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분당에 사는 김진수(45)씨는 2011년 초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1억원 받았다. 매달 39만원 정도를 이자로 내던 그는 올해 초 경제 사정이 나빠져 이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체한 지 3개월이 되던 때부터 한 달 177만원 '이자 폭탄'을 맞았다. 이자가 4배 이상 규모로 불어난 것이다. 은행에 찾아가 항의했더니 은행 직원은 대출 계약서에 있는 '기한이익(期限利益) 상실'이란 문구를 보여줬다. 설명에는 '기한의 존재로 말미암아 채무자인 고객이 받는 이익을 말함'이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암호 같은 이 말은 '일정 기간(2개월) 동안에는 밀린 이자에 대해서만 연체이자를 내면 되지만, 2개월이 지나면 이자뿐 아니라 원금에 대해서도 연체이자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김씨의 경우 2개월 동안은 39만원인 이자에 대해서만 연체이자를 내다가 2개월 후부터는 못 낸 이자뿐 아니라 1억원 원금에 대해서도 연체이자를 내야 한다. 그래서 연체 3개월째부터 이자가 기존 39만원에서 177만원으로 급증한 것이다.
김씨는 "기한이익 상실이란 문구를 보고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느냐"며 "의미를 알았다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라도 이자를 냈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기한이익 상실'로 많은 연체이자를 내는 경우는 한 해 160만건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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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박상훈 기자
소비자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된 금융 계약서에 적힌 용어들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려워 소비자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본지가 대출·보험·펀드 계약서에 있는 각종 문구와 단어를 박사급 경제 전문가 10명에게 보여준 결과 절반 이상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기한이익 상실'에 대해 10명 중 절반이 '모르겠다'고 답했고, 펀드에서 '주식 60% : 채권 40%'식으로 투자 구성이 일정 비율을 유지하도록 요청하면 금융회사가 알아서 이 비율을 유지한다는 뜻의 '자동 재부분'은 10명 전원이 '모르겠다'고 답했다. 자본시장연구원 황세운 연구위원은 "연구원에 있는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니 일반인은 거의 외계어같이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리볼빙' 약정서는 암호"… 뜻 몰라 높은 이자 물어직장인 이민서(27)씨는 최근 신용카드 결제 대금이 자동이체되는 통장을 조회해보고는 깜짝 놀랐다. 지난달 결제 금액 120만원을 하루 늦게 입금했는데 이 중 10만원만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건 이씨는 상담 직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지난해 신청하신 '리볼빙(revolving·회전) 결제' 때문입니다. 리볼빙이란 단어의 뜻을 모르셨어요, 고객님?" 이씨는 "결제되지 않고 남아 있는 돈엔 연 20% 이자가 계산되어 붙었다"는 상담원의 설명에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신용카드 리볼빙이란 카드 대금 중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넘기는 서비스다. 미리 '리볼빙 비율'을 정해두면 통장에 돈이 있어도 결제대금 중 이 비율만큼만 카드 대금이 정산된다. 대금이 연체돼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문제는 막을 수 있지만 다음 달로 넘긴 카드 대금엔 연 20% 정도 이자가 붙는다.
이씨가 리볼빙 서비스를 신청할 때 동의했다는 약정서는 '회원의 카드 이용 대금 중 리볼빙 대상 금액에 대하여 회원이 선택한 결제 비율을 곱하여 산출한 청구 금액만을 결제하고, 리볼빙 이용 대금 잔액에 대하여는 은행이 정한 일정률에 의한 리볼빙 수수료를 부담하며, 이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여 결제하는 제도를 말합니다'라는 복잡한 문장으로 리볼빙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씨는 "리볼빙은 결제할 돈이 부족할 때 조금만 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라고만 알았지, 돈을 넣어도 정산하지 않고 엄청난 이자를 물릴 줄 어떻게 알았겠나"라고 말했다.
◇소비자 절반 "펀드 운용보고서 안 읽어요"어려운 단어와 난해한 문장은 소비자들을 각종 설명서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내 돈'에 매우 민감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도 읽어보려 하다가 이해가 안 되니 접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아예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이 지난해 말 발표한 '2013 펀드 투자자 조사'에 따르면 펀드를 사는 사람의 53%가 펀드 운용보고서를 받고도 읽지 않는다고 답했다.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정보가 이해하기 어려워서'(41%)였다.
2007년 말 새마을금고와 한 보험사에서 실손(實損)의료보험에 가입했던 정모씨는 지난해 초 디스크 수술을 받고 보험금을 양쪽에 청구했다가 크게 실망했다. 실손의료보험이란 의료비를 실제 쓴 만큼 보장해주는 보험을 뜻한다. 아무리 여러 개의 보험에 가입해도 실제로 쓴 의료비 이상 돈을 받을 수는 없다.
이 사실을 몰랐던 정씨는 200만원 정도를 수술비로 쓴 후 양쪽에서 각각 200만원씩 모두 400만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지급된 보험금은 실비에 해당하는 200만원뿐으로 양쪽 보험사에서 각각 100만원씩만 줬다.
대부분 보험사는 실손의료보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각 계약의 보상책임액 합계액이 각 계약의 보상 대상의 의료비 중 최고액을 초과한 다수 보험은 각 계약의 보상책임액을 비례 분담하여 지급한다.' 이 문장은 '실손의료보험을 여러 개 들었을 경우 각각의 보험사는 실제 의료비를 N분의 1로 나눠서 지급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비슷하게 보장하는 실손의료보험 두 개에 가입한 다음 10만원 정도 드는 병원 치료를 받고 보험금을 청구하면 각각의 보험사에서 10만원을 둘로 나눠 5만원씩만 준다.
금융감독원은 2009년부터 실손의료보험에 중복 가입했다면 해지하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실손 보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발표한 '실손의료보험의 소비자 문제 및 개선 방안'에 따르면 조사 대상 1000명 중 중복 가입으로 피해를 봤다는 소비자가 14%였다. 한국의 실손의료보험 가입자가 약 3000만명임을 고려하면 수백만명이 불필요하게 중복 가입을 해 손해를 보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