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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
- 『산림문학』 여름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수필의 가치 척도는 여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형상적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의 낯선 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지배적 정황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체험 –해석 –형상화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게 수필의 운명이다. 아마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참신한 의식이 작품 속에 넘실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진설의 <파마>, 옥형길의 <인거장>, 이문자의 <4월, 불손한 계절인가>, 장은재의 <나무 입양>은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다. 분석 대상으로 선정된 네 편의 엄선된 글들은 모두 ‘어떤 태도로 삶을 만나는가’라는 문학의 형식에 부응하는 수필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김진설, 옥형길, 이문자, 장은재 등의 작가는 삶이라는 보편적 현실과 체험이라는 구체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의식적으로 메우려 노력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삶의 문제에 맞닿아있는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만난 문학혼을 어떻게 수놓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수필의 숲에서 만난 생의 연금술이 지닌 힘이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Ⅱ.
인간에게 있어 삶의 원초적 동기는 정에서 출발한다. 글이 정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정이 글을 낳는 것이다. 인류애, 자연애의 바탕에는 언제나 정이 녹아 있게 마련이다. 인간을 가장 절대적 존재로 인정하게 하는 바탕이 정이다. 그래서 정이 바탕이 된 글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는 것이다. 제재를 이루는 모든 재료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서 수필은 시작한다. 일상 생활 속의 이야기를 질박한 목소리로 들려주면서 하나하나의 유무생물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서 소박한 문체로 문장을 산뜻하게 배열해야 한다. 솔직함에는 따뜻한 인간애 그리고 겸허한 서민의식이 질펀히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삶이 변하면 문학의 형식도 변한다. 자연과 멀어져 있는 생활 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의식을 불어넣어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작가들은 경험의 결과로 얻은 자연과의 교감을 화소로 해서 수필을 쓴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려고 하지 말고 작가만의 특별한 관점이나 해석을 존재론적 형상화, 즉 구성적 비유의 시적 의미화로 풀어내어야 한다.
김진설의 <파마>는 새로움에 도전하는 작가의 네오필리아가 빛나는 작품이다. 수필의 한 축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수필을 통해 자기를 응시하고, 나아가 성찰을 도모한다. 종국에는 후반기 삶을 바로 세워 그 중심에 서고자 한다. 이러한 성찰적 태도야말로 김진설의 가장 큰 자산임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수필에서는 자기 고백적 반성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결여되면 진정한 독자와의 공감대가 생기지 않는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수필이라면 김진설의 글은 이런 조건에 아주 부합한다. 변화의 풍경에 담긴 작가의 수필 <파마> 안에는 성찰하는 작가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표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주는 도전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교장 선생님의 드레스코드가 상식을 깬다면, 그 자체가 혁신이다. 이 수필은 충분한 사고와 선택의 여과 과정 속에서 진솔한 자기 노출의 호소성이 있어 성찰의 글로써 수필의 향기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를 시간의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데 반해 작가는 하루의 가치를 변화에 두고자 한다. 기존의 습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의 특성은 이 수필의 가장 강한 매력이다.
정념퇴임을 얼마 앞둔 교장으로 초등학교에 봉직하고 있는 작가가 ‘파마’를 하기로 한 결정의 배경과 변화 후의 긍정적인 평가에 고무되어 있는 모습이 비교적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는 이 수필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은 네오필리아다. 시대가 변화고 의식이 바뀌어도 전통이나 관습을 깬다는 것에는 작가의 말대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보수성을 가진 교육계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작가는 교장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켜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세대까지는 되지 못해도 변화에 발은 맞춘다는 소리 정도는 듣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그러고 보니, 김진설은 다 태우지 못한 삶의 갈망들이 들끓고 있는 작가라 하겠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용기가 흐르는 작가다. 이 수필에는 일상에서 꽃피우는 변화의 소중함과 용기의 필요성이 수놓아져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수필은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관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변화의 당위를 중심으로 주제의식을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충돌하는 현대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가. 지행일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수필의 쾌미는 그 변화의 욕구를 ‘파마’라는 제재로 풀어나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맛볼 수 있다.
