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시편 27:1)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경외'라는 감정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의미로 본다. 지나친 '두려움'은 우리 삶을 움츠러뜨리는 일등공신이며,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유발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이 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이 하룻강아지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신중함'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그리고 이 감정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냥,
인간이니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가지는 말라.
다윗이 주님을 의지하며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적자들과 원수와 악한 자들의 군대와 용사가 자기를 치려고하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다. 너무 두려워서 주님을 애타게 찾으니(7),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원수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렇게 고백할뿐 아니라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
사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 적들에게 에워싸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기도와 믿음'이라는 두 날개다.
기도하고 믿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자리에 서는 경험, 그리고 그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자기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자기 너머에 있는 신비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신비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기다리고,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리는 순간 그는 새 힘을 얻는다. 새 힘을 얻었다고 당장 두려운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새 힘을 얻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적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의 결론을 아는 것이다.
인생의 결론을 아는 사람은 세속의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 앞에서 솔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 것을 안다. 그런 사람이라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한 전쟁, 지구온난화와 정치,종교,경제,예술 등 각 분야에서 권력을 쥔자들의 불의함은 두려움과 온갖 냉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때 우울과 두려움과 냉소의 블랙홀로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두 가지 처방이 있다.
바로, 기도와 믿음이라는 두 날개다. 이것이 있으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는 시인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절망하지 말라, 주님이 나의 빛이고 구원이신데, 그분이 절망하지 않으셨는데 왜 우리가 앞서 절망하고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새번역 성경을 기초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