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송암사상선양회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단군계열(대종교/선불교/한얼교)‥─‥ 스크랩 경복궁 서측탐방-사직단 단군성전 황학정 딜쿠샤 권율장군 집터 홍난파 가옥등
낙영 추천 1 조회 187 14.11.30 18:0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경복궁 서측탐방-사직단 단군성전 황학정 딜쿠샤 권율장군 집터 홍난파 가옥등

(2012/11/06 현재)


경복궁 서측 걷기 탐방 코스중 조선시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사직단(社稷壇),
우리 겨레의 시조 단군할아버지를 모신 단군성전, 경희궁에 궁술연습을 위해 지었던 황학정(黃鶴亭),
그리고 3ㆍ1운동 소식을 전세계로 타전한 UPI통신의 특파원 알버트테일러가 살았던집인 딜쿠샤,
임진 왜란의 영웅 권율장군 집터,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홍파동 홍난파 가옥(紅把洞 洪蘭坡 家屋) 전경 입니다 






















단군성전과 황학정(黃鶴亭) 전경 입니다 





















달쿠샤는 흰두어로 이상향이라는 뜻으로 이건물은 3ㆍ1운동 소식을 전세계로
타전한 UPI통신의 특파원 알버트테일러가 1923년 집을짓고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때
까지 살았던 집인 딜쿠샤 와 권율장군 집터 전경 입니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입니다 























 

■사직단 (社稷壇) 사적

 

-서울 종로구 사직동 1-28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國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國稷壇)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神座)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897년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이곳을 태사(太社)·태직(太稷)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는데, 이 사직을 종묘와 함께 중하게 여겨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와 납일(臘日, 동지 후 세번째 되는 개날(戌日))을 택하여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1922년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ㅇ 사직단 조성(1395/태조 4년)

ㅇ 주원(周垣) 축장(1414/태종 14년), 사직단에 별도 재실 영조(1416/태종 16년)

ㅇ 임진왜란으로 소실(1592/선조 29년)

ㅇ 종묘 중건 이전에 복구된 것으로 추정(1596~1603/선조 29년~선조 36년)

ㅇ 안향청 중건(1701/숙종 27년)

ㅇ 악기고 화재로 소실(1803/순조 3년)

 
▶사직의 의미와 연혁

 

사직은 국토지주(國土之主)의 사(社)와 오곡지장(五穀之長)인 직(稷)의 두 신위에게 제사드리는 곳으로, 단을 쌓고 봉사(奉祀)하므로 사직단이라 한다.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나라에서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우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반드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따라서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이칭(異稱)으로 ‘종사(宗社)’라 표현한다. 국가의 안위를 표현할 때는 ‘사직이 평안하다’든가 또는 ‘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며 정부 중신(重臣)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사직은 중국 전국시대 이후 천(天) · 지(地) · 인(人)의 사상이 발생하면서 하나로 협쳐지고 토지와 곡물을 관장하는 지신(地神)으로 받들어졌다. 동시에 이를 주재하는 것은 천자(天子)로서 국가적 제사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고려 때에는 성종 10년(991)에 처음으로 왕성(王城)의 불은사(佛恩寺) 서동에 사직을 세웠다. 이 때 사(社)는 동쪽에, 직(稷)은 서쪽에 세워, 각각의 넓이가 5장(丈), 높이는 3척 6촌으로 섬돌을 내고 5가지 색상의 흙으로 만들었다. 또 현종 5년(1014)에는 중추사(中樞使) 강감찬(姜邯贊)이 사직단을 수축하였다.

 

태조가 즉위한 후 한양 천도의 뜻을 세워 태조 2년(1393) 2월 10일에는 신도(新都)의 종묘 · 사직 등의 형세지도(形勢地圖)를 만들었다. 이듬해 11월 2일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서운관(書雲觀)의 관원들과 함께 종묘 사직의 터를 잡아 공작국(工作局)을 열었다.

이 때 국도(國都)에서 묘동사서(廟東社西), 궁궐에서 묘좌사우(廟左社右)의 원칙에 따라 종묘는 경복궁 동쪽의 연화방에, 사직은 서쪽의 인달방에 그 위치를 정하였다. 태조 4년 정월에는 사직단의 영건공사(營建工事)를 시작하고 2월에는 왕이 친히 서봉(西峰)으로 나아가 사직단의 축조공사 현장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단의 설치가 완성된 후 곧 이어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의 조영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완성단계에 이르자 동년 12월에는 고려 때의 악장(樂章)으로서 사직에 제의하던 것을 고쳐서 새로 지어 사용토록 하였다.

