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으로 가려다가 전철에 자전거 태운게 부담되어 진위역에서 내렸다
오늘은 예전에 동쪽으로 이동 원균과 정도전 사당 등을 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서쪽인 서탄면쪽으로 이동했다
평택시 관광지도에 한온장군 충신 정문이 크게 홍보되어 있어 먼저 그 곳을 찾았다
그런데 주변에 가보아도 이정표 하나 없고 길가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탄면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알아보아도 자세한 걸 찾을 수 없었다 관광지도에 나오지나 말지...
포기하고 서탄면 소재지를 한바퀴 돌아나오던 중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만났다 조그만 정려인데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이다
조선 명종 때에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때 전라도 장흥부사(長興付使)로 재직 중 왜구와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한온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을묘왜변(乙卯倭變) 또는 달량왜변(達梁倭変)은 1555년(명종 10년) 조선 명종 때 일어난 왜구의 습격이다. 왜구들이 전라남도 해남군 달량포를 기습하여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하고 10진이 함락되었으며 전라병마절도사, 진도군수 등이 전사하고 전라도병영 군사가 전멸되었으나 곧 수습, 토벌되었다. 일설에는 임진왜란의 전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명종 10) 5월 11일,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 해남군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어 진도와 금갑도(金甲島)·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기습공격, 병력을 학살하고 불태웠으며, 민가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해남, 영암, 진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5월 13일 왜구들은 먼저 영암, 달량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 장흥, 강진, 진도 등을 짓밟으며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사로잡히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였다.
전라도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었다. 정부는 급히 이광식(李光軾)을 후임 병마절도사로 임명해 병력을 주어 내려보냈다. 이광식은 진도와 해남 등의 해안가의 왜구와 교전했다.
당시 나주를 거쳐서 북상하려는 왜구는 이흠례(李欽禮) 등에 의해 격퇴당했다.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사살한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 완도, 장흥(長興)·강진, 진도 등을 약탈, 주민을 사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면서 약탈하다가 이흠례군, 이광식군에 의해 밀리자 다시 말머리를 돌려 영암으로 침입했다. 일부는 진도 일대를 약탈했다. 한편 당시 조선군 일부 장수들은 변장들이 살해되고 지방관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살해된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전세는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금군(禁軍) 등 한성의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징집하였다. 동시에 호조판서 이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남치훈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고,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도 전부 내보내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각각 장수를 추가 파견했다.
후원군이 도착하자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이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군사와 합세하여 5월25일 영암 해변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 제주도를 습격했으나, 상륙한 왜구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그 해 10월 대마도주(쓰시마국주) 소 요시시게(宗義調, 1532~1589)는 이들 전라남도 해안가를 습격한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하며 왜변이 일단락되었다.
진위천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천변을 따라 평택 고덕까지 내려왔다 진위천은 말로는 내천이라 표현하지만 거의 강처럼 흐르며 안성천과 만나 서해로 들어간다 주변에 비행장도 있어 비행 훈련에 시끄러운 면은 있었다
고덕에 이르면 민세 안재홍 독립운동가 생가가 있다
해방 전후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정치가인 민세 안재홍 선생이 살던 집이다.
안재홍 정치가의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윤섭의 아들로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 남궁 억(南宮檍)·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시대일보』(時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같은 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 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였다.
1932년에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呂運亨)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8·15광복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10월 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46년 한성일보사(漢城日報社) 창립 사장·비상국민회의 의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가는 아직도 허름한 초가집채 그대로이지만 생가 주변은 송탄관광단지와 이번에 새로 개발되는 고덕국제도시로 공원 등이 조성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삼성전자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 삼성때문에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고덕에 문제가 생겨 이렇게 개발한 상가 등이 텅텅 빈다고 하소연들이 많다
예전 대학시절 송탄 미군부대에서 방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곳은 이제 없어졌나 보다
서정리역을 통해 천안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