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무장 항일 운동은 크게 두가지만 주목하세요.
1930년대 초반의 한국독립군과 조산혁명군의 한·중 연합 작전, 1930년대 후반의 조선 의용대입니다.
일단 1931년 만주 사변 이후인 1930년 전반에는 한·중 연합 작전을 펼친 것에 주목하세요.
따라서 북만주에서 활동한 한국독립당 산하의 독립군 부대인 한국독립군(지청천), 남만주에서 활동한 조선혁명당 산하의 독립군 부대인 조선혁명군(양세봉)의 활동에 관련한 사료를 살피시면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두 항일 독립군 부대와 관련 있는 아래 사료를 반드시 공부해두세요.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합의 내용(1931) -----------------------------------------------
1. 한·중 양군은 최악의 상황이 오는 경우에는 장기간 항전할 것을 맹서한다.
2. 중동 철도를 경계선으로 하여 서부 전선은 중국이 맡고, 동부 전선은 한국이 맡는다.
3. 전시의 후방 전투 훈련을 한국 장교가 맡고, 한국군에 필요한 군수품 등은 중국군이 공급한다.
한국 독립군의 활동 ------------
만주에 풍운이 험해지고 일제는 군사 행동을 일으켜 북만주 지역까지 마수를 뻗치므로 우리 부대는 중국군과 손잡고 항일전에 들어갔다. 쌍성보 공략전을 비롯하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습격, 경박호 대첩, 대전자령 전투 등 대전투만도 몇 차례 치루었다. 이때는 소극적 게릴라전이 아니고 대규모 전투였다. 우리는 1933년까지 만주 땅에서 싸우다가 일제 침략의 전면화에 따라 효과적 대책을 강구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소명이 있어 남중국으로 떠나갔다.
- 오광선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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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군과 중국 의용군 합의 내용(1932) -------------------------------------------------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고, 인력과 물자는 서로 나누어 쓰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 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조선 혁명군의 영릉가 전투(1932) ------------
영릉가의 뒷산에 대기하고 있다가 적을 요격하여 수 시간의 격전이 벌여졌다. …… 같은 해 5월 8일 일·만 연합군은 다시 영릉가에 진격해 왔다. 한·중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이나 격전이 계속되었다. …… 같은 해 7월 7일, 영릉가 석인구에서 적의 내습을 받았으나 마침 조화선 부대의 내원을 받고 양세봉의 영웅적 독전으로 적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소총 30여 정을 노획하였다. - 영릉가 전투 기록 -
▷ 양세봉이 지휘하였던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홍경성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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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은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일·만 연합군과 싸우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점차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일부를 제외하고 중국 관내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관내 대표적인 독립 운동 세력이었던 한국 독립당과 의열단을 중심으로 항일 전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민족 혁명당이 결성됩니다(난징, 1935). 하지만 김구 등 임시 정부를 고수자들의 불참, 의열단 계열이 당권을 잡자 조소앙, 지청천 등 민족주의계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통일 전선 정당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됩니다.
민족 혁명당 강령(1935) ------------------------------------
• 원수 일본의 침략 세력을 박멸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 봉건 세력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주 집권제 정권을 수립한다.
•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를 갖는다.
• 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게 분배한다.
• 대규모 생산 기관 및 독점 기업은 국영으로 한다.
• 노동 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 국적(國賊)의 일체의 재산과 국내에 있는 적 일본의 공사유 재산을 몰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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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혁명당은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1937),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나섰습니다(1938).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로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이나 후방 공작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항일 투쟁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좀 더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 세력이 대일 항전을 펼치고 있는 화북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이에 따라 최고 지도부와 일부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북상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하고,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리죠. 화북으로 이동하지 않은 병력은 김원봉의 지휘 아래 이후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죠(1942).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이 중국 관내로 이동해갔지만, 이후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항일 유격대들이 이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였습니다. 동북 인민 혁명군(1933), 동북 항일 연군(1936)이 대표적입니다. 동북 항일 연군은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37년에는 조국 광복회 국내 조직의 지원 아래 보천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답니다.
1930년대 활동 독립군 부대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