또 제의시 향관과 제(諸)집사는 중추원에서 봉교(奉敎) 선정하여 제향의 엄숙을 기하였다. 중춘 · 중추 · 납일의 대향사(大享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각각 행하였다.

 

한편 태종 6년(1406) 6월에는 왕이 직접 사직단의 개수를 명령하고 이를 관리하며 지키는 수호인을 두었고 나라 안의 각 고을에도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사직단에서의 제사시 희생은 종묘의 경우 우(牛) · 양(羊) · 시(豕)를, 사직에서는 우와 시만을, 선농단과 선잠단에서는 시만 쓰도록 했으나 태종 13년(1413)부터는 종묘 · 사직의 구별없이 우 · 양 · 시 세 가지를 다 썼다.

 


■단군성전(檀君聖殿)

 

-주소:서울 종로구 사직동 산1-50

 

단군성전(檀君聖殿)은 단군전, 단군사묘(檀君祠廟), 단군사우(檀君祠宇) 등으로 불리며, 한국의 국조(國祖)인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 등을 두고 봉향하는 사당을 지칭한다. 단군성전의 경우, 1973년 5월 서울특별시에서 인정받아 사직공원 경내 서북쪽에 마련된 단군성전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단군에 대한 봉향은 역사적으로 왕조 국가 및 민간에 의해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여러 곳에 단군성전이 설립되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단군성전에서 단군은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으며, 단군성전마다 매년 단군이 승하해서 산신이 되었다는 어천절[3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 행사가 개최되기도 한다. 단군성전에 있는 단군은 종교적 차원의 신앙 대상, 국조 등 여러 형태로 인식된다.단군성전은 대종교 등 종교계와 관련된 경우, 개별 관리되는 경우, 지역의 유림들이 관리하는 경우 등으로 구분된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이 사우는 우리 겨례의 시조되시는  단군할아버님을 모신 성역입니다. 그 이름을 단군성전 또는 백악전이라고 부릅니다. 성전 안에서는 정부 표준 단군영정과 국민 경모 단군상을 봉안하여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습니다.정선 경내외에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옷깃을 여미고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는 국조승모의 참뜻을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성전개요[聖殿槪要]

 

단군성전(백악전)은 단기(檀紀) 4301년(西紀1968) 이숙봉 여사(李淑峰 女史)의 희사에 힘입어 이정봉(李貞峰), 이숙봉(李淑峰), 이희수(李喜秀) 세 자매가 단군성전으로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공공건물로 건립하여 사단법인 현정회(社團法人 顯正會)로 이관하였으며, 단기 4306년(서기1973)서울특별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그 후 단기 4323년(서기1990)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희사에 힘입어 사단법인 현정회에서 개축한 성전의 규모는 전체 대지면적 241.99평(800㎡)에 성전이 16평(52.92㎡), 정문인 내외삼문 5.63평(18.6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32.56평, 107.64㎡)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전현액(顯額)인 단군성전(檀君聖殿)은 김응현(金膺顯), 홍익인간(弘益人間) 글씨는 원충식(元仲植), 이화세계(理化世界) 글씨는 손경식(孫敬植), 내외삼문의 간판은 이현종(李賢鍾)이 각각 쓴 것이다.


사직동의  단군을 모신 단군신전,  대종교는 단군(檀君)숭배를 기초로 하는 민족종교이다. 근본 교리는 성(性) ·명(命) ·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 ·조(調) ·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도일(渡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이 건국될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 입니다.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은 다른 곳에서 이주한 선진문물을 가지고 있는 이주민들을 이끄는 부족이며, 곰과 호랑이는 강력한 토착세력을 지닌 원주민들을 대표하는 것 입니다.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기를 원한 다고 했을 때 환웅이 준것은 쑥과 마늘 입니다. 환웅이 거느리고 있는 신은 비의 신 우사(雨師), 바람의 신 풍백(風伯), 구름의 신 운사(雲師)로 구름쑥과 마늘에서 고조선사회가 농경사회이며,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곰과 호랑이 100일동안에 동굴에 있으면서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기를 기달리는 것은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 간의 세력 다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곰 부족이 승리하고 호랑이 부족이 패함으로써 곰부족은 선진 문물을 가진 이주민세력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한 것 입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룰 때에 응원의 상징으로 등장하였던 치우천황(蚩尤天皇)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치우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숭상을 받는 단군 이전의 우리 조상으로 중국의 조상신 황제헌원과의 전쟁을 탁록에서 전쟁을 치뤘는데, 중국인들은 전쟁의 신인 치우천황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마치 괴물처럼 인식하기도 하였었다.

