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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야곱의 리베이트>의 줄거리: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한 야곱의 노력이 일대 위기를 맞게 되면서 야곱은 거래처를 변경하면서 거래의 진화를 꾀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형 에서와의 거래를 통해서 장자권을 획득하려하고 그리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탈취하려했다가 이제는 하나님으로 거래처를 변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와는 다르게 획기적으로 리베이트를 제안합니다. 한편 이 모든 과정 중에 복중에서부터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야곱을 관계하고 계셨을까요?
야곱의 리베이트
(창28:1~22)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야곱의 리베이트>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야곱의 리베이트’
오늘 본문 아주 유명하지요. 특히 이 본문만 읽으면 저절로 입에서 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 받아서”
새벽기도에 가면 이런 찬송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본문이 과연 새벽기도 때마다 야곱을 본 받아서 믿음 생활을 해야 될 내용을 가르치는 그런 본문이겠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을 위하여 오늘 본문 내용이 주어지고 있다고 보면 더 정확합니다.
오늘 제목을 ‘야곱의 리베이트’라고 했는데 리베이트라는 말의 뜻을 잘 아시죠?
거래처에 물건을 팔아서 그 물건 값을 다 받았습니다. 그 받은 돈에서 일부를 다시 돌려줍니다. 이게 리베이트예요. 넓은 의미에서 뇌물까지도 다 포함되는데, 이 리베이트가 꼭 대금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리베이트를 먼저 약속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뇌물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게 할인과는 다릅니다.
할인은 물건 값이나 요금 자체를 깎아주는 것인데, 리베이트는 물건 값은 정가대로 다 받고 일부 돈을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이 리베이트가 우리나라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됩니다. 특별히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제약 회사가 의사를 상대로 하는 리베이트입니다.
의사에게 약 처방권이 있으니까 제약회사의 로비를 통해 소개 받은 그 약을 처방해줍니다. 의사를 통해서 약의 판매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100만 원어치를 팔았다면 10만 원을 리베이트로 주고, 200만 원어치를 팔았다면 40만 원을 리베이트로 주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가 됐는데 범인을 잡고 보면 제약회사만 야단을 맞는 거예요. 그래서 도입된 것이 쌍벌제도입니다.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측뿐만 아니라 제공받는 측도 같이 벌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제도를 도입했느냐면 ‘성분 명 처방 제도’를 도입합니다.
성분 명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해열진통제로 유명한 타이레놀이 있는데, 이 타이레놀의 주성분은 아세트아미노펜입니다. 이렇게 타이레놀이라는 특정회사의 약을 처방하지 않고 아세트아미노펜 몇 그람 이런 식으로 처방하면 의사에게는 리베이트가 적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번에는 약사들이 리베이트를 제공받게 됩니다. 약사가 그 성분이 들어있는 약 중에 자기 마음대로 골라서 팔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리베이트가 문제가 되어서 나중에는 의사와 약사의 싸움으로 번집니다. 이게 리베이트의 이권을 두고 벌어진 싸움이라고 해서 비판도 받고 그랬습니다.
리베이트의 원조라고 할까요?
성경이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리베이트 제공을 최초로 언급한 자가 누구냐?
바로 야곱입니다. 하여간 야곱이 역사적인 인물이긴 해요.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읽어서 아는 것처럼, 세상의 복인 부귀영화를 얻고자 했지만 현재 야곱에게는 영화라고 할 것이 없어요. 인간 사회가 자리를 잡고 질서를 잡고 체제를 잡고 있어야, 그 인간 사회에서 명예를 얻고 인기를 얻고 높아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족상태로 부락민으로 살고 있는 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집안에서는 그런 사회적인 명예 같은 것은 주어질 수가 없으므로 세상복은 주로 재물에 관계됩니다.
이 세상 복인 재물을 얻기 위한 야곱의 노력이 이때에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 동안 야곱이 세상 복을 얻기 위해서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나가서 열심히 양을 치거나 밭에 나가서 일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주로 거래입니다.
거래를 통해서 세상 복을 얻으려고 했던 거예요.
