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말씀 :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다툼(마태복음 20:17~34)
* 본문요약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수난예고를 하십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주의 나라에서 자기의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어서 세상에서는 권세가들이 자기의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있으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예수님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에
소경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그들이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떠지자 곧바로 주님을 좇았습니다.
찬 양 : 98장(새 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514장(새 459)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 본문해설
1. 세 번째 수난 예고(17~19절)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곁에 불러 놓으시고 길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거기에서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은 인자를 죽이기로 결의할 것이라(그들이 인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라).
19) 그리고 그들이 인자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인자를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19절) :
72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권이 없으므로
예수님이 유대에 파견된 로마 총독에게 넘겨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
2. 세베대의 아들들의 요청과 분을 내는 제자들(20~24절)
20) 그때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간청하였습니다.
21)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도록 명하여 주옵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였든지 그들이 앉게 될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20절) :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여동생 살로메로,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이스라엘을 회복하러 올라가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주께서 나라를 회복하시면
자기의 두 아들에게 그 좌우편 권세를 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의미합니다.
- 할 수 있나이다(22절) :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공명심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공명심으로는 결단코 이룰 수 없습니다.
-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23절) :
어떤 사람을 어디에 어떻게 쓰실 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것.
- 분히 여겼다(24절) :
두 형제와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께 간청하는 모습을 본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속으로 크게 분을 내며 그들을 바라봅니다.
이들 모두 세상의 욕망과 야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세 번이나 반복하신 수난의 예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25~28절)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자기 마음대로 내리누르고,
그 고관들도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거니와,
26)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노라.”
- 종이 되어야 하리라(27절) : 디아코노스
‘종’을 뜻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에서 교회 직분인 ‘집사’가 유래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교직자와 모든 성도들은 서로를 섬길 의무를 가진
디아콘(집사, 종)이 되어야 합니다.
4. 두 소경을 치유하시는 예수님(29~34절)
29)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30) 소경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31)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32)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을 민망히(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곧 보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 여리고(29절) :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27km쯤 떨어진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해저 250m의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있는 도시로
예루살렘과의 고도차가 무려 1,000m나 됩니다.
여리고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들이 사마리아를 피해서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를 지난 후 마지막으로 거치는 정류장 같은 곳입니다.
- 두 소경(30절) :
마가복음 10:46에서는 두 소경 중의 한 사람이
바디메오의 아들 거지 바디매오’라고 말합니다.
* 묵상 point
1. 고난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
1) 고난의 자리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17~19절)
이미 두 차례나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난의 예고를 하시면서
고난의 자리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이번의 예고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는 것과
제 삼 일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고난의 자리일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으나,
주께서 그 일을 하시지 않으면 세상 만민이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아셨기에
그 고난의 현장으로 가십니다.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아시고 계셨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그 고난의 현장으로 가십니다.
2)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기 위해 친히 그 고난의 자리로 가시는 예수님(9~10절)
예수님은 이 포도원 일꾼의 비유의 결론인 한 데나리온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일을 이룰 수 없기에 예수께서 대신 우리의 죄 짐을 지셔서
원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천국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십니다.
주께서 고난을 받으셨기에 우리같이 허물과 죄가 많은 자도
감히 천국을 바라고 사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 포도원에 남아 있는 자라야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 만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열어주신 그 믿음의 길로 걸어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1~16절의 포도원의 비유에서 마지막 저녁 6시에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주는
그때까지 그 포도원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준 것처럼,
주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신앙의 일들을 계속 하십시오.
육신의 일도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매일 반복하는 이런 일들을 통해
그 육신의 생명과 건강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의 건강도 매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기도를 하여 좋은 영적인 호흡을 하고
봉사와 섬김으로 좋은 영적인 운동을 계속 함으로 우리의 영이 그 건강을 유지합니다.
이미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일을 쉬지 말고 계속 반복하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녁 6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주었던 것처럼,
주께서 영생의 나라를 선물로 주십니다.
2.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열정
1)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하시는 주님 앞에서 자리다툼하는 제자들(20~24절)
이렇게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의 예고를 하시면서
고난의 자리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여 가실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인 살로메(예수님의 육신의 이모)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자기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합니다.
그러자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속으로 분을 내며 이 광경을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해 그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계신데,
제자들은 지금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간적인 의욕만으로 신앙의 열매를 이룰 수 없습니다.(22절)
➀ 그 고난의 잔을 다 마시겠다고 했으나, 몇 날이 못 되어 혼비백산 도망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께서 지금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잔이란
이제 곧 주께서 당하시게 될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 있고도 당당하게 그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몇 날이 못 되어 주께서 수난을 받으실 때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합니다.
➁ 그들이 거짓으로 고백한 것은 아니었으나, 공명심에서 나온 허망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실 때 두 사람은 정말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거짓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이 진심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열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공명심에서 나온 열정이었기 때문입니다.
➂ 그 공명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애’가 있습니다.
