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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잠비아
2012.4.7.토.
밤새 잠을 자기 어려웠다. 미국 젊은이 들이 대거 몰려 온 탓인지 밤새 시끄러웠다. 술을 마시고, 남녀 젊은이 들이 떠들어 대는 통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결국 새벽 2시가 못되어 일어나, 짐을 꾸리고 밖에 나와 5시 까지 택시를 기다렸다. 그저께 만나 약속한 택시가 정확하게 5시에 와서 나를 태우고 버스 정류장으로 태워 주었다. 새벽녘에 약속을 지킨 젊은 기사가 고마워 40쁄라(원래 30쁄라를 주기로했었다)를 주었다.
67쁄라를 주고 봉고차 보다 조금 큰 차를 탔다. 출발시에는 빈자리가 많았지만 중간에 사람들이 타기 시작해 작은 차속에 20여명이 빼곡히 앉아 가게 되어 여간 고역이 아니다. 하여튼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5시반에 출발한 프란시스타운 행 차는 9시에 나타(Nata)에 정차를 했다. 여기에서 프란시스타운으로 가는 사람은 바로 가게 되고 카사네(Kasane)로 가는 사람은 차를 갈아 타야 한다.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겸 점심을 먹고, 한참을 기다리니 10시반 경에 카사네행 봉고 버스가 도착을 한다. 62쁄라를 주고 탄 차는 역시 짐짝처럼 사람들로 빼곡하다. 작은 의자와 많은 승객, 그리고 짐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날씨도 더운데 앞에 앉은 젊은 여자는 2개월 짜리 아기를 안고 와서 창문을 못 열게 한다. 아기는 울어 대고 자리는 한없이 비좁고 힘든 버스(봉고) 이동이었다. 3시경에 차가 카중굴라 잠비아 국경에 멈쳐 서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왕 국경까지 왔는데 잠비아로 바로 넘어 갈것인지, 쵸베국립공원과 세계에서 코끼리가 가장 많다는 카사네로 갈것인지 생각을 하다가 순간 보츠와나를 빠져 나가고 싶은 생각에 잠비아로 넘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보츠와나 출국장에서 한국인 수녀님을 만났다. 8년째 이곳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머물고 있으며, 이곳에서 종신 선교하기로 서약을 한 모양이다. 자그마하고 참한 수녀님은 한국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는지 쉴새 없이 얘기를 하면서 정보를 주려고 애를 선다. 덕분에 아름다운 잠베지 강을 사진찍는 것을 놓쳤다. 지금 보니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 아쉽다. 잠베지 강에서 배를 타고 건너니(배삯은 무료), 잠비아 입국장이다. 국경에서 비자를 발급해 주는데 너무나 쉽다. 50달러를 주고 작은 종이에 간단히 인적사항등을 적어주니 비자를 발급해 준다.
##잠비아 가는길
수녀님과 택시를 타고 리빙스톤으로 가기로 했다. 택시는 승객이 다 차야 가는데 언제 까지 또 기다려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수녀님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기사더러 내가 택시비를 다 낼테니 가자고 했다. 국경에서 시내까지는 꽤 먼거리(60km)였다. 졸리보이스(Jolly Boys)백패커스앞에 나는 내리고 15만 콰차(약 3만원)를 기사에게 주며 수녀님을 숙소로 모셔다 주라고 기사에게 말해 주었다. 이정도 돈이면 이 기사는 보름동안 식구들과 먹고 쓴다고 수녀님이 말해주었다. 수녀님은 한사코 택시비일부를 내게 주려고 하다가 내가 거절하니, 택시비로 절약한 돈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알고 보니 오늘이 부활 전야였다. 이상한 인연을 하느님께서 내리셨는지...(아내에게 문자를 보내니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반긴다)
보츠와나에서 사파리등 액티비티를 안한 탓에 돈이 400쁄라가 남았는데 국경에서 환전하니 28만 콰차정도를 주어 그돈으로 택시비를 해결한 것 같다. 이곳 졸리보이스에 오니 빈방이 없다고 한다. 종업원 말로 더블룸 하나가 남았는데 40달러를 달라고 한다. 시간은 5시가 넘었고, 몸은 이미 지쳐 힘도 없다. 별로 먹은 것도 없고...일단 오늘 하룻밤을 더블룸에 자고 내일과 모레는 4인용 도미토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도미토리는 19달러(1박)로 계산한다. 아프리카가 결코 값싼 여행지가 아닌것 같다. 일반 서민들은 가난하게 살지만, 여행지의 숙박비나 액티비티 비용등 물가가 장난이 아니다.
