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 와서
유안진
묻노니, 나머지 인생도
서리 묻은 기러기 쪽지에
북녘 바람길이라면
차라리
이 호젓한 산자락 어느 보살 곁에
때이끼 다숩게 덮은
바윗돌로 잠들고 싶어라
어느 훗날
나같이 세상을 춥게 사는
석공이 있어
아내까지 팽개치도록
돌에 미친 아사달 같은
석수쟁이 사나이 있어
그의 더운 손바닥
내 몸 스치거든
활옷 입은 신라녀 깨어나고저
-유안진, '풍각쟁이의 꿈' 문학사상사 62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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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 여왕
유안진
총명함이 지나쳐
춥고 추워야 했던 여자
여자되길 거부했어도
여자로 살고 싶었던 여왕
사랑을 안해 봤어도
누구보다 잘 안 여자
거렁뱅이 마음조차
어여삐 거둔 여왕
저자거리 놀림감 되어도
지귀志鬼땜에 행복했던 여왕
그러므로 모든 거러지를
행복하게 해준 여왕
사랑하여 지은 죄는
죄되지 않는다는 듯
불타 죽어야 할 간통녀를
살려낸 사랑의 신
품에 안지 않았어도
모든 남성의 애인이 된 여왕.
-유안진, '풍각쟁이의 꿈' 문학사상사 6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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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유안진
깊은 밤
빈 뜨락에
가랑닢 소리
니는 죽으면
뭣 될라노
임자방 댓돌 밑에
귀뚜리 되지로
문풍지 피리 부는
달빛 노래 부르며
하늘에다 길을 여는
별똥별의 꼬리 달고
머나먼 꿈나라로 가
나래 쉬는 풀벌레
그때
그때라도
임자사람 되지로
-유안진, '풍각쟁이의 꿈' 문학사상사 42쪽에서
키
유안진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시집 [ 그리움을 위하여 ] 자유문학사,1991. P 89
충고
유안진
마음아
음지식물같이
창백한 내 마음아
물에 물 탄 듯이
살아가는 일도
내게는 숨이 차다
벅차고 힘겨웁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거리 거리의 저 웃음들
저 바쁜 웃음 속에
끼여들어봐라
웃음이든
노래이든
지저귀어봐라.
- 詩集 [ 빈 가슴 채울 한마디 ] 미래사, 1991.
신록을 보며
유안진
사랑은 이미
이슬진 그리움이 아니다
눈부신 죄가 아니다
넋을 나꿔 채던
환희의 꽃철을 지나
미움도 아쉬움도
갈무리 갈무리해 낸 초록
우정의 우리 빛깔
슬기롭고 자랑스런
내 친구의 웃음
밀물치는 기쁨의 파도이다.
- 시집 [ 빈 가슴 채울 한마디 ] 미래사, 1991.
세월은 아름다워
유안진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싸여야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주는 사람과
얘기거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히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 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느니
앞으로도 절대로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한
느낌표를 채워 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 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 되어도
일등을 못 했어도
출세하지 못했어도
고루고루 갖춰 놓고 살지는 못해도
우정과 사랑은 내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
영원한 느낌표로 자욱져 있듯이
나도 그대 가슴 어디에나
영원한 느낌표로 살아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