 

중국의 역사서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염제신농과 황제헌원만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기록하고 또 받들어 오고 있었는데, 근자에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은근슬쩍 치우천황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황제헌원과 대전투를 벌였던 탁록에 '중화삼조당'을 세우고 치우천왕을 염제신농 및 황제헌원과 함께 그들의 조상신으로 삼아 섬기며 우리의 상고사를 그들의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왜 그들은 그 오랜 세월 역사서에 그들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면서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던 사실을 부정하고, 지금에 와서야 갑자기 치우천왕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삼는 것일까? 한갓 어쩌구니 없는 우상신의 숭배로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일까?

우리는 혹 우리의 역사를 도둑맞고 있는 사실도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연구와 정립에 대하여 노력하지 않는가? 머리가 있는 자는 생각해 볼 일이다.

 

참조-사직공원내 단군성전은 대종교 단군성전이아니라 대한민국최초의 공공건물(서울시 소유)로 세워진 단군성전이며, 봉안된 단군영정은 정부 표준단군영정(문공부심의번호 77-27과 성상은 정부지정 국민경모상 문공부심의번호 77-16)임을 알려드리며, 용도는   종교를 초월한 국민교육과 국가홍보에 사용 되고 있습니다.관리는 사단법인 현정회(02-736-6375)에사 하고 있습니다

 

 


■황학정(黃鶴亭)

 

-시도유형문화재 25호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산1-1

 

이곳은 원래 서촌(西村) 오사정(射亭, 활터에 있는 정자)의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 터이다. 정자건물은 조선 고종 광무2년(1898) 어명(御命)에 의하여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오사정(五射亭)은 옥동(玉洞) 등룡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 대송정(大松亭), 누상동(樓上洞) 풍소정(風嘯亭, 원명(原名)은 백호정(白虎亭)), 필운동(弼雲洞) 등과정(登科亭)이다. 황학정은 원래 오사정 중의 하나였던 등과정이 있던 자리에 지은 정자를 말합니다.

 

 고종이 나라 잃은 슬픔을 잠시라도 달래기위해 국궁을 들었던 황학정. 원래 황학정 건물은 조선 고종 광무 2년인 1898년 어명에 의해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져 활터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2년 일본이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사를 지으려고 이 활터를 철거하자 몇몇 인사들이 나서 인왕산 자락의 필운동에 있던 등과정터로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 황학정이 자리 잡고 있는 종로구 사직동 1번지다.

 

▶백호정 터(白虎亭址)와 백호정 약수터


누상동과 누하동의 옛 이름 누각골에는 백호정이라는 활터, 즉 사정(射亭:활쏘기 하던 정자)이 있었다. 백호정은 조선시대 서울의 서촌西村에 있었던 오처사정五處射亭, 즉 다섯 곳의 사정 가운데 하나였으며 일명‘풍소정風嘯亭’이라고도 불렸다.

 

인왕산과 북악산에 걸쳐 있는 서촌의 다섯 사정射亭은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필운동의 등과정登科亭,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이다. 이들은 장충단의 석호정石虎亭, 마포의 화수정華水亭, 동대문 밖의 청룡정靑龍亭, 가회동의 일가정一可亭, 천연정天然亭 내의 서호정西虎亭 등과 함께 조선시대 서울의 활터로 유명하였다.

 

호국과 상무 정신의 요람이기도 한 활쏘기가 일제 강점기에 금지되어 활터가 점점 사라지면서 백호정도 이 때 사라졌다. 지금은 <백호정白虎亭> 각자와‘누각골 약물’로 불리던 약수터만이 남아 있다.