이상하게 먹은 것이 별로 없는데도 먹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곳은 보츠와나 보다 덥다. 갈증에 맥주만 3병을 시켜 마시고, 잠비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현지인(잠비아인)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정부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20명을 자기가 봉급도 주고 일자리도 제공해 주는데 정부는 해 주는 것도 없이 돈만 뺏어 간다는 것이다. 데모라도 할 것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아프리카 정부는 많이 부패해 있다고 하는데 현지 사람의 실감있는 얘기를 들으니 실감이 났다. 현지 신문에도 자주 1면에 부정부패(Coruption)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2012.4.8.일
아침을 6시경에 먹었다. 누룽지와 미역국을 섞어 끓였더니 먹을만 하다. 이곳에서 돈을 주고 밥을 사먹으면 편한데, 서구식을 가미한 음식으로 그 양을 나는 감당하기 어렵고 싫다. 귤을 한쪽 먹고 6시 반경에 숙소를 나와 시내를 어슬렁 거렸다. 일요일이고 이른 시간이어서 인지 길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졸리보이스 백패커스 숙소 바로 앞에 리빙스톤 박물관이 있고 동상도 있다. 박물관은 리빙스톤과 관련된 물품등이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가보기로 하고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빅토리아 폭포를 처음 발견한 리빙스톤을 기려 이곳 지명도 리빙스톤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참을 걸어 가다보니 성 데레사 성당(St.Theresa's Catholic Church)이 나왔다. 아침 미사를 7시에 한다고 하니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성당에 들어 갔다. 이곳 아프리카인들과 백인 서너명이 앉아 있다. 신부님은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 강론을 하시고 믿음을 강조하셨다. 도마 성인이 예수님을 보고서야 부활하심을 믿었다는 얘기도 하는데, 신부님의 강론이 조금 길었다. 영어로 강론하셨는데 귀를 쫑긋거리며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서도 놓친 부분이 많았고, 이렇게 열심히 강론을 들은 적이 있는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미사 말미에 서로 평화의 인사로 악수를 교환했다. 이곳에 와서 부활절 미사를 보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제 카사네로 가지 않고 잠비아로 바로 넘어 오고 또 우연히 한국인 수녀님을 만나게 된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숍 라이트(ShopRite)가게가 가까이 있어 들어 가서 계란(6개), 포도주 1병,쇠고기, 생선절임(작은 생선), 헤어젤리,팩우유,토마토 등을 사니 약 79,000콰차가 나와 신용카드로 결제를 했다. 가게안에 달러 교환소가 있어 어제 이곳 숙소에서 계산시 받은 1달러 짜리를 포함하여 162달러를 환전했다. 1달러대 5,150원정도로 쳐 준다. 주로 화폐가 5만콰차,2만콰차,만콰차,5천콰차, 천콰차 단위로 되어 있어 생각보다 돈의 양이 많지는 않다. 그냥 편하게 5천콰차는 1달러, 우리돈 천원으로 생각하고, 5만콰차는 10달러, 우리돈 만원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만난 수녀님 말씀이 이곳 사람들의 에이즈 감염율이 70%가 넘는다고 한다. 정부 발표는 50%라고 하는데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어제 버스에서 만난 승객 20여 명중에서 14~5명이 환자라는 얘긴가? 약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일상의 접촉으로는 감염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말라리아약을 먹을 때(일요일마다 1정)가 되어 먹었다. 만약 감기증세 같은 것이 있으면 아프리카 현지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의료 시설이 좋다고 해도 말라리아에 관해서는 이곳이 한 수 위인것 같다.
많은 사람 들이 오고 가고 일부는 풀장 근처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저들 처럼 편안히 휴양을 즐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작년에 사위와 괌여행을 갔을때도 편히 쉬고 있는것이 오히려 불편했었다. 나는 어차피 배낭여행 체질인 모양이다. 어제 묵었던 더블룸에서 도미토리 방으로 바꿔 주었다. 4명이 함께 사용하는 방으로 그야 말로 잠만 자는 용도 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2만원 가까운 돈을 받다니 어이가 없다. 한 백인이 자고 있어 가방을 던져 놓고 밖으로 나왔다.
리빙스톤 박물관에 가니 현지인은 2,000콰차(400원)인데 외국인은 5달러(5천여원)정도를 받는다. 초라한 박물관이었다. 인류의 기원을 아프리카 그것도 잠비아에서 찾고 있었다. 시골 박물관처럼 초라하게 꾸며 놓았는데 리빙스톤 전시실도 별도로 마련해 놓았다. 그는 젊은 시절(28세)에 선교 목적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 탐험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남.중부일대를 찾아 다니며 죽을때 까지 아프리카에서 지냈다. 많은 서구인들은 어떤 한 개인이 미지의 세계를 찾아 그곳에서 모든 삶을 바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마 서구인 특유의 교육관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닐런지...우리도 자식을 품에 안고 있을려고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밤낮없이 도서관, 학원, 학교만 뱅뱅도는 젊은이가 과연 사회와 인류를 위해 어떤 공헌이 될 일에 청춘을 바칠지 의문이다. 돈만 많이 버는 직업을 찾아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젊은이가 많은 국가나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닐가? 집을 떠나 며칠만 지나도 향수병에 걸릴 지경인데 요즘 처럼 통신이나 연락 수단도 없는 시절에 아프리카 오지를 떠 돌아 다녔다는 것에 대해 존경스런 마음이 일어 난다.
2012.4.9.월.
