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시오 신부의 가난한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송도 본당 사제관이다. 송도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은 알로이시오 신부는 주교관을 떠나 송도 성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송도 성당은 본당 신부는 물론이고 본당 수녀도 없이 비어있다시피 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본당 수녀들로부터 초빙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최재선 주교의 도움으로 세 사람의 분도회 수녀를 파견받기로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수녀들이 와도 생활할 수녀원이 없었던 것이다. 성당 가까운 곳에 작은 수녀원을 지을 땅이 있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당시 각 본당들은 수녀들을 원하고 있었지만 수녀회마다 파견할 수녀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지체했다가는 파견 약속을 받은 수녀들을 놓칠 수도 있었다.
그 때 알로이시오 신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성당 오른쪽 언덕에 있는 판잣집이었다. 그 집은 본당 신자 대부분이 생활하는 판잣집처럼 콜타르를 칠한 판자 지붕에 흙벽으로 만든 볼품없는 오두막이었다. 그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성당 땅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 집 사람들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할 돈을 주고 집을 비우게 했다. 그리고 원래의 사제관을 수녀들의 생활공간으로 내 주고 자신은 그 판잣집을 고쳐 사제관으로 쓸 생각이었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뒤 알로이시오 신부는 집을 살펴보았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내부는 훨씬 열악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고, 사람이 살기에 너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곳을 사제관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바람이 불면 지붕이 날아가버릴 것 같은 그 허술한 사제관이 그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만의 사제관이었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계획을 들은 본당 신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도 그 판잣집과 다를 바 없었기에 그 집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뱉는 끔찍한 예언들은 알로이시오 신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판잣집에 살면 폐결핵에 걸리든지 아니면 쥐가 그를 산 채로 뜯어먹을 것이라는 따위의 말들이었다. 병에 걸리지 않고, 쥐한테 잡아먹히지 않는다 해도 밤에 강도가 들어 그를 죽일 것이라고 했다.
알로이시오 신부 역시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살다가 혹시 못 살겠다고 나오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을 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결심했다. 물론 이것을 두고 그는 결심이라고 표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인 고집으로 여겼다.
그는 상관치 않고 판잣집 사제관을 선택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고칠 수 있는 데까지 판잣집을 고쳤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 생각보다 살아갈 만했다. 그러나 곧바로 몇 가지 곤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첫째는 냄새였다. 똥 냄새, 죽은 동물의 썩는 냄새, 흙냄새, 쓰레기 냄새, 벌레 냄새 그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너무 지독해 잠을 잘 수 없었다. 밤이면 침낭을 들고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신선한 공기를 찾아야했다.
그러다 하루는 냄새의 원인을 찾아 없애기로 작정했다. 집 안 샅샅이 뒤진 결과 벽과 벽지 사이에서 죽은 쥐 두 마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화학 약품을 사용해 집 안의 냄새를 몰아냈다. 그러는 동안 예민한 그의 코는 조금씩 무디어져 갔다.
죽은 쥐 냄새도 문제였지만 밤에 천장에 뛰어다니는 요란한 쥐 소리도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심한 춤꾼이었다. 알로이시오 신부가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해 그의 머리위에서 디스코를 추기 시작했다. 그는 잠자리 들기 전 긴 막대빗자루를 침대 옆에 두었다가 쥐가 왕성하게 소란을 피우면 빗자루로 천장을 때렸다. 그러면 놀란 쥐들이 잠시 동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렇게 그는 쥐와 전쟁을 벌이면서 잠을 자야했다.
또 다른 고통은 추위였다. 겨울 내내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문틈과 벽 틈새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다 보니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판잣집 사제관도 다른 모든 집과 마찬 가지로 연탄을 때는 온돌 구조였다. 방바닥을 달궈주는 연탄은 아주 좋은 연료였다.
그러나 연탄에서는 치명적인 일산화탄소가 발생했다. 특히 저기압으로 공기가 무거우면 가스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해 방바닥 틈새로 새어 나왔다. 그런 날이면 집안이 연탄가스로 가득했다. 그 때문에 알로이시오 신부는 혼미한 상태에서 몇 번 문 쪽으로 넘어진 적이 있었고 술집을 나서는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기도 했다.
연탄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안 그는 석유난로를 설치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상한 냄새에 깨어보니 난로에서 새어나온 기름에 불이 붙고 있었다. 다행히 크게 번지기 전에 불을 꺼서 큰 피해는 없었지만 늘 조심해야 했다.
마지막 고통은 변소였다. 변소는 방문에서 6미터쯤 떨어진 마당 끝에 있었다. 공중전화 박스 크기의 변소였는데, 똥통 위에는 꼭 필요한 곳에 구멍이 난 판자가 불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올라앉으면 판자가 흔들거려 몸의 균형을 잡느라 애를 많이 써야했다.
무엇보다 장마철에 변소에 가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송도 성당은 언덕에 있었는데, 판자집 사제관은 그보다 더 높은 언덕에 있어 송도의 유명한 바닷바람이 아래쪽에서 세차게 불어오면 우산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날이면 판잣집 문을 열고 앞을 노려보고 있다가 진창으로 변한 6미터 마당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변소 안으로 뛰어 들어 가야 했다. 그리고 몸의 위치를 잡았다.
그때까지는 만사 오케이였다. 그러나 웅크리고 앉자마자 머리 위로 빗물이 떨어지고, 판자로 된 변소 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연방 쓰러질 것만 같아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의 눈길은 자동적으로 휴지를 놓아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있어야할 두루마리 휴지는 없을 때가 많았다. 도둑이 훔쳐 간 것이다.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쥐 소동도, 겨울 추위도, 연탄의 치명적인 독가스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휴지 문제만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해서 일어났지만 휴지 도둑에 대한 미스터리는 도저히 풀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휴지는 결코 사치품이 아니었다. 국산이 아니라 외제이긴 했지만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변소에서 사용하는 잉크 투성이 신문지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어 알로이시오 신부는 휴지만은 외제를 사용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그의 변소에 몰래 들어와 늘 휴지를 훔쳐갔다.
이것이 그가 한국에서 직접 경험한 가난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알로이시오 신부는 아무런 불평 없이 가난한 생활을 받아들였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훗날 그가 창설한 마리아 수녀회 수녀들과 그가 돌보던 아이들과 함께 송도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녀회와 아동 복지사업의 본부가 될 건물을 지어 이사할 때까지, 정확하게 4년8개월20일 동안 그 사제관에 살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 기간을 은총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준비하는 그에게 있어 안성맞춤인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환경은 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가난하게 생활하면 가난하게 생활 할 수 있고 가난하게 느낄 수 있고, 가난한 이들과 같은 파장 속에 머물 수 있다.
알로이시오 신부가 그랬다. 판잣집에 살면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식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누구보다 한국의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 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게 했다. 그런 면에서 송도 본당 주임 신부 시절은 그가 말한 대로 은총의 시간이 분명했다.
판잣집 사제관 생활이 은총의 시간이 되었던 이유는 또 있다. 그곳에 사는 동안 그는 한국의 가난한 이들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한 첫 번째 책 <굶주린 자와 침묵하는 자>를 썼다. 마리아수녀회도 그곳에서 창설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본격적인 구호사업도 그곳에서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