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3
[새번역]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NIV]
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심령이 가난자 자"는 복이 있다(3절). 겁 많은 심령(poorspiritedness, 역주:심령이 가난한 - poor in spirit와 비슷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음)은 사람들을 축복 받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므로 죄와 덫 ─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 정욕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심령의 가난은 영혼의 은혜스로운 성벽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적인 부귀를 비울 수 있는 완전히 가난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낮은 조건일 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불편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겸손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든지, 하든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18:4; 19: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계 3:17). 즉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심령은 부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은사와 은혜면에서 있어서 매우 탁월하여 "정신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가난하였으며," 자신을 "사도들 중 가장 작은 자"나 모든 성도들 중 제일 못난 자,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멸시하는 자로 보며, 남을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그들보다 낮은 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을 행하기에는 값싸고 비열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우리는 비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는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스러우며 그는 모든 것이고 우리는 하등의 보잘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그의 능력있는 손 아래에서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 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그에게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가?
-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처음에 오는 이 말씀은 뒤에 오는 모든 복의 열쇠가 된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그리스도인과 천국시민의 기본 특징이다.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속을 비우는 것을 의미하며 나머지 복을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채우기 전에 먼저 비워야 한다. 복음에는 항상 이 두 가지 면이 있다. 세워지기 전에 먼저 넘어짐이, 개심에 앞서 뉘우침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해방하기에 앞서 정죄를 선언한다.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만의) 것임이요”보다 더 완전한 믿음에 의한 칭의론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주 대할 때 뿐만 아니라, 특히 산상설교의 전 메시지를 대할 때 우리에게 엄중하고 철저한 테스트가 된다. 즉 산상설교를 우리 힘으로 행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즉각 정죄한다.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가늠해야 할 산이 있다. 너희는 그 산을 올라가야 한다. 너희가 이 산을 바라볼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너희가 혼자 힘으로는 이 산을 오를 수 없으며, 너희 자신의 힘으로 올라가 보려는 모든 시도는 너희가 아직 그 높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본문을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복이 있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이 영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주님은 ‘가난’이란 말씀을 세속 정신에 지배를 받지 말라,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를 받은 정신이다. 주님께서는 ‘영의 가난’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것은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은 자연인과 그리스도인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가리킨다. 이 구절 이상으로 세속정신과 견해에 더 큰 반제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자기 신념과 자기 의지와 자신과 자기표현을 얼마나 크게 강조하는가? ‘세일즈맨쉽’의 본질은 자신감과 확신이라고 말한다. 고객에게 감명을 주고 싶으면 여러분도 이 방법을 따라야 하며, 이런 관념은 어느 영역에서나 통용되고 있다. 여러분이 직업에 성공을 원하면 여러분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비극적 자신감의 표현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마주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철저한 가난한 영 이외의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축복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인기가 없다. 오늘의 교회와 과거시대, 특히 청교도시대와의 대조는 너무나 크고 놀랍고 유감스럽다. 오늘의 교회에 ‘개성’ 운운하는 말들처럼 어리석고 비기독교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육적인 것이며, 일종의 외모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위험한 것은 이런 태도는 대체로 참된 개성과 자신감, 자존심, 자기표현을 혼동하는데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큰 덕목인 겸손이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끔찍하게도 ‘개성을 인정받으려’ 애를 쓴다. 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함이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여 두려워 떨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가 보잘 것 없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귀감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아! 교회가 세상과 세상의 방법으로 그 전망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끔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리스인들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 심리에 홀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속하는 어느 것과도 전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자.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어야 한다거나 용기가 부족하다거나 교제를 싫어하며 수줍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타나 있는 자질 중 생래적 자질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거짓되게 십자가에 못 박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겸손한 것으로 가장한 것이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이라거나 중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 삶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어떤 것인가?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하게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이것이 겸손의 특성이다.
그것은 모세의 정신과 같다.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음을 깊이 느끼고 자신의 부족과 부적격을 의식했다. 다윗은 “주여 내가 뉘기에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다. 환상을 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는 현대의 전형적인 세속인이었다. 그가 주님을 볼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대했고 개성은 변함없었지만 동시에 그는 심령이 가난했다. 바울은 큰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의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서신을 읽으면서 그의 생애 끝까지 그가 싸워야 했던 싸움은 자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자랑’이란 말을 계속 사용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뵙고 난 후 그는 모든 것을 ‘손실’로 여겼다. 그는 심령이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것을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보게 된다. 그는 사람이 되셨고,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그는 신성의 대권을 쥐지 않으셨고 사람처럼 사시기로 결정하셨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요14:10)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만심이 온전히 없음,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없음을 의미한다. 가난 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이다. ‘심령의 가난’은 우리가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밧모섬의 사도 요한처럼 필연코 ‘죽은 자처럼’ 느끼게 된다.
- 나는 심령이 가난한가? 나는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는가? 결국 사람은 어떻게 해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일까? 그 대답은 여러분이 자신을 바라보거나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이다. 주를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들 스스로는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를 바라보라. 그러면 자신을 위하여 할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십자가를 붙들 뿐입니다” 속이 비고 무력하고 벌거벗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항상 충족시켜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