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설죽 관련 언론 보도
[광장] 설죽(雪竹)을 아시나요
매일신문 배포 2017-11-04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휴먼앤북스 대표
조선시대의 여성 시인하면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을 떠올린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사대부 집안의 여성인 만큼 현대에 와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은 것이고, 황진이나 매창과 같은 기녀 시인도 유명 인사와의 교류를 통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으므로 인해 평가가 활발했다. 하지만 조선 선조 때 승지 조원(趙瑗'1544~1595)의 첩실이었던 이옥봉(李玉峯)이나 경북 봉화 출신 여성 시인 설죽(雪竹)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그들의 신분으로 인한 이유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봉화 닭실 청암정에서는 경상북도 주최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이 마을 출신인 설죽의 삶과 시에 대해 이원걸 박사의 집중적인 조명이 있었던 것이다.
설죽은 권벌(權橃)의 손자였던 권래(權來'1562~1617)의 여종이었다고 한다. 권래는 시로 문명을 떨쳤던 권필(權韠)의 인척이었고, 권필은 성로(成輅'1550∼1615'호는 석전)와 절친한 친구였다. 권필과 성로는 송강 정철(鄭澈)에게서 학문을 배운 동문수학의 친구였다. 권필이 광해군 때 필화사건으로 귀양을 가다 울분에 차서 죽자, 석전 성로가 자신의 시를 불태우고 세상을 한탄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우정을 알 만하다.
상상을 펼쳐본다. 벼슬보다는 시에 뜻이 있어 한평생을 시와 술과 친구와 더불어 사는 풍류객이 바로 성로였다. 성로는 아내와 사별하고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권필의 고향인 닭실에 놀러 갔다. 그곳에서 어여쁘고 재기 발랄한 설죽을 만났다. 그는 첫눈에 설죽에게 반했다. 설죽 역시 감수성 뛰어난 시인이었던 성로가 좋았다. 그들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금방 사랑에 빠졌다. 친구의 사정을 눈치 챈 권필은 친척인 권래에게 부탁해 설죽의 신분을 해방시켜 성로에게 시집갈 수 있게 한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와 서호(西湖'현재의 양화나루 근처)에서 십 년을 살았다.
"십 년간 석전과 짝하여 한가히 노닐며/ 양자강 가에서 취해 지냈어요/오늘 홀로 떠난 임 계신 곳 찾아오니/ 옛 섬엔 백빈향만 가득합니다.(十年閑伴石田遊, 揚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香滿舊汀洲)"
둘의 행복은 석전의 사망으로 인해 10년 만에 끝이 났다. 이때 설죽의 나이가 26세로 추정된다. 이후 설죽의 행적은 호서지방에서 보인다. '해동잡기', '패관잡기' 등의 여러 문헌에서 설죽은 호서 기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때 설죽이 지은 시 중의 하나로 '완산 객사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라는 작품이 있다.
"피리 소리에 원망이 가득 담겼고/ 밤중의 창가엔 달이 기울어요/ 매화곡 연주하지 마세요/ 외로운 저의 애간장을 태우니까요.(逐秦龍吟怨思長, 月斜窓外夜中央, 遊人莫弄梅花曲, 獨妾天涯易斷腸'한시 번역은 이원걸)"
설죽이 어떻게 해서 호서의 기생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약 20년 정도 호서지방에서 생활하다가 한양으로 올라온다. 한양에서도 고향 닭실을 그리워하는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설죽 생의 마지막은 닭실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걸 박사에 의하면 설죽이 남긴 시는 놀랍게도 167편이나 된다. 권상원(權商遠)의 시집인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뒤편에 166수, '청장관전서'에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다른 조선의 여성 문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다. 또한 그녀의 시는 대부분 깔끔하고 산뜻하다. 앞으로 설죽 시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설죽을 봉화와 경북의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대구경북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시'도도 드물다. 어떻게 잘 꿰느냐 하는 것이 바로 후손들의 일이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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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여류시인 ‘설죽(雪竹)’을 되살리자 |
김 동 룡 - 전 봉화부군수, 행정학 박사 |
2020년 03월 29일(일) 23:29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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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봉화의 여류시인 설죽(雪竹)을 오늘에 되살려 보고자 한다. 설죽(雪竹)은 생몰연대(生歿年代)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조 1500~1600년대의 봉화 유곡(닭실) 안동 권씨 집안의 여종의 신분이었음에도 천부적인 재능으로 많은 시를 남긴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설죽의 재능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0여 년 전 봉화문화원 향토사연구회 소속 이원걸 박사의 노력으로 그에 대한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이원걸 박사의 『설죽의 생애와 시』에 의하면, 설죽(雪竹)은 봉화 석천정사 서쪽 마을에서 생장(生長)하였고, 충재 권벌의 손자인 석천 권래(權來, 1562~1617)의 여종인 시청비(侍廳婢)였으나, 아리따운 미모와 재치있는 말솜씨와 글재주, 그리고 가창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여종으로 글을 익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나, 뛰어난 재주와 문예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유곡의 권씨 문중이 여종이라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을 길러준 인간적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죽의 시는 조선시대 유명시인들의 일화와 시 비평을 담은 홍만종의 『시화총림』소재 임방의 『수촌만록』에 언급되었는데, 여기에 설죽의 시가 언급된 것은 그 만큼 설죽의 시가 당시에 널리 알려졌으며 작품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다는 점을 증빙해주고 있다. 