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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9장 1-7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요한복음 8장은 음행 중에 잡혀 온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여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난 뒤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면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물론 유대인 중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논쟁을 들으면서 그를 믿게 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 할 때 예수님의 계속되는 말씀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보면 결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음행 중에 잡혀 온 여자에 대하여는 용서하셨지만, 이 여자를 정죄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잡고자 한 바리새인들 혹은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정죄를 받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음행 중 간음한 여자의 외적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오히려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요한복음 9장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증거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것도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시는데, 이미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여 논쟁하신 내용을 살핀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이해 가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들 안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9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즉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면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맹인 된 자는 보게 하시지만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오히려 맹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본다고 생각하는 자로서 판단합니다.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죄하고 심판까지 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요, 유대인이라는 혈통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맡기셨지만, 말씀이 가리키는바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는 말씀까지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죄인 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죄인 취급하며, 또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하여 죄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먼저 1절과 2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으로 있는 사람을 보셨는데, 단순히 맹인이라고 하지 않고 날 때부터 맹인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눈 먼 것을 고쳐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인간의 치유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32절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만큼 맹인으로 난 자가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에도 의술이 있었지만 사람의 능력이나 기술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보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다면 그분은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존재해 계신 분(요8:58),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되(요8:54)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요8:42) 진리의 말씀을 전함으로 죄의 종으로 있던 자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요8:32), 참 사람이시지만 사실은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그의 능력으로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 질문은 적어도 모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34절로 가시면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아담의 타락 이후 누구도 예외 없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지금 바리새인들은 그런 보편적 의미보다는 특별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가 너로 하여금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 있게 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편적인 생각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불교라는 영향 아래 지금의 불행이 전생의 업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꼭 불교 영향만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에 대하여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혹은 내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 내 죄 때문에 내 자녀가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생각들은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죄의 결과는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낳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저들에게 고난과 고통의 형벌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부터 보시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그러나 모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죄의 결과인가? 욥기 1장을 보시면 욥의 고난과 관련하여 이런 내용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8절 이하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1:8-12) 적어도 이런 내용에 근거하자면 욥의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해서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짓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누구도 예외 없이, 예외가 있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으로 시작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로서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사실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과 같은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과 고통이 죄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 하시기를 죄 때문에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정리하자면 죄에 대한 벌로서 오는 고난과 고통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연단을 위한 목적으로 고난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고난과 고통, 어려움의 원인을 죄라는 틀에서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만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뜻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여기서 저들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첫 번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악한 비판자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악한 비판자가 되고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3절로 말하자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만 할 뿐 그 비판을 자기에게로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내린 벌처럼, 그리고 그 벌이 심각한 것처럼 부풀립니다. 똑같은 죄를 나와 다른 사람이 저질렀다고 할 때 자신은 로맨스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에 대해서든 머리를 조아려야 하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죄에 대하여 더 심각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류도 있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모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때로 연단을 위한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주기도 하시는데, 그런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고통이 죄와 전혀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원인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저들은 그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단을 위해서, 그런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 그런 거룩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주실 수 있지만, 그런 부분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질문을 조금 더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제자들은 맹인 된 사람이 날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임함입니까?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일단 모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죄 때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를 힘듭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극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그렇게 태어나야 하나님의 공의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금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할 때는 단순히 원죄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자신의 어떤 특별한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앞서도 말했지만 바리새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죄를 짓을 수 없는 상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자신의 죄보다는 부모의 죄에 무게를 싣고서 질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해는 율법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즉 지금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다고 할 때 그의 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결과된 것이 아닐까란 생각으로, 혹 그렇지 않다면 나기 전에 어떤 특별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인가란 의문을 가지고서 이 질문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저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입니다. 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의 생각, 그리고 이후에 나오지만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모든 고난과 고통의 원인이 죄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일체를 교정하십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교정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맹인이나 그의 부모가 죄로부터 자유롭다든가, 벌을 받은 만큼의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시작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1)라고 하는 말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질문한 것,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너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고난과 고통, 어려움의 원인을 무조건 죄 문제로만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우선 낮과 밤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낮에는 일해야 할 때이고, 밤에는 일할 수 없는 때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때인가? 