어제는 종일 시내를 돌아 다니며 음식물도 구입하고, 이곳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고 쉬었다. 숙소에 있는 바(Bar)에서 파는 맥주 한병이 8,000콰차(1,600원)인데 보츠와나의 숙소에서 사 먹은 맥주 값에 비하면 매우 싼 편이다. 더블룸에서 혼자 지낸후, 4인룸으로 옮겼는데, 독일에서 온 청년이 한명있었다. 그는 종일 잠을 자다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간에 일어났다. 다행히 이방을 우리 두명이 사용하고 있다. 저녁에는 이곳 잠비아 전통 4인조 악단이 와서 30분 정도 공연을 하고 돌아 갔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 났다. 5시경에 계란을 삶고 우유와 미역국을 먹었다. 어제 저녁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해 멱었었다. 고기값은 오히려 여기가 싼 것 같다. 3~4천원이면 충분한 스테이크 음식이 나온다. 토마토와 약간의 야채를 곁들이면 훌륭한 음식이 된다. 식사후에는 운동삼아 바깥을 한바퀴 돌고 왔다. 이곳 리빙스톤은 비교적 안전한 것 같다. 관광지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곳은 도회지라기 보다는 시골 풍의 마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제 이곳 종업원은 잠비아의 수도인 루사카는 조심하라고 일러 주며, 돈이나 중요한 것은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을 말해 주었다. 지금 시간은 아침 7시 10분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기위해 바깥 의자에 앉아 있다. 오늘은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하러 가는 날이다. 이곳 숙소에서 매일 버스가 10시에 무료로 운행을 하는데 하루 14명의 인원을 태워준다고 한다. 돌아 올때는 각자 알아서 올 일이라고 한다.
날이 더워서 인지 어제 낮에는 이곳 풀장에서 사람들이 수영을 했다. 아침에는 어린 학생 두명이 아침 일찍부터 풀장에 뛰어 든다. 같이 온 동행자도 없고 한국인이나 동양인을 만나기 힘든 이곳에서 홀로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이다. 이곳은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위해 유럽인 들이 가족 단위로 많이 오는 것 같다. 부부가 자녀 들을 데리고 온 모습이 많이 보인다. 내 방의 독일 젊은이는 아직도 자고 있다. 내일은 루사카로 넘어 갈 예정이다.
이곳 전통 목도리를 75,000콰차(약 1.5만원),에 샀다. 손수건을 잊어버려 불편했는데, 쌀쌀한 날씨에는 목에 두르고, 더울땐 땀도 닦고 필요 할 것 같아서 샀다. 10시에 14명의 승객을 빼곡이 태운 숙소 봉고차가 약 20분을 달려 빅폴(빅토리아 폭포를 줄여 부름)에 내려 주고 떠났다. 입구에서 20달러를 내고 한 시간여를 걸어 다니며 폭포를 감상했다. 얼마전에 이과수 폭포를 보고 와서 그런지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나이아가라 폭포나 이과수 폭포 보다는 보다 야생에 가까운 아프리카 특유의 폭포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사전에 획득한 정보에 따라 길을 따라 걸으면 버스 정류장이 나올줄 알고 한참을 걸었다. 걷다가 자신이 잠비아 전통 뮤지션이라는 친구를 만나 같이 20분이상을 걸었다. 그는 리빙스톤시내 까지 걸어 간다는데 그와 같이 걸었다가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 속에 족히 몇 시간은 걸릴것 같아서 버스 정류장도 놓친 나는 뒤 쳐져 한 참을 더 걷다가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로 돌아 왔다(버스 정류장 표시는 없고 기다리다가 손을 들고 타는 것 같다). 처음에 3만콰차(6천원)를 달라고 했지만 만오천 콰차(3천원)에 타고 왔는데 거리로 따져 보면 정당한 가격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 땀을 엄청나게 많이 흘렸다. 오자마자 맥주 두병을 마시고 샤워를 했다. 내일 떠날 준비와 일정을 점검했다. 인터넷이 어렵게 연결(와이파이 1시간 사용료 2천원)되어 친지들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사진 전송이 안되고 접속이 자주 끊겨 간단한 근황만 전해 보냈다.
일본인 커플이 오늘 오후에 이곳에 들어 왔다. 짐바브웨에서 오는 길인데 잠비아를 거쳐 비행기로 남아공으로 갈 예정이란다. 이것 저것 친절하게 알려 줬는데 남녀 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30대 후반 부부 처럼 보이는데 모습이 너무 누추해서 같은 동양인으로서 오히려 내가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배낭여행은 어쩔 수 없이 럭셔리한 복장을 할 수는 없다.
여행지에서 그러한 복장이나 비싼 장신구(반지,목걸이등)는 도둑이나 강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가급적 편하고 질기면서 색상은 튀지않는 무난한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도 나는 ‘한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힐 정도의 용모는 하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전기 연결 코드는 남아공,스와질랜드,보츠와나와는 또 다르다. 구멍이 세 개 인것은 같은데 크기가 다르다.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온 멀티 잭이 연결된다. 남미여행시에도 나라마다 달라서 가는 곳 마다 연결 잭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 그때 쓰던 것도 다 가져 왔는데, 혹시 다음 국가에서 쓰일지 모르겠다.