그들이 말로는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고백했으나,
그 마음에 공명심을 담고 있는 한 그들의 중심에는
아직도 ‘자기 사랑’과 ‘자기애(自己愛)’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고백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과 ‘자기애’에 도움이 되지 않는 흔들리는 상황이 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 묵상 :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열정어린 대답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영광의 자리만 보고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난은 보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영광만 꿈꾸는 자들은
결단코 주님이 주시는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헌신과 열정은
본문의 야고보와 요한의 열정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살펴봅시다.
나를 위한 열정인지 주님을 위한 열정인지 자신을 점검하여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참된 열정을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3.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권세
1) 세상의 권세는 자기 백성들을 내리누르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권세(25절)
세상의 권세는 그 권세를 가진 자들이 자신이 가진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부립니다.
그 권세로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자기 마음대로 다스립니다.
세상의 권세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세를 가진 본인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권력의 사유화’라고 말합니다.
그 권력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권세는 사랑하며 섬기는 권세(26~28절)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사랑하고 돕고 섬기기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는 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 묵상 :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님(28절)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도 이 땅에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땅과 하늘의 왕의 권세를 가지셨으나
그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지금 고난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다릅니까?
주께서 그 권세를 우리를 돕고 섬기는 데에만 사용하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권세를 가지신 이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
그래서 그 권세를 오직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 사용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섬기신 것처럼
당신도 내가 가진 힘과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려 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힘을 남에게 과시하려 할 때,
그 힘의 권세를 당신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사용하려 할 때
바로 당신 자신이 주께로부터 거절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4. 여리고를 떠나신 예수님
1)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오신 예수님(29절)
여리고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들이 사마리아를 피해서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를 지난 후 마지막으로 거치는 정류장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고속도로의 마지막 휴게소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29절에서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셨다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매우 가까이 와 계신 것입니다.
2) 그러나 고난을 향한 그 발걸음을 전혀 멈추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전혀 주저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힘찬 발걸음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받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셨던 주님,
그래서 주님은 고난 받으러 가시는 발걸음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도 바쁜 걸음으로 재촉하여 가셨습니다.
5. 간청하여 부르짖는 두 소경
1) 소경 두 사람의 부르짖음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30~34절)
주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실 때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두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들은 더욱 소리를 높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쳤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눈 뜨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니 곧 눈이 떠졌습니다.
2) 주께서 그들을 민망히 여기시고(34절)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살과 내장이 떨릴 정도로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이제 곧 당하실 십자가를 생각하시며
우리와 똑같이 고통과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시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상태에 있으시지만,
두 소경을 보시고 살과 뼈가 떨릴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돕고자 하십니다.
● 묵상 :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뜨거운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당신의 문제가 무엇이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주께 간절히 기도하면
주께서 들으십니다.
우리를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주님께 당신의 문제를 간절히 아뢰십시오.
주님은 언제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무리의 꾸짖음에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르짖은 두 소경처럼
주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6. 두 소경을 꾸짖는 무리들
1)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31절)
그러나 예수님이 이 두 명의 소경을 보시고 민망해 하셨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소경들을 꾸짖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겉모습만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이 되실 것을 기대하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될 새 나라에서
자기들이 어떤 권세를 갖게 될지 잔뜩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소경이 소리를 지르니 시끄럽다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의 허상만 쫓고 있는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고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않고,
예수님의 능력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의 삶에 큰 기적 같은 복이 오기만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오직 자기의 만족, 자기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께 기도를 해도 자기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부르짖을 뿐입니다.
● 묵상 : 우리는 이런 방식의 신앙을 ‘기복신앙(祈福信仰)’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이란 뜻이 ‘하나님께 복을 비는 신앙’이란 뜻이니
뜻 자체로 보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의 복만을 구하는 신앙이니 문제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무리들처럼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꾸짖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으로 교회는 크게 부흥했으나,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만 구하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 건강한 신앙 인격을 갖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 예수님을 따르는 바디매오
1)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곧 보게 되었고(34절)
예수께서 두 소경의 눈을 만져주시자 곧 눈이 고쳐졌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즉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위의 3번에서 보듯 기복신앙으로 생각 없이 주님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은 바디매오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바디매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바디매오는 초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여기에서도 우리는 기복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문둥병이 고쳐진 후 예수께 나오지 않았던 9명의 사람들처럼
눈이 고쳐진 후 곧바로 자기들의 삶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기복신앙이란 그렇게 처음부터 자기의 문제가 고쳐지기만을 바라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묵상 :
이제 우리는 이 소경들처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참 신앙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 바로 그분을 주목하며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호주머니에 있는 것에만 관심 갖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 바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정말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점검하여보십시오.
주님입니까? 주님의 도우심입니까?
* 기도제목
1. 우리를 위해 스스로 고난의 자리를 향하여 가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2. 주님이 먼저 우리를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피차에 서로 사랑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3.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온 몸을 다 바치신 주께
우리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섬기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