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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암 4:4-13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13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인사(복습)와 서론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이 성막중심으로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 중심으로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고저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법정 소송으로 가는 일들이 자주 있는데, 그런 경우에 흔히 듣게 되는 용어가 ‘소환장’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서로 만나 대화로 해결하고 싶은데도 상대가 응해 주지 않을 때,
혹은 검사가 어떤 사람을 꼭 증인으로 부르고 싶은데도 응해 주지 않을 때, 이것을 발부하게 됩니다.
비슷한 것으로 ‘체포 영장’도 있습니다.
형사가 어떤 용의자를 불러서 심문을 하려 해도 상대방이 거부하면,
판사를 통해 이 체포 영장을 받아 가지고 그 사람을 강제로 붙잡아 옵니다.
이처럼 좋은 말로 해결하려 해도 상대방이 만나 주려 하지 않을 때에 소환장이나 체포 영장이 동원되며,
일단 이것이 발부되면 그 당사자는 좋든지 싫든지 간에 고소인이나 검사를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하실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결코 좋은 분위기에서 만나는 것을 뜻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과 좋은 관계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을,
이제 하나님께서 강제로 소환 내지는 체포하심으로써 끝내 그들과 만나고야 마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런 불가피한 상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까?
평소에 하나님을 어떻게 회피하던 사람들이 그처럼 하나님의 법정에 꼼짝 못하고 끌려 나가서
결국에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까?
1. 종교 생활은 하지만 참 신을 찾지는 못한 자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모스 4장 4절과 5절 말씀에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조소적인 표현으로써 북조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상을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는 말은, ‘계속 그런 식으로 죄에 죄를 더하기만 하면서 살면 어떻게 되나 한번 두고 보아라.’고 하나님께서 조소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벧엘과 길갈은 둘 다 북조 이스라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아주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던 중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유명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벧엘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야곱에게 재확인해 주셨고 야곱은 거기에다 돌로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길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발을 내디뎠던 장소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거기에다 ‘열두 돌의 기념탑’을 쌓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공략하기 이전에 바로 거기서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켰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모스가 기록될 당시 이 두 성읍들은 그런 의미 깊은 역사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다른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북조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남조 유다의 예루살렘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로 여기에다 금송아지 우상과 제단을 만들어 놓고 자기네 나라의 종교 중심지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도 무슨 제사라는 것들은 부지런히 드려졌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라고 핀잔조로 하시는 말씀이 그런 헛된 종교 생활을 가리켜 하신 것입니다. ‘희생’은 원래 이스라엘 성년 남자가 ‘일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와 드리게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아침마다’ 부지런히 벧엘의 금송아지 제단에 드려 보아라고 조소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란 신명기 14장 28절에 기록되어 있는 특별 십일조를 가리키는 것인데, 매 삼년에 한번씩 드렸으며 레위인의 생활비로 쓰였던 일반 십일조와는 달리 백성들의 구제 사업을 위하여 쓰인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삼년에 한번씩 드리던 십일조를 ‘삼일마다’ 한번 드려 보라고 또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은제’란 ‘감사제’이며 ‘낙헌제’와 같이 둘 다 ‘화목제’의 일종이었습니다. ‘누룩 넣을 것’ 즉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빵은 ‘소제’에는 쓰지 못하지만, ‘화목제’에는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화목제들을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고 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그런 제사들을 크게 자랑하면서 부지런히 바쳐 보아라.’고 또 조소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그처럼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조 유다 백성들보다도 더 열심히 제사를 드리려 해도 하나님께서는 코웃음치고 마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 제사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 우상에게 바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에게 예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소용없는 헛수고였으며, 아니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며… 죄를 더하는’ 행위가 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상 종교 행위를 두고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들 스스로 좋을 대로, 멋대로 하는 짓이다.’라는 뜻입니다. 금송아지 종교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하던 종교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좋다고 판단되는 대로 만들고 행했던 종교였습니다. ‘종교란 이렇게 되면 좋을 것이다.’라는 자기 취향을 따라서, ‘신이란 이런 존재가 되어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순전히 사람의 머리에서 창작된 교리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상 종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 자기 자신을 섬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인본주의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왕은 북조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종교의 제사장 제도나 예배 형식을 남조 유다의 것들과 꼭 같이 모방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나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나 둘 다 ‘꼭 같은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처럼 여로보암은 우상 종교, 유사 종교를 가지고 자기 나라 백성들의 정치적 단결을 꾀하는 데에 이용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금송아지 숭배는 결코 참된 신앙 행위가 아니라 오직 ‘범죄하며… 죄를 더하는’ 행위일 따름이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이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가장 악독한 죄악 행위가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아무 종교나 믿는다고 다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믿기만 하면 그래도 아무 신도 믿지 않는 무종교나 무신론자보다는 좀더 낫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명색은 하나님 이름으로 섬긴다고 해도 실상은 그 종교 행위가 하나님께 완전히 적대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본성을 사람이 자기 기분에 맞도록 정의해 버릴 때, 그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이 자기에게 좋도록 바꾸어 버릴 때, 그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과 역사를 사람이 제 멋대로 판단할 때,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사람이 자기 편리에 따라 맞추어 갈 때,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날 종교 일치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고 있는 천주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와 기타 여기에 동조하는 우상 종교 숭배자들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어도 신은 궁극적으로 다 같다.’