍둥이가 태어나게 된다. 왕녀의 삼촌되는 양반은 쌍둥이를 내다 버렸지만 늑대들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그 일대 양치기들의 지존, 승냥아치가 된다.
늑대젖을 먹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이 쌍둥이는 세력을 키워나가다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인근 양치기들과 세력을 규합해 삼촌을 박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어미는 이미 감옥에서 죽은 상태. 두 쌍둥이는 어미의 복수를 하는데 성공했지만 권력의 힘은 핏줄보다 무서운 것이었는지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그의 이름을 딴 로마를 탄생시킨다. 라틴어를 쓰는 시골동네 양치기가 화려한 왕의 귀환을 한 셈. 이때가 기원전 753년 4월이었다.
2. 왕의 시대
로마의 초대 왕이 된 로물루스는 기존의 왕들과는 틀렸다. 원로원과 민회를 구성해서 국정을 분담시켰는데 로마 정치제도의 근간을 만든 셈이다. 문제는 이들에게는 씨앗을 퍼트를 여인네가 그다지 없었다는 점. 방법은 한가지...보쌈을 해 오는 것이었다. 결국 인근의 이민족 여인네들을 강탈해 오고, 그녀들의 오빠, 아빠, 삼촌되는 사람들까지 로마에 편입시키는 수완을 발취한다. 전쟁을 통해 정복한 지역민들을 노예가 아닌 로마시민으로 대우하는 오랜 전통 또한 로마의 선조인 로물루스대부터 시작된 셈이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또한 로물루스는 그유명한 로마의 '백인대 제도'를 고안하기도 했다. 이는 로마군단의 최소전투단위로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들을 이끄는 백인대장은 100명의 병사들 사이에서 추대로 뽑히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로마는 시민군 편제로 군대가 구성되었다. <전 국민의 예비군화> 였던 셈이었는데 평소에는 본업에 충실하다가 1년씩 군역의 의무를 이행했다. 로마군 내에서 백인대장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였다. 일본 애니매이션 Z건담에 등장하는 백식(百式)이란 모빌슈트의 설정에....
'설계자가 로마군 백인대장처럼 백기의 모빌슈트를 이끄는 병기란 뜻에서 백식이란 이름을 붙였다'
...란 내용이 나온다. 생긴 모습도 로마병사와 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MSZ-100 백식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는 에투루리아 인들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남부에는 그리스에서 건너온 도시국가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하는 분위기였다. 신생아 수준이었던 로마가 양대 세력 속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건 이탈리아 중부 지역이 에트루리아인이나 그리스인들에게 그다지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물루스로부터 시작된 로마의 왕정은 세습이 아니었으며 민회에서 선출되는 '종신제 대통령'으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하다. 왕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숨쉴틈 없이 인근의 세력과 전쟁을 벌여나가면서 세력을 확충해 나가야 했다. 제6대 왕인 세르비우스에 이르러 로마군의 초기 전술이 완성되는데....
당시의 전투는 말 그대로 '개싸움'이었다. 평야에 헤쳐 모인 후 일제 돌격...이 주류였는데 세르비우스는 로마군을 전위, 본대, 후위로 나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신참나기들을 전위에 배치하고 전쟁경험이 많은 30대 ~ 40대까지의 중무장보병을 주력군을 본대로 하고, 어르신네들 위주로 구성된 후위를 백업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직사각형의 스크럼을 짜고 싸우는 방식을 택했는데 효과를 톡톡히 봤다.
로마 중장보병
이 시기에 로마인들은 주변의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 가며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이민족들을 로마시민으로 편입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으로부터 244년째 되는 해에 초기 왕정은 끝을 맺게 된다.
제7대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내미가 단단히 사고를 쳤던 것. 섹스투스라는 이 젊은친구가 평소 연모하던 사촌의 아내를 겁탈하고 토낀 것이다. 이름값을 한 셈. 여인은 자살하고...가뜩이나 로마 시민들이 선왕을 암살하고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던 와중에 왕의 아들이 제대로 한건 터트린 셈이었다. 민회의 결의에 의해 타르튀니우스와 그의 일가는 로마에서 쫒겨나고 섹스투스도 로마시민에게 살해된다. 그후 로마는 공화정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종신제였던 왕 대신에 임기가 1년인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3. 켈트족의 침공
로마의 영토확장은 계속되었고 이젠 이탈리아반도 북쪽의 에투리리아까지 넘보게 되었다. 에트루리아 계열 도시국가들을 하나둘 라틴동맹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기원전 396년에 이르러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유력 도시국가였던 베이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로마의 평민과 귀족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똘똘 뭉쳐서 일단 까부수고 보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뉘어 쌈박질하는게 상례였는데 이번에는 이 쌈박질의 정도가 지나쳤다.
