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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여놓고 살리는 외동딸 작전>의 줄거리: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외동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십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사건이 묘하게 얽혀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동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애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외동이 되찾기 작전을 살펴봅니다.
죽여놓고 살리는 외동딸 작전
(누가복음 8:49~56)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죽여 놓고 살리는 외동딸 작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죽여 놓고 살리는 외동딸 작전’
본문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리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는 독립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사건과 묘하고도 아름답게 얽혀있습니다. 이 두 사건이 이어지며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야이로의 열두 살 된 외동딸은 이 사건에서 특별한 믿음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딸은 죽었다가 영문도 모른 채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죽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건의 시작으로 돌아가 41절을 보면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와 죽어가는 딸을 살려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접촉하여 병이 낫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딸이라 부르시며 축복하신 후에야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누가는 이 두 사건을 연결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열두 살 된 외동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인을 외동딸처럼 아끼셨다면 대체 왜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게 하신 것일까요? 혈루증은 바로 이 여인을 세상으로부터 되찾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혈루증은 야이로의 외동딸이 죽은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외동딸로 생각하셔서 품에 안기 위해 되찾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마치 야이로의 외동딸이 죽은 것과 같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것으로 그 죽음을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통하여 여인을 하나님의 품에 안으시는 관계회복을 성취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외동딸로 생각하시는 사람들을 되찾으시기 위해 반드시 죽여놓고 살리는 작전을 쓰십니다.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구에서 보면 "히트 앤드 런(Hit and run)"이라는 작전이 있습니다. 타자는 공이 잘 맞든 못 맞든 무조건 치고 달립니다. 앞서 나가있던 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자가 공을 잘 쳤는지 확인하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공을 치는 순간 무조건 달리기 시작합니다. 죽여놓고 살리는 하나님의 작전은 마치 히트 앤 런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께는 특별히 외동딸이나 외동아들로 생각하는 외동이들이 있습니다. 외동이들이라는 말은 어법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동’이라는 말이 하나뿐이라는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백 사람을 대하든 천 사람을 대하든 마치 하나밖에 없는 외동을 대하시는 것처럼 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로 삼기를 바라시며 쓰시는 작전이 바로 죽여놓고 살리기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런 하나님의 작전에 적용된 적이 있는지 혹은 적용되고 있는 중인지를 살펴본다면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두 사건의 인물이 아들이 아닌 모두 여성 즉 딸이 나옵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당시에 여성의 인권은 무척 낮았고 인구조사를 할 때도 여성은 계수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두 여성이 하나님께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는 곧 세상에서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일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외동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죽여놓고 살리는 작전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외동으로 여기시며 죽여놓고 살리는 작전을 펼쳐나가실 때 외동인 당사자들은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작전을 펼치신다는 증거로써 본문 48절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작전을 펼치시는 외동이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믿음을 마태와 마가와는 전혀 다르게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9장 21절에서는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하였고, 마가복음 5장 28절에서도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는 동일한 관점이 나타납니다. 한편 누가는 43~44절에서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겠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의지의 표현을 제거한 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이러한 내용을 기술하지 않은 이유는 믿음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마태나 마가의 기술을 문자대로 받아들이면 믿음은 예수님의 옷 가에 접촉하면 혈루증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물론 마태와 마가가 믿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기술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인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생각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굳이 그러한 기술을 제외함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믿음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지만 반드시 갖추어져야 될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이 핵심 요소가 빠지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 핵심 요소가 있다면 어떤 표현 방식이 되었든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최고로 좋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삶의 현장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입장과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바로 믿음입니다. 병을 고치겠다는 목적 지향적 마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궁극적인 입장과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믿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심장을 꺼내어 드린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심장을 꺼내어 드리듯이 마음의 흐름과 방향과 최종목적지가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서 발견될 수 있었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여인에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게 하셨습니다. 여인의 혈루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에서 일어난 일이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여인은 선민사회에서 배척당하는 부정함의 온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부정함은 곧 하나님과 끊어질 이유입니다. 성전중심의 선민사회에서 부정하게 규정된 사람들은 누구와도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라 여겨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여인의 문제는 단지 병이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관계가 없기에 삶은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선민사회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사람과의 관계도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인은 혈루증으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린 것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간절히 바라고 궁극적으로 소원하던 도착지점은 하나님과 끊어진 연결이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연결이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 혈루증이 나을 필요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원했던 것은 단지 혈루증의 치유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믿음이라 인정하셨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포착하고 믿음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기술된 표현을 생략한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여인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단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혈루증이 없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치유를 바라게 되었던 것이지 단순히 병을 고쳐 몸이 건강하게 되는 것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믿음이라 칭찬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인의 행동을 빨대를 꽂는 모습에 비유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들어온 것은 예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빨대를 꽂은 것처럼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빨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란 단순히 병 고침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바라는 간절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결재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연결의 상태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게 됩니다. 