샤워를 했는데도 덥다. 보츠와나에서는 그늘에서는 서늘했는데, 여긴 그늘에 앉아 있어도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맥주를 한병 더 마시고 있다. 매일 맥주를 마시지만 독주가 아니어서 그런지 숙취는 전혀 못 느끼겠다.풀장에 뛰어 들어 수영을 하고 있는 젊은이 들이 부럽다. 한 곳에 3일 이상 있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다. 바삐 어디론가 또 움직여 떠나야 하는데 애초 계획을 너무 느슨하게 잡은 탓 일런지? 젊은이들은 한 곳에 일주일 이상씩 있다는데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2012.4.10.화.
어제 저녁에 밥을 먹고 산책겸 시내를 나갔다가 버스 정류장에 들렀다. 루사카로 가는 버스표를 알아 보기 위해서 였는데, 벌써 오전 표는 다 팔리고 오후 1시반 차표가 있다는 것이다.순간 난감해진 나는 미리 예약을 안해둔 바보스러움을 자책했다. 오후 차를 타게 되면 루사카에 늦은 밤에 도착하는데 도시의 저녁은 위험하기 때문에 저녁에 도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하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와 이러한 사정을 같은 방 독일청년에게 얘기했더니, 인터 케이프 버스편이 있으니 알아 보라고 한다. 다시 걸어서 시내로 나가 인터 케이프 버스회사가 있는 곳에 갔더니, 그 곳은 다른 차표를 팔고 있는 곳인데, 직원은 친절하게 인터케이프 직원의 전화번호를 주며 내일 아침 6시에 확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금년 4월부터 인터 케이프 버스가 운행되는데 리빙스톤에서 루사카가는 버스는 화요일과 토요일 두편이 운행되고 있다. 일단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 나는 너무 더워 다시 샤워를 한번 더 하고 맥주를 한잔했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나 어슬렁 거리다 5시경에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이곳 종업원의 핸드폰을 빌려 어제 받아둔 전화번호로 인터케이프 직원에게 전화를 하니 아침 9시에 오면 자리가 있다고 한다. 나는 종업원에게 맥주 한병 정도의 돈을 주었다. 사무실은 7시에 오픈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청소를 하는 직원의 휴대폰을 빌려 전화한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가 가진 휴대폰은 자그만 했고 조잡했다. 의외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 길거리 노점상에게 얼마냐고 물었더니 제일 좋은 것을 가리키며 40만콰차(8만원)라고 하는데 깍으면 4~5만원에 구입할 수 있을것 같았고, 그 보다 조잡하고 작은 것은 1~ 2만원 이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방 독일인은 자고 있어 어제 저녁에 대충 꾸린 짐을 문밖으로 옮겨 배낭 두 개를 단단히 채웠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지금 시간은 7시 15분, 넷북과 스마트폰을 충전하며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글을 쓰고 있다.
2012.4.11.수.
어제 저녁 6시가 훨신 넘은 시간에 이곳 루사카의 브로즈(Broads) 백패커스에 도착해서 먼저 맥주부터 두병을 마시고 저녁 식사(스테이크.3만콰차(6천원)를 하고 9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는 리빙스톤에서 9시 출발한다는 차를 타기위해 8시에 정류장에서 기다렸으나 10시가 되어도 오질 않았다. 무려 3시간을 기다린 끝에 11시에 버스가 출발했다. 표를 파는 직원은 연신 미안하다고 하며 곧 온다라는 말만 연신해 되었는데, 20분뒤에 온다고 하면 1시간을 기다려도 오질않고, 결국 1분(1 minute)뒤에 온다는 버스가 30분이 지난 11시에 도착했다. 나는 과거 우리나라의 코리안 타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시간 관념을 떠 올리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결국 이 나라도 그만큼 낙후되었다는 말 일게다.
차는 그동안 타고 다니던 봉고차 수준이 아닌 큰차(인터케이프)였고 에어콘도 나왔다. 버스는 짐바브웨를 거쳐 오는 차로 국경을 넘어 오는 시간이 걸렸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11시에 출발하는 버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다릴때 화가 나는 마음이 있었지만, 차에 오를 때 까지 미안하다고 하는 그에게 괜찮다는 좋은 말로 헤어졌다. 좌석은 좌측에 두 개, 우측에 세 개가 있는 차로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아 편하게 혼자 앉아 잠을 청했다.
버스는 중간 중간 정차를 하는데 승객만 타고 내릴뿐 화장실 갈 시간을 주지 않았다. 화장실 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물도 한모금 마시지 않은채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 반 까지 무려 10시간 가까이 고역을 치루었다. 버스비는 8만콰차(1.7만원)로 남아공이나 보츠와나에 비해 싼 편이었다. 내리자 마자 화장실을 찾아 볼일을 보고 택시를 탔다. 배낭여행객에게 잘 알려진 루사카 백패커스에 가자고 했다. 가면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유명한 백패커스에는 서양 백인들만 득실거려 다소 이질감을 느낀터라 미리 적어온 칼루루(Kalulu)백패커스에 데려 달라고 하고 그가 요구하는 2만5천 콰차(5천원)를 아무 흥정없이 기분 좋게 주었다.
