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호흡

[신기루]

단전호흡

“꼭 건강을 되찾아야 합니다. 유학 간 아이들을 위해서요.” 단학선원 원장이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그동안 참았던 슬픔이 뇌관을 건드린 것처럼 터져 나왔다.
1997년 예고 없이 찾아온 금융위기의 파도에 휩쓸려 모든 것이 쓰나미 같이 날아갔다. 무역회사가 파산하고 공장도 문을 닫고 가게 여러 곳도 싼값에 버리듯이 정리했다. 날이 새면 또 닥쳐올 어둠, 그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우리 가족들이 겪었던 참담함을 떠오르게 했다. 유학 간 세 아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이 캄캄하게 다가왔다.
긴 두레박으로 희망을 길어 올리듯 우리는 또 무엇인가 해야 했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시도하다가, 드디어 대학로의 카페를 인수했다. 그러나 의류 계통 외에는 문외한이라, 또 다시 서서히 내리막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몸이 비명을 질러대며 표본실의 나비처럼 바삭거렸던 것이. 이제 바닥까지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라는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삶은 어쩔 수 없는 벽을 기어오를 때 눈부시다.
역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삶의 모난 부분을 깎고 갈아서 그 상한 영혼을 회복하여 명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명품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멋지게 울고 싶었다.   
‘그래, 이대로는 안 돼. 내가 나를 뒤집어 놓아야 해.’
새벽에 병원 옥상에서 바다처럼 가라앉은 건물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몇 년 동안 쉬었던 단전을 다시 시작했다. 단전호흡은 시시각각 나를 뛰어넘어야 하는 극한의 운동이므로, 한번 쉬게 되면 편안한 일상의 맛에 길들어 다시 그 힘든 세계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40대에 단전을 시작했지만, 꾸준히 계속하지 못하고 항상 쉬었다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이번에는 고려대학교 앞의 선원이라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운동의 강도가 셌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수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운동이 끝나면 버스 정류장의 긴 의자에 드러눕고 싶을 만큼 피로했다. 그러나 운동이 힘들 때마다 독일에 있는 세 아이 생각만 했다. 내 아이들이야말로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독한 IMF의 터널을 지나면서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간단하게 몸피를 줄인 후에, 독일 여행, 딸 아이 결혼 등으로 돌아다니느라, 또다시 단전을 쉬게 되었다.
그 후 독일에서 공부하던 딸아이가 하늘로 날아가고 난 후, 몸은 한꺼번에 구석구석 낡은 나무 계단처럼 삐걱거리더니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심장판막증을 오래 앓아왔는데 부정맥까지 찾아와 위급한 상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서 사경을 헤맬 때 돌연 큰아들이 귀국했다. 독일에서 석사를 마친 후, 안식년으로 쉬고 있는 박사과정 지도교수의 복귀를 기다리다가 내 소식을 접하고 급히 귀국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한국에 와 있는 두 달여 내내 병실 침대의 발치에 꼬부리고 앉아 간호를 했다.
어느 날 아이가 “엄마 나 한국에 돌아와서 박사학위 하면 어떨까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잘못 들었나 하고 귀를 의심했다. 답답하여 산소호흡기를 확 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과 보낸 두 달여의 병원 생활에서 이성이 마비되었는지 달콤한 아들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들은 독일로 돌아간 지 몇 달 후에 뜬금없이 공부를 접고 귀국해버렸다.
나는 이제 큰아들을 위해 나와의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생겼다. 몸이 좀 회복이 되자 서둘러 선원을 다시 찾아갔다. 나의 그 악바리 근성은 이렇게 바닥까지 내려가야 다시 튀어 오르나 보다.
운동이 끝난 후 명상 속으로 몰입하다 보면 차차 온몸에 기쁨이 차오르면서 무아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 몇 년 전 건강했을 때, 새벽마다 경쾌한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아까시가 흐드러진 산을 늑대처럼 한달음에 펄펄 날아다니던 그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깊은 명상 여행을 떠나면 현실의 어려움은 먼 전생에서 겪은 일처럼 아득해진다. 그리고 마음을 집중하는 몸의 부분에 마치 성벽을 쌓듯이 기의 캡슐이 생긴다. 그러기를 몇 달이 지났을까, 탈진되었던 몸에 기운이 생기기 시작했다. 혈압 수치가 내려가고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졌으며 뇌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몸이 차츰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젊을 때도 체온이 낮은 내 몸에는 사계절 내내 감기가 상주했다. 그래서 여름에도 불쑥불쑥 한기가 들었다. 찌는 듯한 8월 이탈리아 여행 때에도 고속도로 휴게실 여자 화장실 앞에서 큰아들이 오리털 잠바를 들고 기다리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30여 년 전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한 몸에 들어와 수십 년 기생하던 사계절 감기가 허물 벗은 뱀처럼 내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갔음을 느꼈다. 몸속의 그 무수한 아우성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 것일까.
아이들 교육이 내 삶의 우선순위라 40여 년 거기 집착했고 밖에서 헛것을 찾아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이 귀국하여 자기 길을 가고 있으니 그렇게 치열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던 문학이 내 삶의 우선순위로 올라갔다.
나에게 글쓰기는 늘 무지개 같은 짝사랑이고 목마른 갈망이었다. 이제 몽매에도 그립던 문학을 계속 만나려면 꼭 건강해져야 하므로 나 자신과 더욱 치열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의 악바리 근성을 이제 모성이 아니라 문학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