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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령남씨대종회(宜寧南氏大宗會) 원문보기 글쓴이: 느티나무(南敬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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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선생 묘 문학기행
시조는 한국 고유시의 정형시다. (勸農歌)일 것이다. 남구만 선생은 호가 약천(藥泉)으로 의령 남씨(宜寧南氏)다.23세에 사마시를 거쳐서 관찰사, 어사, 형조,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 까지 출세 가도를 달리며 인조 때 나서 숙종 무렵을 살다 가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동창이 밝았느냐~’란 단 한 수의 시조로 인하여 남구만 선생을 기억할 뿐이다. 남는 분으로 기억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전부귀(生前富貴)요, 사후문장(死後文章)’ 이란 말이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생긴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문장의 힘인 것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묘
거북이마을 뒷산 보개산 상봉인 감투봉에 원인 모를 불이 났다. 그 불길이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 따라 남일성(南一星) 현감댁 뒤꼍에 이르자 스스로 꺼지는 것이었다.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에 오른 약천 남구만선생이었다. 안주를 준비하였다. 어르신을 처음 뵈오려 가는 길에 어찌 빈손으로 갈까 해서였다. 묘 600m’ 란 이정표에 이르니 그 아래서 반가운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시조문학동인회 회원인 송귀영 용인공원 부사장이었다. 들러 박목월묘소를 참배하게 해준 고마운 분이다. (詩歌碑)가 나타난다. 고색창연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최근에 세운 모양이다.
산소는 여기서 300보 위쪽에 계신다. 서에는 용연(龍淵)이 있는 명당이라고 천거한 곳이다.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나라에서 세워준 석물은 그곳에 그대로 둔 채 이곳 에는 장남의 간략 한 친필 묘갈만을 세워 놓았다. 청렴 검소하신 뜻을 따른 것이었다. 모아 지금의 신도비와 유허비를 올린다.
그런데 ‘동창이 밝았느냐’ 의 시조 배경은 어딜까? 이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인현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장‘씨가 왕자 균(均)을 낳았다. 주지하는 대로 이를 결사반대 하던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아 죽고 남인 세상이 되었다. 서인 정객들은 줄줄이 벼슬에서 파직되는가 하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자기의 호(號)와 같은 이름의 약천샘에 그만 매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심일서당(沈逸書堂)을 짓고 후진을 교육시키며 1년 반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는 이렇게 생겨났다. 그 해가 1689년 봄이었다. 담배 밭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보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공의 출생지며 치사(致仕) 하고 말년을 머물 면서 초당을 짓고 낚시와 집필로 평생을 보내던 홍성군 구항면 거북이 마을이 ‘동창이 밝았느냐’ 이 시조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을 들여 남산~보개산~구항면 거북이마을에 이르는 5.8km 구간에 '재 너머 숲길'(보개산 솔바람길)이란 이름의 둘레길을 조성해 놓은 모양이다. 갸륵하다 할 것이다.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묘도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처럼 드넓은 묘역에다 잔디로 가꾼 비스듬히 오르는 구릉 위에 커다란 봉분에 모셔져 있다.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한 묘였다. 열녀비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며느리가 지극정성 남편을 모신 열녀였던 모양이다. ‘龍(용)’과 ‘仁(인)’ 자를 각각 따서 ‘용인현(龍仁縣)'이라 한데서 '용인(龍仁)'이란 이름은 유래된다 하다 보니 이 일대가 3~4 세기 백제인들의 공동묘지 터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발굴된 묘만도 25기나 되었다. 이를 보니 용인은 삼국시대부터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던 모양이다. 7.6%인데 여기에 내가 용인을 다녀 오가며 본 용인공원묘, 용인 백암공원, 용인천주교묘, 용인수목장 등등을 합하면 용인은 묘(墓)의 시(市)요, 묘(墓)의 나라다. 나지막한 산과 산간계곡의 작은 하천이 발달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고장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 그런가 이 고장은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기로부터 굴러 내려온 수천 근의 바위에 깔려 그만 즉사하고 말았다. 하였다. 혼령은 이승으로 되돌아 왔으나 시신이 바위에 깔려 있어서 접신(接身)할 수 없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충북 진천의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부잣집 외아들의 몸으로 혼령이 들어 가 접신하게 되었다. 죽게 되었다. 송사를 하게 되었다. 판결을 내려 결국 용인의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전설2: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다. 소리였다. 염라대왕이 묻는다.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떠도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생각이었다. 그 몸에 접신을 하였다. 살아났다고 기뻐 날뛰었다. 모두들 죽음에서 깨어나서 하는 헛소리로만 여겼다. 돌아왔소.” 반갑게 반갑게 눈물로 말하였으나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을 인정하노라.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생거진천(生居鎭川)하였으니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천수(天壽)를 누리고 살다가,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의 제사 봉양을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둘 다 어찌나 효성스러웠던지 서로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다투다가 결국 송사를 걸게 되었다. 그러자 진천 원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받았다.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 살아서는 지금처럼 진천의 아우가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거든 묘를 용인에
두고 형이 제사로 모시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래서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 나는 포은(圃隱)과 약천(藥泉) 그리고 박목월(朴木月) 묘를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면서 가만히 그분들을 생각하며 이 나를 돌이켜 보니 초라하기 그지없다. 전공분야가 달라 과거와 같은 고시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남보다 좋은 학벌을 가지고도 출세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운 사람들이다. 것인데, 나는 70평생이 지나도록 나 같은 서민이나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살았을 뿐이다. 만남이요 자연과의 만남이다. 여행작가는 가공의 진실을 쓰는 소설가가 아니다. 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한 때 발견의 기쁨이나 행복을 어느 누가 나만큼 알겠는가. 망팔의 나이에 단독으로 지리산 등의 종주와 해외 단독 배낭 여행의 호연지기를 경험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