그런데 칼루루에도 백인 여행객들이 이미 점령해 버려 빈 방이 없다. 아마 루사카 백패커스에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칼루루 백패커쪽으로 택시를 타고 들어 올때 흘깃 봐둔 브로즈 백패커스(Broads Backpackers) 까지 약 200m를 걸어서 도착하니 방이 있다고 한다. 도미토리를 1박에 5천콰차, 이틀을 묵기로 하고 1만콰차(2만원)를 주었다.
시설이 생각보다 잘 되어있다. 모기장도 있고, 바(Bar)와 식당도 괜찮다. 그런데 주 고객이 이곳 현지인인 흑인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어딜가나 이방인(외톨이) 이기 때문에, 이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비즈니스(전기.건축업)를 하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사장은 어딜 가나 머리 아픈 자리인지 그는 독한 위스키 작은 한병을 들고 와서 들이키고 있었다. 그래야 잠을 잘 잘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 숙박은 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갈 예정이라고 한다. 양복을 입고 온 현지인들도 꽤 있는 것을 보니 루사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인듯 되어 보였다. 도미토리에는 흑인 두 서너명과 백인 여자 하나를 포함 백인 세명, 그리고 내가 숙박을 했다.
오늘 아침 4시에 일어난 나는 샤워를 하고 볼일을 보고 지금 작은 가방을 꾸려 밖에 나와 글을 쓰고 있다. 이곳 시설은 괜찮은데 샤워장이 조금 지저분 하고 주방시설(여행객이 밥을 해 먹는 공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종업원들의 친절도나 숙련도가 무척 낮은 편이다. 아마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로지(lodge)인 모양으로 생각하고 이틀만 묵기로 한 결정을 잘한것 같다고 위안을 해 본다. 사무실(리셉션)에는 흔히 있는 안내 팜플랫이나 지도도 없고 종업원은 많으나 제대로 자기일 을 찾지 못하고 있는거 같다. 어제 스테이크를 시켰는데도 나오는데 무려 1시간 반이나 지나서 나왔었다.
7시에 숙소를 나와 걸었다. 택시를 탈까 생각하다가 운동삼아 걷기로 했다. 한 20여분을 걸으니 어제 버스에서 내린 시내의 모습이 보인다. 버스 정류장을 물어 물어 찾아 가서 치파타(Chipata)행 버스표를 구하려고 하니 내일 표는 완전 매진이란다. 여기는 각 버스 회사마다 찾아 다녀야 하는데 어제 내린 곳은 종합 버스 터미널이었다. 다시 물어 찾아 가다 한 버스 회사를 찾았다. 그런데 내일 새벽 3시 차표 밖에 없는데 구입 할거냐고 몇 번을 물으며 환불(refund)이 안된다고 강조를 한다. 보통 1시 정도면 항상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오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충분 할 것 같아 버스표를 구입했다. 12만 5천콰차(2만 5천원)로 다소 비싸다. 하여튼 버스표를 예매를 미리 해둬야 낭패 보는 일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루사카는 잠비아의 수도라서 그런지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출근하는 행인들의 행열과 아침 신문파는 사람들, 그리고 일찍 가게문을 여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제법 큰 쇼핑몰도 있고 큰 빌딩도 있다. 별로 도회지에 흥미를 못 느끼는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길에 가게(맥도날도 같은 가게)에서 스테이크와 치킨 두종류의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들고 걸어서 왔다. 약 2시간동안 아침 운동을 잘한 것 같다. 숙소 근처에 있는 택시 기사를 만나 내일 아침 2시반에 숙소로 와 줄것을 약속을 했다. 2만5천 콰차(5천2백원)에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금시간은 9시 반, 방에는 2명의 남성이 자고 있고 이곳 루사카에서 자기집이 1천km 떨어져 있다는 흑인은 일하러 간다며 인사를 한다. 날씨는 벌써 덥다. 할 수 없이 시원한 맥주를 한병 주문해서 마시고 있다. 스마트폰 충전을 시키고 한가롭게 방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걸어서 10여분 떨어진 곳에 대형 현대식 쇼핑몰이 있어 다녀 왔다. 포도주 한병을 사고 1회용 면도기, 샐러드,그리고 이곳 담배(Monte Carlo. 1갑에 약 1천원) 등을 사서 왔다. 너무 더워서 또 샤워를 했다. 빨래를 해서 말린후, 방문앞 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한잔하고 있는데 그동안 자고 있던 흑인 남성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같이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중국(홍콩,상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이태리에서 살고 있는데 대학 관계일로 이곳에 자주 온다고 한다(그는 5개국을 구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잠비아의 정책이 1992년인가 바뀌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고도 얘기해주었다. 현지인들이 영어를 쓰긴하는데 제대로 된 영어는 잘 쓰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무척 지식이 풍부한 그와 2시간이 넘도록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 잠비아의 문제는 길거리에 방치된 어린아이 들이 새벽이나 밤 늦은 시간에 빈 맥주병을 던지거나 하는 폭력행사를 하고 있는데 미래에 이들이 성장했을때 정말 엄청난 폭력 조직으로 자랄 수 있음을 걱정을 한다. 그리고 현대 문명이 가져다 준 문명의 이기가 가정을 파괴하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로 인해 미래가 피폐해 질것이라고 진단한다. 자기도 당장 컴퓨터가 없다면 기억해 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데 지금 컴퓨터나 각종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아이 들이 과연 이 미래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런지를 서로 공감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나이는 괜찮다는 점에서도 의견일치를 보며 웃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입심이 대단하다.