베이를 평민중심의 로마 제2의 수도로 삼자는 평민들의 요구에 귀족들이 크게 반대를 하고 나선 것. 베이 공략군을 이끌었던 전쟁영웅 카밀루스는 평민들의 주장에 앞장서서 반대했지만 결국 자신이 이끌었던 부하들의 손에 의해 축줄되고 말았으며 더 이상 평민들의 요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평민들은 모조리 베이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총사령관 자리도 비어있고 병력 절반이 탈영한 상태에서 사건이 터지고 만다. 기원전 390년 여름, 아펜니노 산맥을 넘은 켈트족이 이탈리아 북부 에툴루리아 도시들을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틴동맹국인 에툴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자기코가 석자인 상태였다.
영화 <킹 아더>에서 켈트족의 여전사로 등장하는 기네비어....
아더부인이 이젠 문신을 그리고, 활까지 쏜다!!!
로마인들은 켈트족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취급했지만 이들의 용맹은 로마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기병과 보명, 전차로 구성된 이들의 군단은 우선 전차가 적진을 무너뜨린 뒤 보병과 기병이 돌격하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금목걸이에 팔찌만 찬 알몸으로 뛰어드는 무리도 있었다. 켈트족에게는 자기가 죽인 적병의 목을 잘라 말 목에 메다는 관습도 있었고 싸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머리를 기름에 바싹 튀기는...것은 아니고 기름에 절인 머리를 보여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이런 공포스런 민족이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노리고 처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켈트족과 로마 사이에서 방파제 역할을 했던 에트루리아는 이미 로마인의 손으로 말끔히 치워진 상태, 게다가 로마 내에서의 계급간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의 전매특허와 같았던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마저 망실되어 있었다. 급조된 로마군은 테베강 상류에서 켈트족과 일전을 벌이지만 이미 예전의 로마군이 아니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패주한 로마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고 열려있는 로마의 성문으로 켈트족이 들이닥쳤다.
영화 <킹아더>에서 아더는 15년간의 의무 복무를 마치고 부하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평범한 로마군인으로 등장한다.
청/장년들 일부만이 로마의 일곱언덕 가운데 가장 높고 방어에 유리한 카피톨리누스 언덕 고지로 도망쳤다. 이곳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몸을 피할 수 있었던 로마인은 매우 드믈었다. 나머지 로마 주민들은 폐허가 되어가는 로마 시가지에서 켈트족에게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피신한 일부 로마인들은 이곳으로 처들어 온 켈트족을 몇차례 막아내긴 했지만, 그들의 터전이 잿더미가 되어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영웅 카밀루스는 로마인들 손으로 추방되어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로서도 딱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불행중 다행히도 켈트족 전사들은 로마의 도시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시체를 하수구에 처박아 버렸기 때문에 수돗물은 마실수 없게 되었고 창고는 보이는 족족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방치된 시체들 때문에 전영병이 나돌아 켈트족마저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인들은 켈트인들에게 협상을 제안하고 몸값으로 금 300Kg을 제공하고 나서야 다시 로마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때가 기원전 390년이었다. 로마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그다지 볼 것도 없었지만 로마의 문화유산들은 흔적도 없이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로마가 힘으로 굴복시켰던 주변 라틴동맹국들마저 로마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 셈. 급상승후 급추락을 한 셈인데 역사에는 비슷한 범례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스 일대의 미케네 문명은 10년만에 트로이 문명을 멸망시켰지만 기쁨도 잠시...그리스군 총대장 아가멤논은 욕실에서 아내의 정부에게 살해당하고, 오랜 방랑끝에 고향에 돌아온 오딧세우스는 아내를 차지하려고 모여든 사내들을 모두 화살로 쏴 죽이고 나서야 그의 여정을 끝낼 수 있었다. 결국 기원전 1200년 대에는 철기로 무장한 도리아민족이 미케네의 청동기 문명을 완전히 사멸시켜 버렸다.