 

 

 

■방치된 문화유산 ‘딜쿠샤’(DIL KUSHA) &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

 

경향신문 문주영 기자 mooni@kyunghyang.com  
입력 : 2012-08-23 22:39:28ㅣ수정 : 2012-08-23 22:39:28


- 3·1운동 세계에 알린 미국인 집 ,종로구 무단 거주민 이주 고민


쪽방촌으로 전락한 ‘이상향’ 딜쿠샤를 놓고 서울시 종로구가 고민에 빠졌다. 종로구는 3·1운동을 전 세계에 타전한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가 거주했던 저택 ‘딜쿠샤’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지만 수십년 동안 무단 점거해온 거주湄湧? 이주시킬 대책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종로구 관계자는 23일 “딜쿠샤를 보존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구 문화재위원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지난 4월 딜쿠샤를 소유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공문을 보내 문화재 등록 추진 동의를 받았다”며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주 대책이 수반돼야 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종로구 행촌동 1-99, 1-89번지에 위치한 딜쿠샤는 1898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무역상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부터 살았던 미국식 2층집이다. 테일러는 당시 UPI통신사의 서울특파원으로 활약하며 1919년 3·1운동을 뉴스로 타전해 전 세계에 알렸다. 테일러는 이로 인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1942년 조선총독부가 미국으로 추방령을 내릴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 행복한 마음’을 뜻하며 인도 북부의 곰티 강 인근에 있는 딜쿠샤 궁전에서 이름을 따왔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색 벽돌로 된 건물인 딜쿠샤는 근대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건물 맞은 편에는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운 조선시대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을 권율 장군의 집터로 추정하고 있다.


권율장군은 조선 중기의 군인으로 임진왜란에 있어 바다에는 이순신이라면 육지에는 권율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적인 명장이다. 특히 수원성이나 행주산성에서 병력의 열세를 지형지물을 활용해 대승을 거두었던 전투들은 전술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간 통신사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당시 이순신과 권율의 이름만 꺼내도 울던 아이들이 울음을 멎을 정도였다고 하니 두 장군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딜쿠샤는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실체가 정확히 알려졌다. 그는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서울사진 17점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후 문화재청이 같은해 등록문화재로 입법예고까지 했으나 저소득층이 수십년째 무단점유하고 있는 탓에 문화재 지정은 무산됐다.

 

앞서 이곳은 양기탁과 베델이 함께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도 추정돼 서울시가 1990년대 중반부터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이후 딜쿠샤는 줄곧 저소득층이 무단점유해 1980년대에는 40∼50가구까지 거주했다. 현재는 10여 가구가 남아 화장실 1개를 공유하며 쪽방촌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현행법에는 국유지 거주민들에 대한 이주대책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종로구는 “향후 서울시와 협의해 거주민들에게 임대주택을 마련해 줄 수 있는지 확인한 후, 시에 문화재 등록 추진을 건의할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DIL KUSHA 1923


1910년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UPI 특파원으로서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타전했던 알버트 테일러가 1923년에 지은 집 독립운동을 도우다가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해 1948년 사망했다 우리나라를 그리워해서 한국에 묻어달라 유언해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내력을 모르는 건물로 남아있다가 2006년에 아들 브루스테일러가 66년만에 방문해서 알려졌단다

 

집주인이었던 앨버트 테일러의 한국 이야기는 구한말이었던 1896년, 탄광일로 아버지 조지 테일러가 평안도에 들어오며 시작된다. 그 후 아들 앨버트는 서울에서 UPI특파원 일과 수입품 판매상을 하며 브루스를 낳고 이 집을 지었다. 집의 이름은 한국에 오기 전 아시아를 돌던 중 인상 깊게 보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인도의 궁전 딜쿠샤.

 

앨버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최초로 세계에 타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갓 태어난 브루스의 요람 밑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나 일본으로 가는 동생의 구두 뒷굽에 선언문을 숨겨 도쿄에서 기사화 했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결국 이것들이 문제가 되어 일제에 의해 6개월 간의 감옥 생활을 한 뒤 국외로 추방되고 만다. 그는 1948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양화진 외인묘지에 있던 그의 아버지 옆으로 돌아온다.

 

그 뒤 딜쿠샤라는 각자를 가진 이 건물의 정체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었는데, 브루스 테일러가 87세의 나이로 서울을 찾게 되면서 비밀이 밝혀지게 되었다.