봉화지역에서는 설죽을 여종 출신의 시인으로만 알려지고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타 지역에서는 설죽을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과 동등한 높은 수준의 기녀시인(妓女詩人)으로 인정하고 있다. 통상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녀시인(妓女詩人)으로 송도의 황진이(黃眞伊), 부안의 매창(梅窓)을 일컫는데, 여기에 봉화의 설죽(雪竹)을 더하여 조선의 3대 기녀시인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설죽은 여종이라는 신분을 뛰어넘는 문중의 배려를 바탕으로 뛰어난 재능으로 문장과 한시의 기법을 터득하여, 이별의 정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독한 여심 등을 소재로 한시(漢詩)를 창작했다는 점에서 분명 봉화가 배출한 걸출한 여류시인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설죽이 남긴 시는 유곡삼절(酉谷三絶)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의 시문집인『백운자시고』에 실려 있는 166수와 이원걸 박사가 설죽의 행적을 찾아 전라도, 충청도, 서울지역의 현장을 답사하고 설죽의 작품으로 밝혀낸「백마강회고」를 포함하여 모두 167수가 오늘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봄 단장(春粧 絶唱)”이라는 시 한수를 소개하면, ‘춘장최파의초동(春粧催罷倚焦桐) 주박경영일상홍(珠箔輕盈日上紅), 향무야다조로중(香霧夜多朝露重) 해당화읍소장동(海棠花泣小墻東)’ ‘봄 단장 재촉해서 마치고 거문고 타는데, 주렴엔 붉은 햇살 가득 담겼어라. 향기 머금은 밤안개 때문에 아침이슬 주렁주렁 달렸고, 동쪽 작은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 설죽은 여종으로 태어나 당 시대의 사회체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의 인생을 선택하여 자유분방한 기녀(妓女)로써 전국의 문인명사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신분상 여종이면서 기녀 시인으로 활약한 이는 유례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설죽은 문예적 성과나 행적으로 볼 때 여느 기녀시인(妓女詩人)에 비해 전혀 뒤질 바 없다. 그러므로 설죽(雪竹)은 황진이, 매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조를 대표하는 기녀시인으로, 설죽(雪竹)에 대한 연구성과와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통해 널리 알려 한국문학사에서 설죽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하겠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봉화군에서 설죽시낭송회, 설죽시집발표회, 설죽예술제 등 해마다 설죽을 알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고, 몇 년 전 문화컨텐츠 개발 연구용역도 하였으나 아직 가시적인 사업이 추진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앞으로 설죽 영정제작, 설죽문학공원과 숲길 조성, 설죽백일장, 여류한시대회, 설죽시비 건립, 조선조 여류시인 학술대회, 설죽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 청암정과 석천정사 서쪽 일대를 설죽과 연계한 컨텐츠화 등도 적극 추진할 것을 권하고자 한다. 또한, 강릉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부안의 매창문학공원, 통영의 박경리기념관, 전주의 최명희문학관, 박화성(목포) 문학관 등의 사례도 참고해 볼만하다. 앞으로 봉화군과 봉화문화계에서는 군민과 합심하여 봉화의 문화자원인 여류시인 설죽에 대한 후속 연구와 문화컨텐츠 사업의 활성화, 스토리텔링을 통해 설죽의 문학적 위상 제고에 더욱 힘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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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문인 설죽을 되살리자/ 주주객반/최성달 에세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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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여성단체협, 여성사업 평가대회 : 김교윤
봉화군여성단체협의회는 4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행복한 동행!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란 슬로건으로 2017년 여성사업 평가대회를 개최했다.
여성단체 회원 32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는 여성문화회관 취미반인 합창단의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여성발전 유공 회원들의 시상과 특강 등으로 행사가 치뤄졌다. 이날 특강은 이원걸 박사가 ‘봉화가 낳은 조선 3대 여류시인 설죽’이란 주제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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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봉화송이축제 성황 -송이향 따라 봉화향 따라!-
2014년 9월 27일부터 9월 30일까지 4일간 봉화읍 체육공원과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올해로 제18회를 맞이하는 봉화송이축제와 제33회 청량문화제 행사가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함께 개막했다.
자연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 봉화송이는, 신비에 쌓인 숲속의 보석인 송이의 생태를 관찰하고 직접 캐보고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봉화송이축제이다.
개막식에 앞서 행사장 주무대에서는 봉화소리발표, 목도소리 보존회의 목도‧운자 재현행사가 펼쳐졌으며, 오후에는 이원걸 박사의 설죽시집 발표회 등이 있었다.
이번 송이축제에는 송이와 환상궁합을 이루는 고품질의 봉화한약우를 직접 구입하여 송이와 함께 구워먹을 수 있는 셀프식당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먹거리도 접해볼 수 있었다.
개막 축하공연에는 송대관, 소명, 박구윤, 문연주, 소유찬, 보이프렌드 등 다양한 가수가 출연하여 축제마당에 흥겨움을 더했다.
[출처] 제18회 봉화송이축제 성황 -송이향 따라 봉화향 따라!-|작성자 kbn대한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