나이도 서로 비슷해 오랜만에 어렸을때 이야기랑 현재의 문제점, 가정 사회 국가에 대한 문제까지 주제를 넘나들며 여러가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해 주었다. 예를 들면 지금의 교도소 교정 시스템 보다는 중국이 과거 공산주의 시절에 교도소 대신 시골(country side)로 보낸 것이 오히려 더 그들을 생산력(productive) 있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감옥에 가서 새로운 범죄를 배워 오는 것 보다 남들이 싫어하는 3D 업종이나 농촌에 보내 힘든일을 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물론 그이 말이 100 %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새로운 접근 방식을 얘기한 것이 흥미로웠다.
여행을 다니며 많은 것을 새로운 시각을 가진, 또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이들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큰 소득인것 같다. 날씨가 무척 덥다. 그는 볼일 때문에 나가고, 나는 홀로 바(Bar)로 자리를 옮겨 카슬(Castle)맥주를 한병 시켜 마시고 있다. 서구식 음악이 흘러 나오는데 이곳 젊은이 세명이 앉아 독한 술을 마시고 있다. 시간은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다.
무척 졸립다. 늘 새벽차를 타야 할 때면 비교적 몸을 혹사하고 있다. 절대 눈을 붙이지 않고 참을수 있을때 까지 참는다. 그리고 정말 지칠때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 새벽 1~2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움직여야 한다. 5시, 졸리기 시작하지만 6시까지 기다렸다가 잠을 자려고 한다. 내일은 새벽 2시전에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쳐야 3시 차를 탈 수 있다. 남미 여행시도 장거리를 많이 다녔지만, 아프리카를 육로로 이동하는 것 보다는 쉬웟었다고 생각한다. 남미는 장거리 버스 노선이 잘 관리되고 있었고 차들도 크고 좌석이 넓고 편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느낌을 가졌었고, 심지어 어떤 버스회사는 항공사에 못지 않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프리카는 우리나라 일반 버스 수준에도 한참 도달하기 어려운 형편인것 같다.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승객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자기들 편의대로 운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 숙소에 종사하는 종업원은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그들의 일 처리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 방을 청소하러 온 여자 둘이 1시간이 넘도록 밍기적 거리고 있다. 너무 빨리하면 두명중 한명은 잘릴 수 있기 때문일까?
2012.4,12.목.
어제는 일찍 7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3시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적어도 2시에는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 잠이 들지 않은데 흑인 두명이 들어와 불을 켜고 떠들어 댄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공동 숙소에 대한 개념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식당에 가서 저녁을 시켰다. 어제는 스테이크를 먹었기에 프라이드 피쉬를 시켰다. 큰 생선을 프라이한 것과 이들의 주식인 옥수수를 갈아 만든 음식(우리나라 쌀과 같은 개념)이 나오고 3만 콰차(6천원)을 주었다. 음식값은 2만 8천 콰차이기 때문에 잔돈은 2천 콰차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식사를 다하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분명히 내가 2천콰차 잔돈을 달라고 이야기 까지 했었는데도 소식이 없다. 다시 잔돈을 요구하고 기다렸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다. 적은 돈이지만 하는 수 없이 가서 따졌다. 낮에도 맥주 1병을 8천콰차를 마시고 1만콰차를 내었으나 1시간이 지나도 돌려 주지 않아 직접 바(Bar)에 가서 돌려 받은 터 였다. 나는 메니저에게, 여기는 왜 이러느냐? 지금까지 잠비아 여행을 다니며 좋은 인상을 가졌었고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무척 친절하면서 정확하게 즉시 돈을 계산해 주는데 여긴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키느냐? 너희 보스를 좀 만나 보자 라고 얘기했더니, 종업원이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돌려 준다. 그정도 쯤은 팁으로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돈이지만 이곳의 여러 가지 관리 방식에는 엄청난 문제가 있었다. 좋은 기분이 여러 가지 일들로 무척 상해 버린 짜증나는 하루였다.
9시쯤에 리빙스톤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독일 청년이 리빙스톤에서 이곳 루사카로 넘어왔다. 그도 다른 곳에는 빈방이 없어 이곳으로 왔다고 하며, 내가 있는 도미토리로 배정되어 반가운 해후를 했다. 그는 정치과학(Political Science) 석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현재 쓰고 있는 글을 곧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서로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그도 치파타를 거쳐 말라위에 갔다가 독일로 돌아 간다고 하며 치파타나 말라위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 전화를 몇군데 하더니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나는 잠을 뒤척였다.