형 에서에게 거래를 틉니다. 팥죽으로 거래를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사들입니다.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샀지만 아버지가 그것을 인정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장자인 형 에서에게 마지막 축복을 해주려고 할 때에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아냅니다. 일종의 거래죠. 에서에게서는 주고받는 것이 있는 정당함이 있었다면, 그나마 이삭에 대해서는 부당한 거래이면서도 주고받음이 있기는 했습니다. 어머니가 만든 요리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에서 때에는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아버지 이삭에게서는 별미로 축복의 기도를 받아냅니다. 하여간 요즘으로 말하면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해야 되겠어요. 거래를 성사시키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얻어 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얻어낸 결과, 축복을 향한 야곱의 열정적인 여정에 위기가 도래하게 됩니다. 형 에서가 죽이겠다고 결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도망을 가는 이야기를 오늘 하고 있는데, 그 도망가는 과정이 사실은 도망갈 필요가 없었던 과정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축복된 결혼을 위한 발걸음이 되었어야 하는데, 스스로 이 세상의 복을 얻겠다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의 집안에서의 장자권을 허락하신 자답게 하늘에 있는 복으로 만족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면 이 걸음걸이가 아내를 얻게 되는 복 된 걸음걸이가 될 뻔 했는데, 스스로 이 세상에서의 복을 얻겠다는 마음을 먹음으로 불행으로 샤워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에게 나타나셨어요.
야곱이 800km나 떨어진 하란으로 혼자서 가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두렵고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장자의 명분도 샀고, 아버지로부터 축복의 기도도 받았는데, 지금 주어진 현실이 대체 이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사고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아 냈을 때에 리브가와 야곱이 부엌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안 됐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심지어는 안정적으로 평강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집에서도 쫓겨납니다. 집에 있는 상태에서 복이 더해지기는커녕, 집에서조차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두 거래를 통해서 얻게 된 장자의 명분과 축복의 기도를 받아낸 상태에서, 야곱은 마음속에서 물질적으로 풍요함을 누리는 핑크빛 미래를 꿈꾸었지만 미래는 암흑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루스라는 곳에 도착해서 돌을 베게삼고 겉옷을 덮고 유숙을 하는데,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21절에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이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미래가 불투명하고 두려움으로 꽉 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한데 이게 무슨 꼴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계승시키는 차원에서 그대로 다 이야기를 해주시고, 15절에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하나님께서 평생 같이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약속을 받고 야곱이 한 일이 바로 리베이트였다는 것입니다.
그 리베이트의 내용이 뭡니까?
참 이게 기가 막히죠.
20-22절에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걸 지금 좋게 미화해서 해석할 필요 없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먹을 떡과 입을 옷을 달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마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선민들이 당신을 대면할 특권을 주시고 세상을 외면해도 괜찮을 특권을 주신 그런 선민들이 구할 것이 아니에요.
지금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미래에 당신께서 이루실 약속이자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계승시키시는 이 마당에 먹을 떡과 입을 옷이라는 물질을 구합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이 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너무 다르잖아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갈 바를 모르고 출발을 합니다. 내가 집을 떠나면 하나님이 먹을 것 입을 것 다 책임지실 줄 알고 갔는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었어요. 갈 바를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이삭도 우물을 계속해서 포기합니다. 우물이라는 것은 이삭이 소유하고 있었던 거대한 재산들이 유지되기 위한 첫 번째 필수 조건이었는데 그걸 다 포기한 거예요.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마음의 첫 번째 관심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었고,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복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 거래하고 이삭과 거래했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도 거래를 합니다.
거래를 하면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면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말만 들으면 하나님이 지금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안달이 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봐드리는 말투이고 하나님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싶으면 떡과 먹을 것들을 챙겨주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달라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잘 돌아오게 되면 지금 벧엘에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고,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리베이트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금으로 받은 것들 중에서 얼마를 떼어서 돌려주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주실 것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면 그 중에서 돌려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서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 나갑니까? 교회 안 나가면 괜히 이상한 일 당할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벌주고 그러실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게 앞서서 리베이트를 약속하는 거예요.
제약회사와 똑같은 거예요. 제약회사가 의사나 약사가 자기네 약을 안 팔아 줄까봐 리베이트를 미리 약속합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교회에 가는 이유는 안 가면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이고 이 세상에서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교회를 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교회에 가는 것이 리베이트의 의식을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복(腹) 중에서 이미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복 중에서만 선택했어요? 이미 잉태되기 전에 야곱을 선택하신 겁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야곱이 77살인데 하나님께서는 77년이 지나도록 야곱을 떠나 본적이 없으십니다. 앞으로도 야곱의 생애가 마쳐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거예요. 그게 바로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야곱을 통해 이루려는 것이 있는 동안은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나서, 그 다음 야곱의 입에서 나와야 될 말은 어떤 말입니까?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벌써 틀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여호와께서 여기에 계시겠습니까? (벧엘)루스라는 들판에 계시겠습니까?