▶ 권율장군의 집터에 있었다는 거대한 은행나무.

 

권율장군은 조선 중기의 군인으로 임진왜란에 있어 바다에는 이순신이라면 육지에는 권율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적인 명장이다. 특히 수원성이나 행주산성에서 병력의 열세를 지형지물을 활용해 대승을 거두었던 전투들은 전술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간 통신사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당시 이순신과 권율의 이름만 꺼내도 울던 아이들이 울음을 멎을 정도였다고 하니 두 장군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 홍파동 홍난파 가옥


-서울 종로구 송월1길 38, 2-46 (홍파동)

 

홍파동 홍난파(洪蘭坡) 가옥은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봉선화>, <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洪蘭坡)(1898~1941)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다. 토지 304㎡에 연면적은 지상, 지하 각 1층 121㎡ 규모이다. 이곳은 개·보수 공사를 끝내고 2007년 9월 소공연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거실과 안방으로 사용하던 지상 1층에 음향시설 등을 설치하여 50명 정도 수용 규모의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며 지하에는 자료실과 시청각실을 만들어 홍난파 관련 서적과 비디오테이프 등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서양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홍영우(홍난파)는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투옥됩니다. 계속된 고문으로 늑막염이 크게 악화되게 됩니다. 그 상태로 72일간 고문을 당하고,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노래를 만들겠다는 전향서를 쓰고 석방이 됩니다. 이후 1941년 적십자병원과 경성요양원(현재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지만 1941년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경성요양원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친일파708인 명단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이 됩니다. 유족들은 옥고를 치루며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전향서를 쓰게 됐고, 협박 때문에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로 2009년 11월26일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를 신청하고, 친일파 등재 유보결정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2010년 11월4일 소송 선고 하루 앞두고 유족들은 소송 취하를 하게 됩니다. 이후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 보고서에 실리게 됩니다.

 

유족이 자진해서 소 취하를 한 이유는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더라도,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죠. 아직도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서울 성곽길, 경희궁 뒷편길을 따라 쭉 올라오면 딜쿠샤에 가기 바로 전에 만날 수 있는 홍난파 가옥입니다. 뒷편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바로 옆에는 기상관측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딱 이맘때 쯤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날짜는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서울 뒷골목을 정처없이 사진찍으며 돌아다니다 만난 홍난파 가옥은 근대건축의 모양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담쟁이 덩쿨이 빨간 벽돌 사이사이로 덮고 있어 따듯한 느낌이 드는 집 입니다. 마치 옛날에 그림 그리라고 하면 이런 모양의 집을 그렸던게 생각이 납니다. 마침 찾아갔을 때에 관계자 되시는 분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건물의 역사와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당시의 고문과 이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고 소 취하하는 것까지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홍난파 가옥은 교통편이 다소 불편합니다. 실제로 마을버스나 자가용이 아니면 한참을 걸어들어와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원래 목적이 이곳은 아니었는데 그냥 우연찮게 둘러본 곳입니다. 서울 여행이나 역사 여행을 하신다면 꼭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서울 성곽길, 경희궁 뒷편길을 따라 쭉 올라오면 딜쿠샤에 가기 바로 전에 만날 수 있는 홍난파 가옥입니다. 뒷편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바로 옆에는 기상관측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난파 가옥은 근대건축의 모양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담쟁이 덩쿨이 빨간 벽돌 사이사이로 덮고 있어 따듯한 느낌이 드는 집 입니다. 마치 옛날에 그림 그리라고 하면 이런 모양의 집을 그렸던게 생각이 납니다.  관계자 되시는 분의 설명에 의하면, 건물의 역사와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당시의 고문과 이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고 소 취하하는 것까지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건물 내부를 둘러보면 현대식으로 보이지만 기본 골격은 기존 그대로라고 합니다.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개인도 이 가옥이 너무 좋아 구조변경을 최소한으로 해서 지냈었다 합니다. 마루바닥은 원형 그대로입니다. 생전에 쓰던 여러 물품과 연대별로 장리해 놓은 팜플릿등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최대한 원형대로 해 놓고 있다보니 냉난방이 거의 안된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창문과 빨간 벽돌 집이 너무 예쁜데 달랑 유리창 하나라 겨울엔 찬기운이 들어오고, 여름에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내부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전체적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한바퀴 둘러보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꼼꼼히 ?펴 보시고, 얘기도 나누시면 좋습니다. 이곳 홍난파 가옥에서는 종종 음악회가 열리는 곳으로도 사용됩니다. 전체 50명 정도 앉을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면 20명 정도가 앉으면 꽉 찰 듯 합니다.