새벽 1시에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짐을 꾸리고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2시반이 될 때 까지 기다렸다. 약속한 택시 기사가 그 시간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시 40분이 되도록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어두운 골목길을 후래쉬를 켜 들고 조심 스럽게 걸어 거리로 나와 한참을 걸어니 택시한대가 지나간다. 세워 타고 버스회사에 도착하니 3시전인데 대부분의 승객이 앉아 있다. 짐은 발 디딜틈도 없이 늘 부러져 있어 내짐은 제일 뒤쪽에 던져 졌다. 차는 무척 후졌다. 어제 한번 더 인터케이프 버스회사를 찾아 볼 걸 후회스러웠다. 버스요금은 12만 5천 콰차(2만5천원)로 비싸게 주었는데도 그렇다.
24번 좌석에 뚱뚱한 여자가 앉아 있다. 나는 내 번호표가 24번 이지만 말없이 25번 좌석에 앉았다. 차창가 보다 복도쪽도 괜찮다는 생각과 아침부터 좌석 때문에 시비를 붙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시가 넘었는데도 차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좌석에 한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출발을 하지 않는다. 3시 반이 넘어 차가 출발하고 나는 눈을 붙였다.
좌석 자체가 좁게 설계되어 있다. 좌우 좌석 두 개씩이 정상인데 승객을 더 태우려는지 좌측에 의자 두 개, 우측에 의자 3개씩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뚱뚱한 여자는 내 자리까지 넘어올 정도로 몸이 뚱뚱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오른쪽 복도 쪽으로 다리를 펼 수 밖에 없었다. 어제 오늘 일진이 좋지 않은지 무척 힘든 하루이다.
그래도 오늘은 중간에 벌판에 세우더니 10분간 볼일을 볼 기회를 주었다. 여자들은 좌측에 있는 잡목이 있는 초원지대로, 남자들은 우측으로 우르르 몰려가 볼일 들을 본다. 볼일을 본후 비로소 물을 한 모금마셨다. 잠비아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국경 마을인 치파타 쪽으로 갈 수록 우리나라 처럼 산들이 보인다. 땅들은 척박하여 옥수수밭 만 드문 드문 보인다. 시골집들은 영화에서 본 그런 아프리카풍의 집들이 많이 보이고 시멘트로 엉성하고 좁게 지은 집들도 보인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그 삶들이 팍팍해 보인다.
치파타에 10시반에 도착했다. 정류장일대는 북새통이다. 택시기사들이 모여 든다. 나는 짐을 내려 놓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좌우를 살펴 보았다. 시장마을과 함께 온갖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인도에서 본 어느 시골 마을이 떠 올랐다. 택시 기사 한녀석이 계속 옆에 서서 떠들어 댄다. 사실 치파타에 대해서 연구를 하지 않고 온 터라 아무런 정보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은행은 어디에 있느냐(이곳 정류장에는 너무 시골 장터 같아 은행이 보이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었다. 결국 그가 소개해 주는 이곳 이스턴 컴포트 로지(Eastern Comfort Lodge)로 그와 함께 왔다. 택시비는 만오천 콰차(3천원)를 주었다. 숙소는 일종의 여관 개념으로 운영 되는곳으로 제일 싼 더블룸이 1박에 15만콰차(3만원)이다. 이런 시골에 터무니 없이 비싼 요금이다. 택시 기사도 가버리고 없는 상태, 하는 수 없이 1박에 10만콰차(2만원)로 흥정을 하고 이틀 동안 머물기로 했다.
은행에 가서 60달러를 환전을 해서 30만여 콰차중에서 이틀치 숙박비로 20만콰차를 지불하니 10만여 콰차(2만원)정도가 남는다. 이곳 일대는 제법 괜찮은 쇼핑몰도 있다. 가게에 들러 음식물을 구입했다. 요거트,빵,물,쥬스, 밥과 닭고기,그리고 맥주(모시맥주)6병도 샀다. 이동시 현금이 필요할 것 같아 신용카드로 결제를 했다 7만여 콰차(1만4천원)를 썼다. 신용카드가 되지만, 신용카드를 꺼내면 종업원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자기들이 계산하지 못해 별도 직원을 부르곤 한다. 아직 아프리카에는 신용카드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듯 하다. 대신 ATM 기계는 곳곳에 믾이 있는편이다. 이곳 롯지에는 자체 운영하는 식당도 없고 주방도 없다.
정전이 되었는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날이 더워 찬물로 샤워를 해도 괜찮다. 빨래를 해서 말린 후 맥주를 따른 머그잔을 들고 숙소앞에 나와 앉았다. 날이 너무 더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곳 치파타 병원이 앞에 있어서 인지 택시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고, 거리 상인들이 조금 모여 있다. 동양인인 내가 신기한지 몇몇 녀석들이 모여 든다. 감자 튀김을 파는 상인에게 얼마냐고 물으니 천 콰차라고 한다. 나는 양을 잘 몰라 500콰차 어치만 달라니 정말 조금이다. 몇점을 먹다가 내게 닥아온 택시 기사 두 녀석이 먹으라고 하니 금방 먹어 치운다. 나는 뒤 켠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는 나이든 거지 두녀석을 위해 천 콰차 어치를 더 사서 그들을 불러 먹였다. 얄밉게도 택시 기사 녀석도 달려 들어 뺏어 먹는다. 우리돈 200원어치에...