그곳에 계시다가 야곱아 반갑다! 하고 만났겠어요?
16절이 어떻게 되었어야 했느냐?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나와 함께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 계셨다면’에서 하나님을 장소에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자기가 정해버립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지금 야곱과 하나님은 거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이 거래처가 아닌데 야곱이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거래처로 여기느냐?
하나님보다 먼저 이 세상의 복이 야곱의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세상 복을 두고서 거래를 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래처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셔야 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거래를 통해 얻기 위한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과 한편이 된 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곳이 세상인 것입니다.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나가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과 거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 것을 마음에 두고, 세상에서 이런 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은 다 하나님에 대한 리베이트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관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먼저 마음에 모시지 않고 세상 것을 먼저 끌어들이고 나면, 하나님과는 반드시 거래를 하게 되고, 내가 헌신하는 믿음생활이나 교회생활이 모두 리베이트를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되는 것이고 리베이트 자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리베이트가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세상 것을 이것저것 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 그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과 내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거예요.
원칙적으로 말하면 내게 육체를 주시고 건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다음에는 이 육체와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거리를 둔 거래 상대자로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해서 보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리가 생기니까 거래가 생기는데 이 거리가 왜 생깁니까?
하나님보다 먼저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 왜 불행 샤워를 허락하셨겠습니까? 불행 샤워를 하도록 왜 그냥 놔두셨습니까?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1등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에서 1등으로 영광을 받는 자는 물질이고 돈이고 복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마음속에서는 이 복이 영광스럽고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빛에 가려서 보이지를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복을 향한 열정을 그대로 열어주심으로 에서의 복수심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고, 이제 비로소 야곱의 마음속에서 물질과 세상 복에 대한 휘황찬란한 영광의 빛이 가려져버리고 미래가 불투명해져버린 것이에요. 내가 재산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암흑 속에 처하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준비가 겨우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나타난 하나님과 다시 거래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대화를 했다고 해서 야곱의 인간됨이 확 변하겠습니까?
성경이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이었습니다.
아내 사라, 본토 친척 아비 집, 롯과 땅을 나눌 때도, 이삭조차도 하나님보다 1등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1등 하시는 상태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1등 되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내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버렸던 거예요.
그런데 야곱의 과정은 어떠냐?
지금 이 상태에서 하나님이 2등인지 3등인지 4등인지 몰라요. 야곱의 마음에서 1등이 재물입니다. 재물이 1등인 이 상태에서 하나님이 1등인 상태가 되어서 야곱의 생애는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이 1등인 상태로 시작해서 이 1등을 어떻게 계속 유지해나가느냐의 삶이었다고 한다면, 야곱은 재물이 1등인 상태에서 하나님이 1등인 상태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에게 훨씬 더 가까운 사람들이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거래하는 야곱의 리베이트를 우리의 믿음의 삶 속에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로 세상을 마음에서 단절시켜 버리고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꾸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내가 좋아하고 이루고 싶은 상태가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 거래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에 대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뭔지 아시죠?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생물학적인 죽음의 결과대로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대로 적용시켜버리세요.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다 빼내야 하나님은 거래처가 아니라 나와 한편이 되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과의 거래를 통해 얻어야 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서 이미 다 하나님 것인 상태에서 얻고 자시고 할 것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한편이 되면 하나님이 필요하신대로 다 내게 허락하실 수도 있는 것들인데, 그것을 얻겠다고 하나님을 거래자로 보고 있다는 것은 큰 잘못 아니겠습니까?
자꾸 하나님과 나 사이에 들어와서 1등 하려고 하는 세상의 좋은 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내가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거래관계를 하나님과 한편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이 세상일은 하나님이 오늘 말씀에서도 그러셨듯이 ‘내가 이루겠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맛을 좀 봐야하지 않겠어요? 맨날 하나님과 거래만하고 있겠습니까?
야곱의 리베이트.
이런 서원이 왜 나와요?
하나님보다 이 세상이 야곱의 마음에서 1등하고 있으니까. 이건 믿음이 아니죠.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1등 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면서 야곱의 리베이트를 철저하게 거부하시고, 하나님이 거래처 직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한편 되어, 이 땅에서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참, 애매하고 아슬아슬하게 가려져있어서 알지 못했던 리베이트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이 거래처 상대자가 아니라 나와 한편이 되셔야 함을 잊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오늘도 매순간 기억하며 죽은 자임을 고백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