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최 호 림
거리란 말보다 얼마나 정다운가
도랑 같고 가까운 사이 같다
숨결조차도 그냥 흘러보내지 않고 바람이 빠져 나가는 뒷모습도 보인다
길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깨 스치는 인연이 지나가고 발자국에 발자국을 찍으며 더욱 단단해지는 바닥
당신을 만나 사랑이 열매 맺은 골목
재개발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하늘의 눈
사람을 찾습니다 구로구를 배회중인... 인적사항이 실린 메시지가 수시로 날아든다 길을 잃어서 아니라 치매를 앓아서 아니라 십중팔구 납치된 것이다 인신매매. 장기를 밀매해서 돈을 챙기는 흉악범들에게 운수 사납게 걸려든 것이다 백주에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돈 몇 푼에 앞잡이 노릇하는 추악한 늙은이도 있다한다 공범의 죄를 면치 못하리라 인간 생명을 갖고 좌지우지하고 인간 생명으로 장난치는 자들 지옥에 가기조차 아까운 자들 무저갱은 따놓은 당상이다 무심하면 하늘이 아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 인간의 악행을 지켜보면서도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슬픔의 깊이
얼마나 사무친 이별인가 갑자기 사라진 새끼를 부르며 텅 빈 외양간을 돌며 울었다 앞산을 쳐다보고 울고 벌판을 바라보며 울었다 울다 지치면 워낭을 흔들어 무거운 슬픔을 새기곤 했다 여물을 씹지 않고 새김질도 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생각날 때마다 허공을 향해 울었다 무정한 주인은 오늘도 어떤 위로의 말 한 마디 없이 비탈의 자갈밭을 갈며 이러이러, 워워 다그치기만 했다 가다가 멈춰 울고 몇 걸음 내딛다 또 울고 반나절이면 다 갈 밭을 종일 갈아도 반도 못 갈고 밭고랑마다 어미 소의 눈물이 내 슬픔과 함께 한 날 있었다.
목련
손바닥만한 마당에 한 그루 심은 것이 예순 해가 되었다 비바람 눈보라를 거뜬히 이겨내고 뿌리 내려 가지를 뻗고 그늘을 넓히면서 해마다 꽃을 피운다 집이 환해지고 새들이 날아들고 구름도 머물다 간다 날 보고 시집와서 가난을 걷어낸 아내를 빼 닮았다
눈이 입이다
눈이 입이다 보는 족족 삼킨다 두 눈 가득 새겨넣는다 닥치는대로 먹고 마시는 입보다 눈이 더 무섭다 보이는 것은 풍경이든 하늘이든 바다든 벌판이든 다 삼킨다 광장을 삼키고 분수를 삼키고 사람들을 집어 삼킨다 삼키는 것은 모두 호수 깊이 차곡차곡 쌓인다 말 한 마디 못하는 눈이 비수를 품으면 소름이 돋는다 눈에 핏발을 세우면 살기의 피냄새가 난다 우리 몸에 가장 독한 것이 눈이다 가장 부드러운 것도 눈이다 눈은 마음이다 숨길 수 없는 속내다 웃고 있는 눈이 가장 무섭다
꽃길
대지가 잠 깨어 뜨거운 기운을 모으면 눈 속에도 꽃이 핀다. 피어서 밝은 꽃들이 강을 이루어 흘러가는 천사들의 합창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설렘을 앞세우고 찾아와 서로 반겨 맞는 얼굴들 계절도 무색하게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벌 나비를 부르는 그리움의 몸짓들이 꽃길 따라 향기를 더하는 어느새 그대가 꽃이다
산수유
매화가 피고 동백이 피었다는 남도에서 달려 온 소식 3월이면 구례 마을은 봄이 노랗게 온다. 꿈도 노랗고 노래도 노랗고 인심도 노랗고 사랑 또한 노랗게 익으면 마을 사람들은 그냥 바쁘다 늘 못 잊는 사람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값없이 주어지는 황금빛을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눈 가득 담아 가는 구례의 자랑이다
사춘기 잠들지 못하는 밤은 동굴 같은 적막이 깊었다. 달밤 같은 옛날에 가끔 전설을 불러내기도 했고 숨소리조차 금이 갈 팽팽한 어둠 속에서 외로움이 뼈 속에 사무쳤다 인간 냄새가 그리웠던가. 처마 밑으로 날아든 박쥐 초저녁에 호롱불을 끌 만큼 너도나도 가난을 살아 별들이 내려와 위로했다 먼 발의 개 짖는 소리 실루엣처럼 뜬 얼굴이 단칸방의 유일한 꿈이었다 대숲을 적시는 바람소리 도깨비들의 놀이터였다 까닭모를 슬픔을 적시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이 시대를 살다 9
본능에 충실한 짐승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배고프면 먹이를 찾고 배부르면 잠을 잡니다. 인간만이 배부르면 시시비비를 일삼고 극에 달한 뻔뻔함으로 가는 곳마다 풍기는 악취에 짐승도 피해 다닙니다 거짓에 익숙해져 참이 무색해진 세상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짐승보다 바닥을 삽니다
인연 이후
죽으면 멀어지고 죽으면 잊어간다 아무리 별 같이 빛나던 사람도 삶을 내려놓는 순간 그 자리는 지워 진다 이름을 남긴다 해도 산 사람 속에 묻혀 간다 생전의 인연으로 눈물 적시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자고 산 사람은 그렇게 산다. 살아서 바쁜 세상에 늙었다고 밀려나는 세상에 죽은 사람까지 챙길 수 없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이뿐 먼 불빛 바라보듯이 이따금 떠올려 그리운 것이다
골목
마트료시카처럼 점점 더 작아진 도랑 같은 골목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피해 담에 기대 선 흔적들이 없는 눈에 죄다 보인다 거리보다 얼마나 정다운가. 어깨 스치는 인연도 만나는 가까운 사이 같다 발자국에 발자국을 찍으며 더욱 단단해진 바닥과 골목을 마주한 처마는 이웃사촌 담너머 꽃나무가 반겨 맞는다. 길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전선위에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한 소식을 전해온다. 한 뼘 하늘이 길게 지켜보는 지나는 발소리로 누구인지 안다 이 골목에서 당신을 만나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데 재개발 현수막이 걸려 있다
무명 동굴
촛불을 켠 순간 잠자던 어둠이 놀라 깨어 적막과 함께 매달린다. 잘 아는 발길도 뜸한 곳 뱀의 혓바닥으로 반딧불이 한 마리 날기에는 너무 벅차고 캄캄하다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전설을 주워 읽는다. 숲이라면 매우 무성하고 호수라면 아주 깊다 어디선가 박쥐의 날갯소리 경계하는 게 분명하다 견고한 천년의 품을 안고 미물과 이끼가 산다 숨긴 가슴에 다가서서 신비를 꺼내려 했으나 더는 안 된다고 키 낮추며 막아선다.