6시 10분경에 불이 들어 왔다. 종업원은 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손님에게 미안한 마음이나, 사전에 설명도 없다. 답답한 내가 물으면 겨우 답해 줄 정도이다. 선풍기를 켜니 다행히 살 것 같다. 밤이 깊으면 또 추울 것이다.
외롭다. 우리나라 옛날 음악을 틀어 놓고 맥주를 홀짝거렸다. 너무나 외롭고, 약간은 두렵다. 그동안은 여행객들도 같이 투숙하던 그런 곳이었는데,여긴 여행객이라고는 나 혼자 박에 없다. 여긴 정말 나외에는 다 이곳 현지인들 밖에는 없다. 카메라 배터리, 넷북,그리고 스마트폰 충전을 시켰다. 9시 가 넘으니 졸립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2012.4.13.금.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바람도 불고 쌀쌀하다. 어제와는 딴 판이다. 다들 긴옷을 입고 다닌다. 잠깐 졸다가 자다 깨어 보니 정오(12시)다. 잠시 동안 여기가 어딘지 생각해 본다. 아! 여기는 아프리카 !, 그리고 어느 시골 마을의 여관이다. 순간 답답해 진다. 아무도 없는 외진 이곳에 홀로 떨어져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이상한 기분으로 닥아 온다.
아침 4시에 일어나 어슬렁 거리다가 7시에 까파타(이곳 전체를 치파타라고 하지만 굳이 나누면, 저쪽 아랫동네를 까파타라고 하는 모양이다)까지 걸어 갔다 왔다. 이곳 보다 더 시골인 곳인데 장터에 들러 구경을 하고 젊은 아이들과 어울려 사진도 찍었다. 어떤 녀석은 내 선글라스가 좋다면서 자기를 달라고 해서 단호하게 노(No)라고 말했다. 다시 이곳 마을 수퍼(Spar라는 상표의 수퍼마켓)에 들러 몇가지 음식물을 사고 돌아오니 2시간 이상을 아침 운동삼아 잘 걸었다. 카메라 사진을 넷북과 USB에 옮겨 싣고 음악을 듣고 있다가 깜박 1시간 정도 졸은 것 같다.
청소하러온 여자아이에게 내방은 안 치워도 된다고 했다. 침대가 조금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만 개의치 않는다. 베게는 큰 타월로 감싸 덮고 베고 이불은 덮지 않고 긴 옷을 입은채 잔다. 혹시 ‘시트등이 세탁되지 않은 것이라면?’, ‘어느 에이즈 환자가 덮고 자던 것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찜찜해 지기도 하지만, 지금은 면역이 조금된 상태가 되었다.
대부분은 가난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지금까지는 거지를 별로 보지 못했다. 인도에서는 길거리에 늘린 거지들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는데, 여기는 노숙하며 간혹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들은 보아도 노골적으로 손을 내미는 거지는 남아공 케이프 타운에서 좇아오면서 돈을 달라던 거지를 한번본 것이 전부이다.
이곳에도 제법 사는 흑인들은 토요타 또는 기타 일본차나 SUV 차량등을 타고 불룩나온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다닌다. 병원관련 기관 단체등을 많이 보았는데, 아프리카에 횡행하는 에이즈나 각종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국제 보건 의료 기관에서 투자와 지원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주로 UN등 외국 보건.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사람, 또는 은행원 이나 정부 기관에 일하는 사람들이 부유한 계층을 이루고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난 주 인가 이곳 인접 국가인 말라위 대통령이 병환으로 갑작스레 죽은 모양이다. 각 관공서에는 반기가 걸려 있다.
내일아침 6시 20분에 택시로 말라위 국경까지 가기로 택시 기사와 합의를 보았다. 처음에 7만콰차(1만5천원)를 달라는걸 3만콰차를 주겠다고 해서 4만콰차(8천원)에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정보에 의하면 합승 봉고차로 2만콰차(4천원)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지금은 조금 물가가 더 올랐으리라 생각을 했고,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숙소에서 봉고차 타는 곳 까지 가려면 어차피 무건운 배낭과 거리 때문에 택시를 타야 하는데, 이정도면 합리적 가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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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는데 한참 걸렸네
좋은 경험하셨네요.
덕분에 나도~~
감사합니다
사진에 대한 간단설명이 있으면 금상첨화
세계에서 최구루 멋지게 사는 사나이와 싸모님....
축하합니다
정말 쉽지 않은 시도인데....
난 언제 저런 삶을 만들어 가나???????
좋은 경험의 진한 냄새가 전해지네요
한국에 박빙스턴이 여행하고 있는 모습. 참 좋습니다.
브로즈 백패커스(Broads Backpackers) 는 백팩커의 고향인가?
나는 글쓰기가 싫은데
이렇게 자세히 기록을 하니 대단하십니다.
잘보고 갑니다.
부인하고 같이 간다고 하더니 혼자 가셨나 ?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다음엔 또 어디를 가시는가 은근히 기다려 지는 우리 박재균 동기생 !
폭포옆에서 사진 같이 찍은 샥시 주머니에 넣고 오지...ㅎ
잘 보고 갑니다. 멋진 추억을 축하하며 부럽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너무 멋진 여행을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