그후 400년 후에 가서야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 - 폴리스 -들이 다시한번 화려한 그리스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하지만 도시국가의 한계로 인해 이들은 좀처럼 단합하지 않았다. 결국 페르시아가 처들어 오고 나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일치단결해서 페르시아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트로이 전쟁 후유증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결국은 지들끼리 쌈박질을 벌이게 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피떡이 되도록 주물러 터트렸지만 내세울 만한 것이라곤 군사문화밖에 없는 스파르타의 패권도 오래 가지 못했고 뒤를 이은 테베 또한 부실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아웅다웅 하면서 인접 국가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4. 풍운아 알렉산더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에 넘어가고 얼마후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다. 그는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를 정복했고 살아생전에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를 가르쳤던 아리스토 텔레스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화를 숭상했지만 반란의 분위기가 엿보이는 그리스의 테베같은 폴리스는 가차없이 토벌하고 전시민을 노예로 팔아 버리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라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여개나 건설했으며 그가 숭상했던 그리스의 아테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짬뽕한 헬레니즘 문화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사실 알렉산더가 원정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아테네는 몇차례나 '민주주의를 위하여....'식으로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알렉산더는 번번이 봐주곤 했다. 이는 나중에 로마가 패권을 차지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마는 알렉산더처럼 무르지는 않았다. 뭐...알렉산더가 33살에 급사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한두 번 정도는 쥐어 박았을 지도....
LAPD SWAT 대원에서 알렉산더 대왕으로 전직한 콜린 파렐
알렉산더가 동방에서 풍운을 일으키는 사이, 로마는 추방했던 카밀루스를 다시 불러들여 켈트족이 짓밟은 도시를 원상복귀하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라틴 동맹국들을 하나씩 무력으로 제압해 나갔다. 동맹국들은 야만족의 침입에 무너져 버린 로마에게 등을 돌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참에 로마를 접수하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로마는 이들의 도전을 모두 물리쳤다.
카밀루스는 켈트족의 기동력에서 착안하여 그동안 로마군의 전투대형이었던 커다란 직사각형 대신에 중대별로 작은 정사각형을 이루어 돌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장기간의 전투에도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하고 편안한 숙영지 건설을 중시했는데, 이는 훗날 로마군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즉 병참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파악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카밀루스는 평생에 한번이면 영광이라는 '개선식'을 네차례나 할 수 있었으며 로마인들도 켈트족의 악몽에서 벗어나 점차 과거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이었던 건 알렉산더가 이탈리아 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마케도니아라는 소국에서 태어나 그리스 일대를 손에 넣었지만 이들의 문화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를 호시탐탐 노리던 페르시아야말로 그가 우선적으로 제거해야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나서도 그는 계속 동방으로 진출했고, 한창때인 33살에 원정길에 열병으로 급사했기 때문에 로마와의 인연은 생기지 않았던 셈이다.
알렉산더의 원정
5. 로마연합
그렇다고 해서 로마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로니아에서 객사하기 3년 전부터 로마는 이탈리아 중남부의 산악지대를 지배하고 있던 삼니움족과 싸우기 시작했다. 한때 1만명의 로마군이 삼니움족의 매복에 걸려들어 무장해제되어 쫒겨나고, 결국 삼니움족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기도 했다.
로마군의 특징중 하나가 싸움에서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재기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인근의 군사 강국 카르타고의 경우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무조건 사형에 처했던 것과 비교해 볼만 하다. 또한 새로운 전술을 도입한다. 군단(레기온)을 구성하는 중대의 지휘관은 총사령관인 집정관의 명령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독자적인 행동도 임기응변으로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는데 이는 기동성을 높여 주었다. 그리고 삼니움족이 사용하던 투창의 효력에 주목하여 당장 그것을 도입한다.
'로마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창(Pilum)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자 로마연구에 대한 논문으로도 유명한 몽테스키외가 한 말이다. 삼니움족으로부터 전수된 것이라 여겨지는 이 필룸이란 물건은 던지기도 하고 직접 들고 사용하는 백병전의 용도로 쓰였다. 필리움은 크게 창날, 자루, 그리고 창날과 나무자루를 연결시키는 소켓으로 구성된다. 일종의 조립식 창인 셈인데 크기는 1m에서부터 2m를 넘는 것까지 있었고 무게도 1.5Kg에서 3Kg까지 다양했다. 소켓의 형태에 따라 아래와 같이 크게 3종류로 나뉘어진다.