라는 말로서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제멋대로 헌법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명백히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다른 신들을 믿어도 꼭 같은 결국에는 꼭 같은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논리는 오직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 전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나는 그런 것 보면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엄히 경고하셨는데, ‘기독교를 전도할 때 각 나라 고유의 전통 종교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라는 원리가 도대체 어떻게 말이나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소위 ‘마음 문 열린 전도’란 것은 실상은 오직 미신적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모든 민족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얄팍한 계산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든지 여호와를 섬기든지 다 꼭 같은 것이다’라고 ‘수정 십계명 제1계명’을 제정해 놓은 혼합 종교는, 실상은 참된 신을 만나기는커녕 ‘죄에 죄를 더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을 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모든 종교인들과 세상의 모든 미신적인 민족들을 다 기쁘게 하고 있는, 아니 불신자들까지도 호응하게 만들고 있는 그런 인본주의적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은, 평생토록 아무리 열심히 예배라고 해서 드리고 어떤 경전을 열심히 연구하더라도 결코 참 하나님을 ‘좋은 때’에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우상 종교를 믿는 자들이 참 신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때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대를 차려 놓으시고 이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시는 때가 될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무서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려면, 바로 이 현세에서부터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참된 종교를 택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범신론을 인정하는 종교가 아니라 ‘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가르치는 유일신 종교를 찾아야 하는 것이며, 같은 기독교 간판을 내걸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 기분 맞추어 주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야 만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현세에서부터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제대로 교제하며 온전히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가려운 곳이나 살짝 긁어 주는 인본주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높이는 개혁주의 기독 신앙을 통하여, 바로 이 시간,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때부터 하나님을 항상 만나 뵈옵고 영원히 만나게 될 날을 예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고를 받고도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지 않는 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아모스 4장 6절 이하의 본문에서는 당시 북조 이스라엘에게 과거에 이미 내려졌던 징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징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각시키고 회개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내려진 ‘경고성 징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좋은 기회, 자기의 죄를 간단하게 사면 받을 수 있었던 그 좋은 때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모스 4장 6절 말씀에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이를 한가하게 하며’란 ‘이가 씹을 음식이 없어서 놀게 되도록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경고하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아모스 4장 7절부터 9절에 「또 추수하기 석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추수하기 석달 전’의 비란 ‘이른 비’(겨울비)가 내리는 기간인데, 이때 가물게 되면 농작물이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라는 말씀대로, 그런 가뭄의 징벌은 이스라엘 땅 전체에 내리지는 않았고 부분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징벌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마지막 심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틀거리며’ 이 성읍 저 성읍으로 물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는 하면서도, 그 경고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풍재’란 ‘뜨거운 열풍’을 가리키며, ‘깜부기’는 이삭이 까맣게 말라 죽는 소위 ‘흑수병’을 가리킵니다. ‘팟종이’란 큰 메뚜기 떼를 말하는데, 이것이 몰려오면 한 지역의 농작물 전체를 깡그리 먹어 치우는 큰 재앙이 됩니다. 부분적인 재앙의 경고를 내려도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깨닫지 못하자, 이제는 그 징벌의 정도와 범위가 점점 더 세어졌던 것입니다.
아모스 4장 10절과 11절 말씀에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을 옛날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절에 ‘애굽에서 한 것처럼’ 꼭 같이 이제 이스라엘에게 내리셨습니다.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재인 ‘청년들’이 죽임을 당하고 국방력의 대표적 자산인 ‘말들’이 노략당하는 일은, 실제로 북조 이스라엘이 여호아하스 왕 시절에 아람 왕에게 침략 당했을 적에 일어났던 일(왕하 13:7)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진 것처럼 파괴를 당하도록 하셨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바로 북조 이스라엘의 웃시야 왕 시대에 지진(암 1:1)으로 일어났던 재앙이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래도 북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처럼 마지막 순간에서는 건져 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의 강도가 점점 더 세어져서 거의 극에 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타서 재가 되어 버리지는 않도록 지금까지 그들을 연명시켜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적어도 과거 역사를 아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런 일들을 보면서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징벌이구나.’라고 금세 알아차려야 마땅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재앙들은 과거 애굽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것들과 꼭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6절에서 11절까지 하나님께서는 매 문단마다 ‘내가 (무엇무엇으로 징벌)하였으나 너희가 네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수차례 반복 한탄하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 끝까지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았던 것, 이것 때문에 결국 북조 이스라엘 역사는 비극적인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여러 방법으로 여러 차례 기회가 주어졌던 하나님의 경고를 끝까지 무시한 백성의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happy ending)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습니다.
