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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통정대부 수 강원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하연(이중량)형 비문
공의 휘는중량(仲樑)이요 자는 공간(公幹0이니 영천인(永川人)이다 오대조 휘 헌(軒)이 비로소 예안(禮安)의 분천(汾川)으로 옮겨 왔으며 벼슬은 군기소윤(軍器少尹)에 이르렀다
고조의 휘는 파(坡)는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증직이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요 증조의 휘는 효손(孝孫)이니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로 증직이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이며 조의 휘는 흠(欽)이니 인제현감(蹸蹄縣監)으로 증직이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이요 아버지의 휘는 현보(賢輔)니 숭정대부 행 지 중추부사(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로 시호가 효절공(孝節公)이며 어머니 정부인(貞夫人)권씨(權氏)는 관향이 안동(安東)이니 충순위(忠順衞)효성(孝誠)의 따님이다
공이 연산군10년(1504)9월19일에 출생하였으니 자질이 후하고 국량이 컸으며 침묵 과언하여 남의 장단을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과거(科擧)를 위한 학업에 힘써 한번의 실패없이 성공하였다 무자년(152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갑오년(1534)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분정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로 뽑혀 들어갔다
병신년(1536)에 대교(待敎)로 승진되었으며 정유년(1537)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겼으며 이어 승정원 주서(轉承政院注書)로 전근 되었다가 어떠한 일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잇달아 어머니 상고를 당하였으며 기해년(1539)에 상복을 마치고 복직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되었다 경자년(1540)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신축년(1541)에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으며 그해 겨울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병조정랑으로 전임 되었다.임인년(1542)에 경기도사를 거쳐 계묘년(1543)에 어버이 봉양 때문에 영천군수를 청원하였다 영천군수로 부임하여 후한 덕으로써 행정명령을 발하고 민정을 잘 살펴 독단적이거나 번잡한 행정을 하지 아니하니 상하가 서로 믿고 인물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법도를 잘 지키는 어진 관리로 일컬어 오고 있다
기유년(1549)에 임기가 만료되어 종부시 첨정으로 들어갔다가 삼척부사가 되었으며 경술년(1550)에 청송부사로 전임되었으니 청송은 어버이의 고향이 가까와 봉양에 편리한 때문이었다 갑인년(1554)에 또 안동부사로 옮겼으며 을묘년(1555)여름에 아버지의 상고를 당하여 정사년(1557)에 상복을 마치고 사헌부 집의를 거쳐 추천으로 홍문관 교리로 들어갔다 기미년(1559)에 응교가 되었다가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이어 경상도 재상어사(災傷御史)로 나갔다 그해 겨울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되었으며 경신년(1560)에 우부승지,예조참의,좌부승지등을 역임하였다 신유년(1561)에 우승지가 되었으며 임술년(1562)에 상주목사로 나갔으며 계해년(1563)에 경주부윤으로 전임되었다가 갑자년(1564)에 군액(軍額)의 결원이 많았다는 까닭으로 파직 되었다.
정묘년(1567)에 영해부사가 되었으니 영해는 동해안에 있는 궁벽한 곳으로 방비가 엄하지 못하고 관례에 따라 쇠패한 무신을 차출하니 다퉈가며 백성들을 약탈 박해하였다. 때문에 집을 버리고 도망한 집이 절반이 넘었으며 군의 명부가 날로 비어져 그 형세가 구제하기 어려운데까지 이르렀다.공이 그러한 폐단을 들은지 오래이라 아전중에 우심한 자 1~2명을 먼저 징계하고 계속하여 그 원래의 오판을 규명하고 경중따라 적을 처치하니 몇달을 지나지 아니하여 유민들이 안정되고 공사가 다함께 만족하였다 따라서 근세의 선정으로 공을 가장 칭송하였다. 경오년(1570)에 임기만료로 향리로 돌아갔다가 신미년(1571)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으며 겨울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임신년(1572)에 파직되었다.
이로부터 비록 항상 군직을 갖고 있었으나 벼슬에 뜻이 적고 산수를 사랑하였다. 살고있는 예천은 산천경계가 매우좋아 꾸며놓은 원림화죽(園林花竹)과 지대정사(池臺亭舍)가 한 둘이 아니었다 공의 여러 형제가 다함께 문학을 닦아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는 데에 뜻을 갖고 있었으나 사업에 발하여 이 세상에 써 보았는 사람은 오직 공 뿐이었다 빛나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한결같이 선인(아버지=이현보)이 어버이를 받들던 도리로써 어버이를 받들었으며 노래에 물러나와 쉬었는 즐거움도 역시 선인의 고도(古蹈) 같았으니 공은 진실로 선대의 유지와 유업을 잘 계승한 사람이라 이르겠다
천성이 소박하고 진살하며 처사에 치밀하였다.사치하고 경박한 풍습을 미워하여 경솔하고 게으른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하늘이 만물을 낳아줌에 각각 해야할 일이 있었다 비록 다같이 진실한 사업은 할 수 없으나 농사를 지음에 있어서는 반드시 많은 수확을 기대하고 수렵을 하려면 반드시 많은 짐승을 잡아야 한다 어찌 마음을 쓰는 바 없이 소식(素食)에 안연하여 되겠는가]하였다.
자못 시문(詩文)을 좋아하여 문장이 전중하였으나 타고난 기질이 노둔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스스로 재질이 남과 같이 못한 것을 브끄럽게 여기고 언제나 자신을 낮추었다. 영광된 일이 있으면 문득 분수에 넘칠까봐 염려하고 관직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좋은 일은 반드시 남에게 양보하고 잘못된 일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렸으니 대개 천성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병이 위독하여 여러 아우들이 달려가 밤낮으로 서로 대하였으나 한마디도 집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비록 사랑하던 어린 것이 앞에 있었으나 돌아보고 처치하려는 생각을 하지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였다.
임오년(1582)3월19일 정침에서 졸하였으니 향년이 79세였다. 공이 습독 반사형(潘士浻)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니 영승(令承)이다.영승이 7남2년을 두었으니 아들은 사원 ,사약,사홍,사민 ,사순,사성,사윤(士愿,士約,士弘,士敏,士純,士誠,士潤)이요 딸은 선비로 재명(才名)이 있는 조우인(曹友仁)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이 해 9월 초2일 예천 효망산(孝望山)갑좌에 안장하였다.
註:1.군액(軍額)=군사의 정원수 2.고도(古蹈)=고상하게 노니는 것 3.소식(素食)=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
출처:매암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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