필리움(Pilum)
공통적인 특징은 창날이 아주 가늘고 길다는 것과 소켓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무겁다는 점이다. 별로 특징이랄 것도 없는데 왜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군의 무시무시한 무기로 평가받았을까?
비밀은 창끝에 있다. 연철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던져서 적군의 방패에 꽂히면 무게 때문에 그대로 휘어져 버린다. 근접했을 때 던지면 방패를 뚫고 가슴을 관통할 수도 있겠지만...문제는 그다음 부터다. 화살을 비오듯이 퍼붓기 때문에 방패를 그대로 버릴 수도 없고, 창끝이 화살촉처럼 생겼기 때문에 빼내기도 쉽지 않다. 방패에 3개 정도의 창만 꽂히더라도 무게는 5Kg을 넘어 버린다. 간혹 빚맞은 필리움을 들고 로마군에게 도로 집어던져 보기도 하지만 이미 땅바닥에 떨어진 필리움의 창끝은 휘어져 있기 때문에 창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상태이다.
독일 Kalkriese에서 발굴된 필리움 일부
결국 적군은 방패를 포기해야 하는데, 방패가 없는 상태에서 로마군의 중장갑 보병과 백병전을 벌인다는게 결코 만만한게 아니었다. 전투가 끝난후 휘어진 필리움의 창날은 원상태로 복구되어 재사용했다. 필리움은 훗날 2차 포에니 정쟁때 한니발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치는 스키피오가 지금의 에스파니아 지방에서 쓰던 것을 참조해서 보급한 글라디우스(Gladius)와 함께 로마군의 대표적인 무기로 자리잡는다. 이번달 포켓 히스토리의 주제어인 '짧은칼'에 해당하는 바로 그놈이다.
참조로 그리스에서건...로마에서건...병사의 직위에 관계없이 주무장은 칼이 아니라 창이었음을 명심해 두셔야 한다. 특히 그리스의 경우 길이가 7m에 이르는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보병들이 빽빽...하게 스크럼을 짜고 돌진해 들어왔는데 칼은 부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오늘날의 자동소총에 해당하는 물건이 창이었다면 권총에 해당하는 물건을 칼로 보시면 되겠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에 등장하는 글라디우스...이긴 한데
이건 후기형이라 좀 긴 모델이다.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진 부분.
로마군은 이민족의 무기와 전술을 도입하는 한편, 그들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던 라틴동맹을 강화한 로마연합을 주축으로 그들과 동맹을 맺은 지역과의 유대관계를 오랜시간동안 꾸준히 확충해 나갔다. 그결과 스리슬쩍 삼니움족의 근거지를 포위하는데 성공하고 그들과 싸울 만반의 준비를 끝낸다.
싸움의 구실은 삼니움 쪽에서 터져 나왔다. 로마의 연합국이었던 카푸아가 배반을 때리고 삼니움 쪽으로 고개를 튼 것이다. 로마군은 당장 카푸아를 점령하고 삼니움족의 지원군마져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미운털이 팍힌 카푸아에게 로마는 더 이상 연합국 시민의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카푸아의 지도자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던 것.
카푸아를 되찾은 로마는 단번에 삼니움족을 격파하지는 않았다.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세력을 확충해 나갔다. 점점 산지로 쫒겨들어가게 된 삼니움족은 기원전 304년,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는데 이번에는 로마군의 무력에 굴복한 조약이었다. 그러나 삼니움족은 비슷한 처지였던 에트루리아인, 켈트족, 움브리아인과 연합해서 로마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집정관 데키우스를 잃어 가면서 까지 치열한 전쟁을 펼쳐 결국 기원전 290년 삼니움족의 항복을 끝으로 이민족들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6. 레기온 vs 팔랑크스 - 1회전
로마가 한창 4개족 연합과 북쪽에서 치고 박고 있을 즈음....엉뚱한 데에서 시비거리가 생기고 만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타란툼과 로마 사이에는 로마가 삼니움족과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때부터 서로의 세력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약이 맺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태풍에 떠밀린 로마군 함선 10척이 타란툼 항구로 입항하자 협약 위반으로 간주, 항구에 들어온 이유도 묻지 않고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결국 10척의 로마군선중 5척은 침몰되고 승무원들도 모두 살해되고 5척은 간신히 도망친다. 이를 빌미로 이탈리아 남부의 식민도시와 로마간의 한판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타란툼은 스파르타 출신 이주민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세운 식민도시로 본국 국민들과 달리 군사보다는 통상무역과 경제에 재능을 보였다. 전쟁이 터지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로 용병을 고용했는데 로마와의 결전을 앞둔 타란툼은 로마인들에겐 좀 부담스런 상대를 점찍었다. 북부 그리스 본토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로서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을 장수로 여겨지던 맹장이었다. 참조로 고대 그리스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그 지방에 있던 여러 국가들과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혼동하지 마시도록....