 

▶홍난파(洪蘭坡, 홍영우)

(1898년 4월 10일; 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

 

 

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화성군 수원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과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유경의 '문화산책']<19> 서촌 2 - 사직단에서 정조임금이 물은 것, 그리고 예술가들

기사입력 2012-02-03 오전 8:23:48

    
사직동에는 사직단이 있다. 조선왕조를 세우며 궁의 서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받드는 사직단을 두었다. 1908년 이래 제사를 폐했다가 1988년부터 되살아나 9월 셋째 일요일마다 사직대제가 거행된다.사직단 구역은 많이 축소되어 옛 그림에서 보이는 건물도 사라지고 지금은 2개의 담과 8개의 홍살문을 겹겹이 두른 사직터 만이 보존된다. 그 안에 화강암 장대석을 3벌로 쌓아올린 네모 반듯한 평면의 사(社)단과 직(稷)단이 나란히 있다. 단 주변 4방향에서 올라가는 계단도 3층이다.높이 1m, 사방 7.65m의 정사각형 단에는 황토 흙을 깔았다. 원래는 오색토를 깔았는데 자꾸 혼합되어서 아예 황토로 대체했다. 나쁜 기운을 제거하는 황토의 역할이 생각된다. 1980년 충남 은산별신제 때에도 집집마다 대문에 금줄을 치고 그 앞에 황토 흙을 소금처럼 뿌렸던 것이 생각났다. 황토가 이처럼 고전적으로 쓰이는 의례는 이런 제(祭)뿐인가 한다.

 

종묘제례와도 달리, 땅과 신위가 그대로 통하게 만들어진 사직단은 그 생김새부터 독특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와 직 두 개의 단에는 원래 위패처럼 밑부분은 네모나고 윗부분은 둥근 (天圓地方) 화강암 신위 돌이 황토 땅에 박혀 있었다. 석주(石柱)라고 한다.조선시대에 국사(國社) 국직(國稷)으로 불리던 신위가 고종의 황제국 대한제국이 되면서 태사(太社) 태직(太稷)으로 승격될 때 이들 과거의 석주는 땅에 묻고 태사 태직 신위는 새로 제작했다. 이때 사단의 국사 석주만큼은 다 묻지 않고 윗부분이 드러나 보이도록 해서 그 존재를 남겨두었다. 지금 사단 황토 땅에 남아 있는 천원지방의 돌이 그것이다.돌은 오래되어 보이고 윤이 나고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진다. 정조(재위 1776~1800)실록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정조 2년, 임금이 이곳에 들러 기물 등을 살피다가 '저기 사단(社壇)에 있는 돌은 무슨 돌인가?' 물었다. 책임자가'오례의에 사(社)가 있으면 석주가 있다는 글이 있는데, 단 위의 돌은 이를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정조대왕도 보통사람처럼 단위에 있는 그 돌이 궁금했었다!제례는 유교식이다. 평소 신위각 건물에 들어 있던 태사와 후토(后土, 태사의 배위) · 태직과 후직(后稷, 태직의 배위) 신위는 대제 때면 꺼내 제관들이 받들고 온다. 양 · 소 · 돼지 · 토끼 · 노루 고기 등이 날고기거나 장조림 되거나 삶아서 제물로 오르고 소금이며 곡식 · 떡과 술, 나물도 오래된 예법에 따라 올린다. 옻칠한 검은 그릇과 대소쿠리 그릇, 조각한 놋쇠제기가 쓰이는 것은 종묘대제와 같지만, 제수의 규모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제사를 총괄하는 집례가 창을 하듯 제사의 순서('홀기'라고 한다)를 지시하면, 조선시대 제복차림의 제관 수십 명이 그에 따라 움직이며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제물을 태우는 등 의례를 진행한다. 씁┒┠却? 쓰는 노란색과 구별해 사직대제는 서쪽을 상징하는 푸른색 헝겊으로 제상을 장식했다. 종묘대제의 축소판 같은 형식이고 붉은 관복 차림에 8줄로 맞춰 서서 추는 제례무인 일무와 국립국악원의 제례악 연주가 함께한다. 
 