옥형길의 <인거장>은 당숙의 톱을 제재로 쓴 수필로 세상의 변화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사례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 피해자가 바로 옥형길의 당숙이라는 데서 슬픔은 더욱 커진다. 옥형길은 항상 좋은 수필을 써서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려내는 일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일이다. 옥형길이 당숙의 이야기를 수필화한 이유는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 모습까지 가감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자아로서 현실 세계와 마주 서고자 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작가의 당숙은 목수간에서도 도목수급의 노련한 ‘인거장’이었지만, 재래식 목수간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 조선소가 세워지면서 그 단단한 자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문명의 가속도에 저항감을 느끼게 한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실업자가 되고, 나중에는 조선소 잡부로 생계를 이어갔다는 당숙 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부분, 스토리의 뒷면을 잘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가슴 아리게 한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은 유의미한 글이다. 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가 가져오는 비인간화,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고자 한 이 수필은 여러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옥형길의 수필을 읽으면, 그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는 삶의 이면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속성을 잘 파악하여 전면에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유익하다고 하겠다.
수혜자가 있으면, 피해자가 있게 마련인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이분법에 의해 현대적 삶은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삶의 변증적 법칙을 ‘당숙은 좋았던 당신의 날들을 추억하며 맥주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벌떡벌떡 마시곤 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그 해고된 날 이후 당숙의 아픈 정서를 ‘벌컥벌컥’ 이란 의성어로 잘 의미화하였다. ‘맥주컵의 소주’는 그 어떤 장치보다도 당숙의 좌절과 비애를 잘 전달하는 메타포 역할을 한다. 그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바꾸며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못 보는 현실에 다가감으로써 작가는 튼튼한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삶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변화의 법칙’이다. 이런 원리를 작가는 결말부에서 “당숙의 손때 묻은 인거만이 돛배 자루에 넣어진 채 고방의 빈집 벽에 매달려 있었다. 고방지기 거미는 해마다 새 줄로 큰 톱이 든 자루를 칭칭 동여매고 있다.”는 ‘맥주잔의 소주’보다도 더 센 의미화로 지배적 정황을 만들어놓고 있다.
이문자의 <4월, 불손한 계절인가>는 올 4월에 집중된 산불 피해의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그리고 있는 수필이다. 사시사철 청량한 솔바람이 어울리던 곳이 미친 불춤에 잿더미가 되고 만 상황에서 그녀는 혼비백산 불속을 뛰쳐나와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울음을 토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글의 시작을 연다. 자그만치 축구장 530여 개를 쓸고 간 화마의 횡포에 가슴이 저리는 건 작가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현실을 수필화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체취에서 풍기는 향기를 더해주는 글이다.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한 그루의 소망을 심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겠다고 한다. 산림녹화를 위해 솔선수범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은 산림문학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작가의 진술처럼, 희망을 버리자 말자는 말과 함께 하늘과 땅이 우리의 산을 살려내리라는 믿음은 언제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은 힘의 문학이다. 그 힘은 작가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희망을 주는 말로부터도 나온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지만 검댕이로 주저앉은 산림에 다시 희망을 건다.’라는 이 대목이 힘을 가지는 것은 ‘희망’이라는 말이 내면성의 견고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산불이 4월에 집중되어 일어났다는 데서 착안되었고, 메시지는 산불 예방을 위해 우리 국민 모두가 산불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 포커스를 두고 있다. 결연한 마음의 자세가 우리 민족성에 대한 자각과 잘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명제가 빛나면 문학성은 빛을 잃게 되어 있다. 마지막은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서정적 묘사를 통해 비유적으로 주제의식을 간접화했으면 좋았으리란 생각이다. 하지만 산림문학인으로서 산림녹화 50년에 대한 평가나 산불로 한데로 나앉은 이재민들의 한숨소리를 들려주는 등 무엇보다도 물적 인적 손실의 양면을 보여주면서 제재를 통해 주제를 우려내는 솜씨의 탁월성이 수필가 이문자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하겠다. 