낮이라고 말씀합니다. 낮이기 때문에 일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내셨고,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낮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모든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의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말씀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일하시는데, 그런 점에서 지금도 낮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찾아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보자면 개인적인 종말, 다시 말해 그의 생명이 마치는 그때가 밤입니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세상의 종말이 밤입니다. 그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때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인데, 그 일은 내가 세상의 빛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음행 중 잡혀온 여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난 뒤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위해 음행 중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까? 정죄하여 심판하기 위해서요, 더 나아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이 다니지 아니하지만 너희는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야지만 생명의 빛을 얻는데, 너희는 생명의 빛을 보기보다는 더더욱 어두움 가운데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복음 1장으로 통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요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그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요1:1-3). 그런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인데(요1:4), 이 빛이 어둠에 비치지만 어둠이 전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요1:5). 그만큼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이런 내용들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계신 일은 자신의 빛을 드러내시면서 그들 안에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었기 때문에 죽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저들이 영적으로 죽었는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았고,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단절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세상의 빛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빛 가운데로 나아와 어둠이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만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무엇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가?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는 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것은 우리의 영적 실상을 육적인 것에 담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음행 중 잡혀온 여자를 통해 나타내신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 잡아온 여자만 죄인이 아니라 너희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신 말씀이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나면서 맹인 된 자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나아가 바리새인들은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원인이 죄 때문인 줄 압니다. 물론 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한 비판자가 될 뿐이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판단을 할 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와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죄와 별개로 고난과 고통을 주실 수 있고, 또 이것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일을 나타내실 수 있는데, 이런 부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만 보지 못하는 자로 있는 게 아니라, 누구도 예외 없이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 지금 이 사람으로 하여금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자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억울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달리 극심한 어려움이 나에게 있다면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있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답답함을 토로하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억울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10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우리는 하나님 손에 들린 도끼와 같고 톱과 같습니다. 도끼, 톱이 주인이 아니라 도끼를 든 자, 톱을 든 자가 주인이십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때문에 여러분의 형편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있다 할지라도, 그만큼 고난과 고통, 어려움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은 결국 죄를 원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겸손하게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이런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통해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가 원인으로 있다면, 특별한 죄가 아닐지라도,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은 결코 억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죄와 상관없이도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주실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시는가?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교회 혹은 성도의 유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게 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또한 교회 혹은 성도에게 유익을 주십니다. 단지 육신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차원이라면, 그래서 영적으로 보지 못한 자가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치시는데, 6절과 7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참 사람임과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참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의 증거처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씀만으로도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난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일단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는데, 이것은 침이나 진흙 자체에 어떤 효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땅에 있는 흙을 눈에 바를 수 있는 진흙으로 만들기 위해 침을 뱉으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신 것은 날 때부터 맹인이지만, 그래서 볼 수 없었지만, 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 하여금 더욱 답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칼빈은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 그의 맹인 됨을 갑절로 더 맹인 되게 하신 것으로 설명합니다. 매튜 풀 주석도 보면 주님은 어떤 효능을 그 속에 지니고 있지 않는 수단, 아니 눈 먼 맹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기는커녕 도리어 잘 보는 사람의 눈까지도 못 보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그런 수단을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영적 상태가 철저한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의 답답함이 있습니다. 물론 이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롬1:23). 영적 맹인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로 채워가면서 그들 안에 있는 답답함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보기까지는 인간 안에 있는 근본적인 답답함, 보지 못함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본래부터 맹인이요,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심으로 그가 볼 수 없는 자임을 나타내셨지만, 그런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 못에 어떤 효능이 있기 때문에 거기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못이요,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의 못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가서 씻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비춰보자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내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 자신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분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그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 나면서 맹인 된 자는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은 더 이상 맹인이 아니라 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눈 뜬 자와 바리새인의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눈 뜬 자의 경우 단지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눈까지 뜬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 다시 말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임을 다시 한번 스스로를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대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 그리고 그 일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인 자들입니다. 얼마나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인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할 정도입니다. 캄캄함 가운데 빛을 비추면 어둠이 물러나지만 물러나지 않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철저한 어둠이요, 그 어둠은 단지 그들의 환경이 아니라 그들 안에 어둠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맹인 된 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 그런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 뜨게 하신 것입니다. 맹인으로 있던 우리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는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었지만, 그런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게 하심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고, 그런 은혜를 받은 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고백하고 증거 하는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눈을 뜬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은혜에 합당한 삶이라고 할 때는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가 바리새인과의 논쟁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증거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증거 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