실제로 그가 다스리던 에페이로스 왕국은 알렉산더 친모의 고향이기도 했다. 타란툼은 아탈리아에 와서 로마를 격퇴해 주는 조건으로 35만명의 보병과 2만명의 기병을 준비하기로 약속했다. 문제는 피로스가 그리스 지역 사나이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지던 '알렉산더 증후군'에 걸린 맹탕이 아니라 훗날 로마를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한니발이 자신의 병법 스승이라고까지 일컬었던 병법의 천재였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싸움을 피로스에게 모두 맏겨 버린 타란툼 사람들은 '알아서 잘 해 주겠지...'식이었다. 피로스와 그의 병력이 도착한 당일에도 여느날과 다름 없이 야외극장이나 체육관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된 37만이란 병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한창 이탈리아 반도에서 에트루리아와 피범벅으로 싸우는 와중에도 병력의 반을 고스란히 남쪽으로 보내야만 했다. 37만명의 대군이 피로스와 합류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서둘러 남하해서 이들의 합류를 원천봉쇄하려 했고 티란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헤라이클레아 평지에서 마주치게 된다. 37만이란 병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나 코끼리라는 괴물이 버티고 서 있었다. 로마인들은 코끼리를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요...그리스 본토 출신의 군인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이야말로 과거 그리스에게 멸망당한 트로이의 후손들이 아니던가...
고대 그리스 보병군단인 팔랑크스(Phananx)의 중장보병
양군의 전력은 대동소이했다. 피로스의 병력은 본국에서 이끌고 온 2만6천명의 병력과 코끼리 18마리가 전부였고 로마 연합측의 병력은 로마군 병사 8천명에 연합국 병사 1만명을 합쳐 2만 4천명이었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양군 모두 9대 1 정도. 참조로 로마의 주력군인 중장보병의 장비는 기원전 6세기 중반 무렵, 에트루리아인을 통해 그리스의 장비가 도입되어 만들어 졌기 때문에 로마제 짝퉁 장비라 생각하시면 되겠다. 다시 전장으로...
피로스의 눈에는 바르바로이(야만인이란 뜻으로 그리스 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타민족은 모두 바르바로이라고 불렀다)들의 스크럼이 자뭇 흥미로왔을 것이다. 전투는 팔랑크스라 불리는 그리스의 보병군단과 레기온이라 불리는 로마의 보병군단의 보병전으로 판가름나게 되어 있었다. 레기온은 백인대라는 셀이 모여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력 면에서 팔랑크스보다 좀더 견고해 보였지만 문제는 코끼리였다.
로마군은 삼니움족과 싸울 때의 경험대로 세로로 긴 진형을 취하고 있었고, 피로스의 군대는 가로로 긴 진용을 취하고 있었다. 또한 18마리의 코끼리는 예상과 달리 보병 좌우 양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군의 핵심인 중장보병은 팔랑크스가 상대하기 시작했고 기병대와 코끼리 부대는 합동으로 로마군의 기병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기병이 허물어지자 피로스의 기병대는 로마군 중장보병들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첫 부분에 게르만족을 상대하는 로마군이 이 전법을 써먹는 씬이 나오니 눈여겨 보실 것. 결국 로마군은 7천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도망쳤으나 피로스 쪽도 4천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리 시원치 않은 승리였던 셈.
7. 레기온 vs 팔랑크스 - 2회전
신구세력의 첫 번째 접전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로마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은 당장 이탈리아 남부로 퍼져 나갔다. 로마 세력권에 편입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 피로스 쪽에 지원했기 때문에 피로스는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피로스는 로마군의 패배는 로마연합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삼니움족까지도 로마에 등을 돌리지 않았을 정도로 로마 연맹의 결속력은 단단했다. 게다가 로마에서는 사태의 시급함을 파악하고 수도방위를 위해 무산자 계급 시민까지 소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피로스는 로마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대신 로마와 타란툼의 강화를 주선했으나 로마는 이를 점잖게 거절했고 결국 2차 회전을 아우디우스란 곳에서 치르게 된다.
