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는 한국 교계에 교단 분열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장로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와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분열되는 것을 시작으로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침례교도 분열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야말로 이 시기는 교단마다 유행병처럼 사분오열 갈라지는 대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런 분열의 와중에서 각 교단들은 서로 낙오되고 도태되지 않으려 했고, 결사적으로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모략과 중상이 판을 쳤고,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싸움은 계속 더 거세어져 갔다.
내가 목사안수를 받은 1959년에 불행히도 대한기독교침례회(포항파)와 기독교대한침례회(대전파)가 분열되었다. 이 교단분열은 본 교단이 창립된 이래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분열은 교리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 분열은 교권을 장악하려는 목회자들의 책동에 의해 빚어졌다. 게다가 한국 침례교단의 역사를 새로운 기원(紀元)으로 삼기 위해 서두르는 세력이 가세함으로써 더욱 비극적이고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전개되었다.
생각해보면 교단의 분열이야말로 교단 산하의 교회들에게 막대한 상처를 입히고 교회발전에 큰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쓰라린 역사의 한 토막이었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는 말과 같이 본 교단의 분열도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성경은 말한다.
교단분열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이미 그 전에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어 있다. 우리 교단도 예외 없이 분열의 아픔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 교단은 인재가 부족한 까닭에 타 교단에서 넘어오는 목회자들을 너무 무분별하게 영입했는데, 그것이 분열의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광복 이후 미국 선교부와 제휴하여 교단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경쟁이라도 하듯이 신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많은 목사들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본 교단 출신의 목사보다 타 교단에서 온 목사들이 더 많아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본 교단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힘을 규합하여 선교부를 등에 업고 교단을 장악하려는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데 있었다.
교단의 분열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중에 추진되었다. 그동안 교단의 실권을 가지고 있던 기존 주류세력과 새롭게 부상한 신진세력 간에 야기된 알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주도권 싸움으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남침례교 선교부가 신진파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분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신진파가 정기총회의 소집장소 변경안을 들고 나왔다. 전년도 총회에서 다음 총회장소를 포항교회로 정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대전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신진파의 주동인물인 장일수 총무는 몇몇 지방회에 연락해서 장소변경의 진정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이를 1959년 3월 17일 개최된 총회임원회에 회부했다. 그러나 임원회는 그 안을 부결시켰다.
그러자 신진파는 이에 불응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점촌(店村)교회에서 전입한 이덕수(李德秀) 목사가 핵심집사인 김주언(金周彦) 씨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장일수 목사는 임원진 안에서 투쟁하여 전입 교역자들의 세력을 규합했다. 대부분의 많은 교역자들은 뒤숭숭한 교단 분위기 속에서 어느 줄에 서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