화마의 피해자들을 언급하면서 그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게워내는 듯한 산불피해 상황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이 작품을 읽으면, 눈앞의 사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산불을 예방하는 일이 최우선이기에 오천만이 눈에 불을 켜야 한다는 데서 그녀가 얼마나 산림을 사랑하는지 알 수가 있다. 산림이 없는 국토는 무의미하다. 무조건적인 산림사랑은 애국이다. 이문자의 산림사랑 이야기에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평자 역시도 산림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더 일깨워 주고자 한다. 유난히 산불이 많았던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장은재의 <나무 입양>은 생태적인 수필이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나무를 베는 사람과 나무를 심는 사람, 죽임과 키움, 물질적 욕망을 채우는 것과 정신적 건강을 얻는 것, 생명경시와 생명존중 등의 산림과 관련된 가치가 이분대립항으로 제시되면서 시작된다. 장은재는 공직에 있을 때 자연보호 업무를 담당했던 공무원이었다. 퇴직하고 내친 김에 시골에 땅을 사서 손바닥만 한 어린 나무를 호미로 땅을 파서 심었다고 한다. 그는 땅에 나무를 심는 일을 가슴에다 미래를 심는 걸로 의미화한다. 입양하여 보살피고 키운 보람으로 시골에 산 땅이 식물원이 되었다는 얘기로 그는 자연은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비유에서 나온다. 장은재는 반려견에 대립되는 반려목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자연사랑의 가치를 의미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문학적 성과는 결말부에 있는 “반려동물처럼 매일 먹을 것을 주지 않아도 좋다. 그들 때문에 여행을 가느니 가지 못 하느니 하는 일도 없다. 보채거나 성가시게 하는 일은 더더구나 없다”라는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이 수필에서 우리는 순리와 순명이 강조되고 있는 부분도 눈여겨봐야 한다. 작가는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나무나 꽃을 본받고 나무나 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주로 자연을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어디까지나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한마디로 질서의 융합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자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장은재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수필의 문학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중요한 문학적 성과는 식물과과 동물의 비교이며, 이를 통해 작가는 반려동물과 대칭되는 반려목이라는 개념을 빌려와 자연보호라는 미래적 가치를 확고히 구축하였던 것이다. 작가의 무의식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반려목은 영혼의 안식처요, 그 안의 절대적 존재자라 하겠다. 왜냐하면 그의 황혼기를 즐겁게 채색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
위에 언급된 수필은 전부 인간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진설의 <파마>나 옥형길의 <인거장>은 변화의 욕구를 중심으로, 이문자의 <4월, 불손한 계절인가>, 장은재의 <나무 입양>은 자연보호를 중심으로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 장은재는 식물을 반려목으로 수용하는 성숙한 의식을 드러내 보인다. 한 가지 사물을 사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보여주는 정취 속에서 자연의 외경을 느끼며, 자연이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음을 파악하고 자연 순응적 삶을 추구하려는 사상이 녹아 있는 작품들은 하나 같이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고, 또 인간이 돌아가야 할 최후의 안식처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런 자연관을 보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연륜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간의 원초적 삶의 현장이자 순수서정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시골을 축으로 해서 따뜻한 가족애와 인간애가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수필이 감동을 주었다. 반면에 변화의 욕구에 따라 스스로 변화의 중심에 서서 행복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변화에 따라가지 못해 비참하게 되는 역전의 삶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감동의 대목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인거장>의 결말부 의미화 대목이다. 우리에게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대지는 영원한 모성이다. 그 흙 위에 집을 짓고 생활하며 결국에는 흙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우리 인생이다. 변화를 따르며 자연사랑을 실천하는 이런 작가가 우리 산림문학회 내에 있음으로해서 우리는 늘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도 자연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권대근
수필가, 번역가, 문학평론가, 월간 <동양문학> 등단 후 <경북신문>,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수필은 사기다> <현대수필문예창작론> 등 19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pen문학상 외,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사)한국산림문학회 회원, 한국세계화위원회 위원장,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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