2차회전 또한 1차회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아우디우스 지역은 1차회전이 벌어졌던 장소보다 평지가 좁았기 때문에 코끼리 전차부대의 활약은 지난번 보다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2차전에서도 로마군은 집정관 한명을 포함하여 6천명이 전사하고 패하고 말았다. 피로스 쪽에서도 3천명이 전사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전사자들이 피로스가 그리스 본토에서 데려온 부하들이었다는 점이다.
패주하는 로마군을 뒤쫒지도 않고 타란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에게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 사절이 찾아왔다. 군사대국 카르타고의 공격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로마와의 전쟁에 지친 피로스는 고민할 틈도 없이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철군해 버린다. 그의 가슴속에는 군사대국 카르타고 원정이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칠리아 원정은 피로스의 생각처럼 간단한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적군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같은 동포끼리조차 협력하는 일이 드믈 정도로 비정상적인 독립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타란툼보다 더하면 더했지...시칠리아섬 지역의 그리스 이주민들은 피로스에게 더욱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피로스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3년만에 타란툼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휘하 병력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반면, 로마는 로마연합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굳혀 놓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8.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기원전 275년 여름, 피로스는 밀벤툼에서 로마와의 마지막 전투에 운명을 내걸어 보지만 결국 패하고 만다. 피로스의 원정에 따라왔던 2만6천명의 부하들 중에서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던건 8500명에 불과했다. 결국 피로스는 그로부터 3년뒤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알렉산더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불리던 피로스를 물리친 로마는 일약 국제적인 존재로 급부상했고 라틴민족의 일개 부족에서 이제는 동부 국가들까지 주목하는 나라로 성장해 있었다. 이러한 로마를 인정이나 하듯...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집트에서 특사가 도착해서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피로스가 빠져나간 타란툼은 더 이상 로마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기원전 273년 로마는 타란툼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켈트족에게 짖밟힌 이래 120년이 걸린 셈이며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이래 500년에 걸린 긴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아울러 로마의 악몽은 아직 태동도 하지 않은 시기였다....
Part 2로 계속
|
첫댓글 굿...아주 좋은 내용입니다.
칼이 짧으면 아무래도 상대를 향해서 칼을 휘둘렀다가 다시 되돌리기에 쉽고, 또 상대의 몸에 칼날이 들어갈때 짧으면 그만큼 더 강한힘을 실을수 있으며, 긴칼보다는 상대적으로 만의 하나 있을 수 있는 상대의 칼과 부딫혔을때에 부러질 수도 있는 최악 의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낮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영화 300을 보더라도 스파르타 군사들의 칼도 상당히 짧더라구요...
스너비님의 말씀대로 짧은 칼은 로마군처럼 집단전을 위주로 하는 군대에겐 효율적인 무기였습니다. 300에서도 나오듯, 이시대의 전투에서 칼은 어디까지나 부무장의 수단이었으며, 장창이야말로 강력한 주무장이었죠. 3m이상에 달하는(최대 7m) 장창으로 밀집해서 진군해 들어올 경우 기마대 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밀집대형의 경우 한쪽이 뚫리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나간다는 점입니다. 이를 약점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던 사람이 바로 알렉산더죠. 물론 로마군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려고 셀 단위의 밀집대형을 택했지만, 몽골 기마병처럼 황당할 정도의 기동력을 갖춘 병사들에게는
셀단위의 밀집대형 조차, 무수한 스트레이트성의 화살 공격에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겁니다. 아무리 로마군이 병참에 능하다 흔들, 땅 위가 집이요 1인당 서너마리씩 말을 교대로 타고다니는 극한의 기동력이 일상생활인 몽골군에게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을것 같군요. 짧은 칼 얘기야 스너비님께서 이미 결론을 내려 주셨고, 이후의 스토리는 로마군의 흥망사 위주로 진행될것 같습니다. 참고로 필자되시는 양반이 연재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시는 바람에 이번 스토리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단된다는 점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음....정말 좋은 내용인데 연재가 되지 못한다니 아쉽군요.....쩝......이런분들과 또 항상 인피님께 감사드리네요ㅋㅋ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