상처
어떤 위로가 상처를 달랠까 보이는 상처는 딱지가 앉아 새살이 돋으면 아물지만 보이지 않는 상처는 딱지가 앉지 않고 새살도 돋지 않는다. 깊이 파이고 넓어진 마음의 상처는 때마다 아픈 소리 튀어 나온다 한번 금이 간 꽃병처럼 깨어진 믿음이 아물고 당신이 용서한다 해도 처음으로 돌아갈 순 없다 더구나 상처 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기에 흔적조차도 아프다
자벌레 이 세상에 와서 한 가지라도 반듯하면 엇길로 가지는 않겠지요.
걸음마다 일정한 보폭으로 그런 자 하나 갖고
남을 재지 않고 나를 재면서
성급하게 건너뛰는 욕심을 버린다면
그림자라도 잘못 산 생은 아니겠지요.
달팽이 2
뜨는 해를 따라 온종일 바쁘게 달려가는 그대 지는 해를 만나는 순간은 나와 다르지 않다
봄 당신을 만나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삼삼오오 몰려다닌다 당신은 천의 얼굴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 산천을 적시는 노래로 벌 나비를 불러 모아 흥을 더 한다 당신은 어디서나 만나고 창 안에서도 보지만 문을 열고나서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린 바람 먼 산이 성큼 내려선다 골목을 지나는 발걸음이 환하다 동백을 따라 매화가 매화를 따라 산수유를 따라 목련이 눈부신 벚꽃따라 영산홍이 장미를 만나기까지
자리
회사가 직원을 자르려면 우선 자리를 없애버린다 자리가 없으면 일을 못하고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그만 두라 하지 않아도 맡기는 일이 없다보니 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유능해도 도리없다 말석이라도 자리가 있어야 존재가치를 느낀다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도 자리가 없으면 밀려난다 을이 갑을 이기지 못한다 자리를 잃고 헤매 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잠 깨고 나서도 한참이나 슬펐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랑물
아무리 바빠도 앞질러 가지 않네. 나만 바쁜 게 아니라 모두 다 바쁘고 열심인데 마음이 급해서 경적을 울리는 차들처럼 재촉하거나 새치기하지 않네. 그 바쁜 중에도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당기며 흩어 지지 않고 리듬을 타네. 서로 격려하는 말도 나누네. 수심을 키우지 못해도 하늘자락이 얼비치고 구름도 따라가며 격려하네. 욕심 부리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가네
사랑 사막에서 늑대를 보았다면 아마 여우를 찾아왔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더욱이 그대가 머문 곳이면 튠드라든 험한 계곡이든 바다 속 어디라도 달려 갈 것이다 한사코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기도는 무성하게 자라도 열매 없는 가을나무 같네. 응답이 없으니 초조해서 떼쓰듯 복을 내려 주소서!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너덜너덜 헤지도록 두들기네. 이레에 두 번 금식도 한다며 갈수록 사무치게 매달리네 사람들이 우우 몰려다니는 광장이나 큰 길에서도 낙타 위에 앉아서 바늘귀로 들어갈 거라며 소리 높여 기도하네 마구 움켜 쥔 것이 모자라서 여전히 기도를 쉬지 않네.
머나 먼 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이 있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던 일 모두 내려놓고 너도나도 잔뜩 들떠서 성 밖으로 몰려가던 날 하나님의 아들이라 무리를 선동하고 다닌 예수라는 젊은이와 강도 둘 예나 지금이나 올 곧게 살다보면 돌을 맞고 권력에 맞서면 없는 죄도 만들어 덮어씌운다 가시관을 쓰고 피 흘리며 맨발로 통나무 십자가를 메고 한발 또 한발 내딛다가 지쳐 쓰러지면 무자비한 채찍질 그때마다 와와 함성이 일고 골고다의 언덕까지는 멀고도 험한 길 속죄양이 된 메시아여!
낮은 곳
당신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는 낮은 곳에 산다
그래서 만난 사이
낮은 곳에는 따뜻한 노래와 그리운 그림자가 있고
새처럼 훨훨 날아오르지 못하지만
밤마다 별들이 놀다 가는 곳
처음 사랑도 삶처럼 뜨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