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보답을 바라고 선행을 하는가?(行善欲望報乎)
누가복음 14:13-14, 마태복음 6:1-3, 고린도전서 15:끝,
고린도후서 4:끝, 에베소서 3:11, 갈라디아서 6:9
홍제원교회
吾人背世入敎會盡力信仰者何故, 且施濟行善何故也? 欲現世之報酬乎? 路可十四章十三,四. 節參照, 則義人更生時有榮償, 而無一点報酬. 且欲得名譽而信仰乎? 且讀 馬太六章一,二,三.節. 則右手所爲, 使左手不知云. 然則處現世, 欲得名譽亦不能者矣. 且欲成功而信乎? 今世善弱惡强, 以綿羊之善安能敵獅虎之惡乎? 暗黑欲壓光明, 罪惡掩正義, 成功安可望也? 然則我等有何目的而信乎? 福音宣傳有何目的, 施濟有何目的, 行善有何目的, 社會改良有何目的, 眞理探究有何目的乎? 報酬,名譽,成功皆不能得, 尙冒險爲此者, 抑有何說? 主曰人若譽爾則禍矣, 눅六章二六. 云. 此何意也? 人名辱必加, 名必有猜故也. 然保羅曰我等行善, 不如擊空事業, 有確實性, 世人之行皆如擊空, 而惟信者之事業確實無疑, 時至當結實也. 然則吾人之成功, 不在今世在來世, 名譽不在世人在神前, 報酬不在現世在未來, 故不明此理則易爲落心, 祈禱與傳道, 皆未易成功者, 美國世稱福善國, 而其信者全人口不過五分之一, 朝鮮呼稱信仰國, 而信者亦不過八分之一. 自傳道者觀之則全然失敗也. 且於培材每年卒業生近百人, 而其中已受洗禮者數十人, 新洗禮者每三十餘名也. 且於敎會之內, 欲每人眞實而不一致, 牧會者不必落心也, 無神論者於基督敎國最多, 良謂罪惡, 基督敎宜得時, 非減退也. 反爲增加, 故傳道之成功在現世, 以外不必落心, 且施濟目的, 我朝英廟時, 有李思觀, 作湖西雄宰赴任之, 逢金漢耈氏, 時金女纔三歲, 天寒金府院君率家人自瑞入京之路也. 幼女寒不勝, 李思脫貊裘與之. 其後漢耈之女, 爲英廟之后, 英廟問后內恤之人, 后答以李思觀, 思觀得至大相. 韓信寄食於漂母, 信曰吾當以金報爾, 母曰豈望報乎? 故施濟當施於不望報之地, 應於他未見之時也. 故欲望而施, 則或吹喇叭, 或上屋廣告, 已受價於人, 不能受於神前也. 社會改良亦然, 禁酒廢煙運動, 皆基督敎會之當爲者也. 非可望成, 基督降世後, 今二千年來, 軍備擴張, 且外國傳道費, 美國用一千萬弗, 而國際問題去益葛藤, 外面唱軍縮而內實擴張, 부버大統領唱軍縮四分一縮小論, 而其成功與否未可知, 日本今已反對聲明, 故成功不在今世, 而在來世明白. 生命在內不在外, 一切除去外飾, 務內的生命, 則時至當更生, 享榮無窮矣.
우리가 세속를 떠나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에 힘을 다 쏟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또한 남을 도와 구제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현세에서의 보수(報酬)를 받기 위하여서 입니까? 누가복음 14:13-14에는 ‘의인(義人)들이 부활할 때 네가 영광스럽게 갚음을 받을 것이니, 현세에서는 한 점의 보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명예를 얻기 위하여서입니까? 마태복음 6:1-3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현세에 살며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역시 가능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을 위하여 신앙을 갖는 것입니까? 오늘날 세상에는 선한 이가 약하고 악한 이가 강하니 양과 같이 선한 것이 어찌 사자와 범을 대적할 수가 있습니까? 암흑이 광명을 누르려고 하고, 죄악이 정의를 덮으려고 하니 성공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신앙을 가집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남을 구제하는 일이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나, 사회개량은 무슨 목적이며, 진리탐구는 무슨 목적입니까? 보수나 명예나 성공을 다 얻을 수 없는데 그래도 모험을 하며 이일을 하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입니까? 주께서 ‘모든 사람이 너를 칭찬한다면 화가 있도다’라고 누가복음 6:26에 일렀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유명해지면 반드시 욕이 옵니다. 유명하게 되면 반드시 시기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지 않아서 확실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다 허공을 치는 것과 같지만, 신자들의 사업만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이 있어서 때가 되면 마땅히 결실을 가져 오게 됩니다.
그런즉 우리의 성공은 금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습니다. 명예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있으며, 보수는 현세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치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기도와 전도는 다 쉽게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세상에서 복된 나라라고 일컬어지만 신자는 전 인구에 5분의 1에 불과합니다. 조선은 신앙의 나라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신자는 역시 9분의 1에 불과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아주 실패한 것입니다.
또, 배재(培材)학교의 매년 졸업생이 근 백 명이나 되지만 그 중에 세례를 받은 자가 수십 명이며, 새로 세례를 받는 자가 3십여 명이 됩니다. 또한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가르치려고 하나 일치하지 않은 데 대하여 목회자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기독교국에 가장 많아서 실로 죄악이긴 하지만 기독교는 마땅히 때를 얻어 감퇴하지 않게 되고 도리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성공은 현세에 있으니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구제를 하는 목적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조임금 때 이사관(李思觀)이라는 사람이 충청도의 큰 고을에 원님이 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김한구(金漢耈) 씨를 만났습니다. 당시 김한구의 딸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추운 날씨에 뒷날 부원군이 된 김한구가 식구들을 거느리고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딸이 추워서 벌벌 떠는 것을 보고 이사관이 털가죽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그 뒤에 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왕후가 되었고, 영조는 왕후에게 왕후를 돌볼 사람[內恤之人]을 추천하라고 하여, 이사관을 추천하였고 이사관은 뒤에 정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옛날 중국 초한 시대의 한신(韓信) 장군은 가난하던 어린 시절 빨래하는 아주머니에게 밥을 얻어먹고 말하기를 ‘내가 뒤에 금으로써 갚아 주겠소’라고 하니, 그 빨래하던 아주머니가 대답하기를 ‘내가 갚아주기를 바라서 밥을 주었겠느냐’며 나무랐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도와 구제하는 것은 보상을 바라는데 있지 않고, 알지 못하는 때에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갚음을 바라서 베푸는 일은 자기가 하는 일을 나팔을 불어서 알린다든지 혹은 옥상에 광고를 붙인다든지 하는 것으로 이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베푼 일에 대하여 갚음을 받은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보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회개량도 이와 같습니다. 금주나 금연운동은 다 그리스도교에서 마땅히 할 일이지만 그 성공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강림하신 지 2천년 동안 군비는 확장되었고, 또 외국에 전도하는 비용으로 미국에서는 1천만 불을 쓰지마는 국제문제는 갈수록 더욱 갈등을 일으킵니다. 곧 외면으로는 군축을 외치면서 내면으로는 실제로 확장을 하고 있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군축 4분의 1을 줄이자는 축소론을 주장하였으나 그것이 성공할 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은 이미 반대성명을 냈으므로 그것의 성공은 금세에는 있을 수 없고, 내세에 있을 것이 명백합니다. 생명은 안에 있고 밖에 있지 않습니다. 밖의 장식을 일체 제거하고 내적인 생명을 힘써야 때가 오면 마땅히 중생하게 되고 영화를 무궁하게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