사직단 옆으로는 단군성전, 황학정, 그리고 인왕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서울도성의 성벽이 이어진다. 홍석창의 단군영정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단군상, 서예가 김응현 손경식 글씨 등이 모여있는 단군성전은 서울시 보호문화재이다. 필운동 이 동네에서 살던, 선조때 임진왜란을 겪어낸 정치가 이항복의 글씨 필운대(弼雲臺)도 돌에 남았다. 조선시대 명랑얄개였던 이항복과 이덕형 두 신동 소년의 일화 배경도 이 부근인가? 황학정에는 고종 황제이래 지금도 활 쏘는 사람들이 모인다.오래된 역사가 켜켜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지역은 그러나 가뿐한 한나절 산책코스로 현대인에게 다가온다. 도시의 여유 한때인 하이킹을 즐기러 가는 이들이 계속 지나간다. 우연 같지 않게 사직동의 이들 유물은 하나같이 한국인에게 주어진 최초의 국가를 잊지 않으려는 의례와 함께 국가의 틀 안에서 영위되는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두 껴안고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여기서 시장과 집터를 이루고 지금까지 오래오래 살아간다.


근대사의 일면도 이곳에 있다. 사직단과 이웃해 있는 종로도서관에는 1920년에 최초로 종로3가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옆에 근대식 사설 도서관을 세웠던 황해도 장련(長連)부자 이범승(1887~1976)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종로도서관이 그 후신이 된 것이다.문화재청은 사직단 주변을 정비할 것아고 한다. 사직단에서 종로도서관이 이어지는 길에 볼품없던 담을 헐고 조선식 돌담을 쌓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며 사는 오랜 삶의 형태에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염지윤 씨는 "오래된 전나무가 저기 서 있는데 새로 쌓는 돌담에 어울린 풍경이 이곳을 근사한 길로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해요"라는 기쁨을 말했다.서촌의 오래된 역사에는 인왕산이 배태한 예술가, 지식인들의 활동도 있다. 권력자와 애국자들의 거처 흔적도 있는데 이는 또 다른 장에서 풀어갈 이야기다.옥인동 꼭대기 수성동(水聲洞) 기린교 있는 계곡을 보면 이 동네 시모임 옥계시사를 이끌던 천수경 등 이곳에 모이던 이들의 풍류와 시흥이 짐작된다. 1817년 김정희가 효자동 백송(白松)이 있는 자기 집에서부터 찾아와 합류하던 자리, 그의 글씨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 등이 남아 있다.

 

화가 정선(1676~1759)이 그린 '비 갠 뒤 인왕산 풍경(인왕제색도)'은 억세게 생긴 인왕산 바위를 마치 그 앞에서 쳐다보는 것처럼 그렸다. 비 온 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림에는 나무들이 많고 그 속에 집이 하나 있다. 이 집이 정선의 평생 친구 문장가 이병연의 집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우람한 바위는 지금도 자하문로를 지날 때 마주 보는 풍경이다. 다만, 몇 채의 옛집 대신 셀 수 없이 많은 건물이 가득한 오늘의 삶이다.또 다른 옥인동 풍경 그림들이 많다. 여러 화가들은 하나같이 서촌 사람들이 즐긴 풍류와 삶을 그림 속에 드러내 준다. 1970년대 이후 인왕산 깊숙한 곳에는 고급요정 선운각도 있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기업의 연수원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이 일대에는 현대의 예술가들 면면도 화려하다. 동양화가 박노수,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죽파, 많은 건축가 등이 산다. 시인 이상의 하숙도 있었다 하고 소설가 현진건은 부암동 안평대군 무계정사 터에서 살았다. 인왕산 기슭 청운공원에는 종로구청이 만든 '윤동주의 언덕'도 생겼다. '윤 시인이 누상동에서 하숙 살 때 이곳을 거닐며 시상을 다듬었을 것'이라는 설명 옆에 시 한 편이 새겨진 돌이 있다.

 

 

 
다음검색
댓글
  • 14.11.30 18:05

    첫댓글 단군은 우리의 국조 왜색종교의 반대 극복하고 우리의 얼 우리의 조상을 우리가 지킵시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