병이 낫고자 하는 생각을 갖지 않더라도 치유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결재를 부탁하고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빨대로 음료를 빨아들이듯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오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였기에 여인의 혈루증은 저절로 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결재 없이 들어오는 상태가 될 수 있을 때 몸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 전반에 걸쳐서 흑암은 광명으로 바뀔 것이고 혼돈은 질서로 바뀔 것이며 공허는 열매맺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어느 한 부분을 꼬집어서 “낫게 해주세요, 고쳐주세요, 개선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확정짓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못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여인이 보인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짜 믿음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여인에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게 하신 결과였습니다. 혈루증에 의해서 모든 인간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가족이든 친구든 어떤 사건이든 상황이든 가치에 대해서 마음이 물들고 취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물들고 취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마음의 희로애락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기운을 발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혈루증을 앓게 됨으로써 손댄 물건까지 부정하게 되고 그 물건에 손댄 사람까지 부정해지는 부정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선민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고 삶이 존재할 수 없는 상태가 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야이로의 외동딸의 죽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본의 아니게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가 되었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러한 상태가 되기를 바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야이로의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죽은 것처럼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야이로의 외동딸은 죽음으로써 부모를 떠나게 되었고, 자신의 몸을 떠나게 되었고, 친구나 친척을 비롯한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죽음의 상태가 바로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여인의 몸은 비록 살아있으나 모든 관계는 죽어있었습니다. 살아있으나 삶에 대해서 죽은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외동이로 생각하시는 사람들을 찾으실 때에 쓰시는 작전의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임은 전반전입니다. 그리고 후반전에서 살리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외동들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죽이실 때에 하나님을 소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소망하기 위해 세상에 대한 죽음을 기회로 삼습니다. 이러한 외동들을 위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혈루증을 가져다주심과 같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전을 펼치실 때 당사자의 마음에는 “하나님께로 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혈루증 여인이 가졌던 믿음의 내용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나도 저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의 모든 관계가 죽었으나 하나님에 대한 관계만큼은 회복하고 싶다.”고 여겼기에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정함의 원인이 되는 혈루증이 나아야만 했기에 혈루증은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병 자체가 낫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바람이었을 뿐입니다.
야이로의 외동딸은 죽었습니다. 세상에서 죽음은 끝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딸을 붙잡고 일으켜 살리십니다. 야이로의 딸은 아프고 괴롭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끊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문도 모른 채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눈을 뜨자 낯선 남자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습니다. 딸의 부모가 보기에 예수님과 딸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한 묶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전에는 부모가 딸과 한 묶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통해 딸이 예수님과 한 묶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살아남이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죽음은 곧 모든 관계의 끊어짐입니다. 모든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을 첫 번째 관계의 대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손을 잡은 상태로부터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연관성을 생각해봅니다. 성경에는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는 여자는 열두 살, 남자는 열세 살에 성인식을 합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을 맡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독자적인 인격체로써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외동딸이 죽은 것이 바로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나게 됩니다. 독립적 인격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첫 번째로 손잡은 자가 하나님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손잡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손을 잡고 삶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외동들의 삶이며, 하나님의 작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이 출발점을 회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혈루증과 같은 효과를 갖습니다.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내가 혈루증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작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혈루증을 끌어안고 세상과의 모든 관계는 끊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부정하다 여기지 않는 선민들은 마음대로 세상과 관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도 나갈 수 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친척과 이 세상의 일들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물들고 취하여 세상의 기운을 발산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하나님의 외동이 찾기 작전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으며 세상에 속하고 싶어도 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끊어졌다고 여겼던 하나님과 연결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부정함을 씻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되었고, 부정함을 주는 혈루증으로부터 낫기 위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게 됩니다.
여인은 본의 아니게 열두 해를 혈루증을 통해 세상과 끊어지게 되었으나, 우리는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혈루증에 걸리지 않고서도 세상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될 수만 있다면 시시콜콜 세상 문제를 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결재 없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여러분의 삶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재 없이 임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삶의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며 흑암을 광명으로 바꾸시며 공허를 열매 맺음으로 바꾸어나가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놓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속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외동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되찾고자 작전을 펼치고 계시기에 십자가를 붙잡고 싶은 믿음 또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때로는 잘못하고 실패하고 잊어버리지만 그럼에도 십자가를 기억하고 돌아오고자 합니다. 이 마음조차도 하나님의 외동이 찾기 작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주어진 믿음임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혈루병인 십자가를 붙잡게 하여 주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셔서 새롭게 출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전에 온전히 나를 내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