원래가 경고라는 것은 사람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군사 시설 지역이나 휴전선의 경계 지역 부근에 있는 ‘접근하면 발포한다.’라는 경고문은, 접근하는 사람을 쏘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잘못 접근해서 죽지 말라고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고를 무시하고 행동할 때에는 정말 죽게 되어도 아무 항의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꼭 같은 무장공비라도 경고 방송을 듣고 스스로 자수한 사람과 끝까지 도망치다가 붙잡힌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는 특사를 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영접 받을 수 있지만 후자는 사형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일찍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천당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지만, 나중에 붙잡혀 심판대에 끌려 나오는 자에게는 오직 지옥의 영벌이 내릴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일찍 제 발로 찾아 나오는 것과 마지막 경고까지 무시하고 난 후에 붙잡혀서 억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육신의 병을, 어떤 때는 가난을, 또는 가정 문제를, 혹은 국난의 재앙까지도 들어서 민족과 성도를 깨우쳐 회개시키기 위한 경고로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용서해 주시려는’ 선한 의도에서, 그리고 오직 ‘살려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와 자세를 갖추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보내어 주시는 고마운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실 때에는 아직까지는 어디까지나 좋은 말로 해 주시는 때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조차도 아직까지는 어디까지나 좋게 대해 주시는 은혜의 때인 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말 ‘좋은 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을 찾아 나오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실’ 때에 우리가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오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피할 길 없는 체포 영장을 받고 그 무서운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떨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때가 오고야마는 것입니다. 오늘도 택한 백성을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매를 드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살리시기 위하여 징계까지도 망설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고의 말씀을 듣고 바로 오늘 이 시간에도 즉시 회개하며 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모스 4장 12절과 13절 말씀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쪽으로 끝내 ‘돌아오지’ 아니하면, 이제 하나님 편에서 무언가 하실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이제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여태껏 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오시게 될 때를 두고,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편에서 ‘제발 나를 찾아라,’ ‘제발 내게로 돌아오너라.’고 좋은 말로 아무리 말씀하셔도 끝까지 듣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실 분이 결코 아니신 것입니다. 사람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돌아설 때, 그런 모독을 가만히 덮어 두고 넘어가실 하나님이 결코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편에서 직접 그를 만나려고 호출하시는 때가 오고야 맙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전에 그렇게 좋은 말로 하실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용서의 기회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이제는 매 정도가 아니라 ‘칠 배나 더 치시는’ 무섭고도 영원한 형벌을 마련해 놓고 만나자고 하시는 하나님을 마주 대해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자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믿는 자도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그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어디 두고 보아라.’하고 벼르고 계시는 무서운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그때 가서야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신’ 진짜 창조주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벌써부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여 주셨던’, 즉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해 주셨던’ 하나님이셨음을 그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만든 종교를 가지고 신을 만나려고 했던 자기의 어리석음을 정말 ‘슬피 울며’ 통탄해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그때 가서야 ‘아침을 어둡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주권의 하나님을 제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전 인생의 순간순간과 사사건건을 통하여 얼마나 자주 부르셨는지를 기억하면서, 바로 자기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 때 미리 만나지 않았던 바보짓을 뒤늦게야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길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우상 종교 따라 살다가 체포 영장 받고 영벌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만나게 되는 길이 있고, 아직까지는 용서해 주시는 기회가 남아 있을 때 미리 만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이든지 모든 사람은 결국 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뒤늦게,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타오르는 지옥불 앞에서 공포에 떨면서 하나님 만나게 되지 말고, 바로 지금, 이 구원의 때, 아직 은혜 받을 수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을 일찍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복음으로써 불러 주실 때 자진해서 교회에 출두하여 회개하고 신앙고백함으로써 나중에 다같이 천국문 앞에서 기쁨으로 그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참고
12 전해야 할 기별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공중 봉사에 앞서 보내진 기별은 회개하라 서기관들이여 회개하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여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마 3:2) 것이었다.
우리들이 전해야 할 기별은 “평안하다 안전하다”(살전 5:3)는 기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백성으로서 우리들에게는 해야 할 사업이 있고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암 4:12) 전해야 할 기별이 있다.
우리들은 표준을 높여야 하며 세째 천사의 기별,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전해야 한다(2 기별 150).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