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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성탄은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 2022년 12월 25일 주일 예배
본문 / 마태복음 1:18-25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아 십자가와 부활로 의를 다 이루신 하나님께는 영원한 영광이 그 은혜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완전한 평화가 충만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죄인과 함께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나와 함께 하고 싶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까지 오신 것입니다. 이 성탄절이 지금까지 보낸 또 하나의 성탄이 아니라 나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어떻게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겠습니까? 믿음의 길을 자기 혼자 가는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나 혼자서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여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지금도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싶어도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원치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 안에서 함께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혼자 자기 마음대로 믿음 아닌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듯이 그 말씀은 살아있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올해에 몇 번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원할 때마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지 못할 때 가끔 들리기 때문에 기억에 다 남아 있습니다. 올해 제가 마음으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4월에 성경 100독을 마치고 갈메못 순교지에 갔을 때입니다.
성경 100독을 하면 갈메못 순교지에 갈 것이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게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목욕까지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대천에 한 17년 이상을 살면서 처음 가봤습니다. 순교자들의 그 믿음을 하나 하나 살펴보니 제 자신이 부끄럽기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에 말입니다. 순교자들이 죽기 전에 한 말들을 기록해놓았는데 이게 믿음인데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까?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며 담대하게 망나니의 칼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망나니가 돈을 받아내려고 한 칼에 목을 쳐내지 않아 목이 반쯤 붙어있어 그 고통에 온 몸이 뒤틀리고 경련을 일으켰다는 것을 읽을 때에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전시된 그림과 유품을 본 후에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니? 너무도 분명하게 들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 당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가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을 때 베드로가 근심하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너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느냐는 그 물음에 눈물을 흘리고 울먹이며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때 주님이 나와 함께 가자!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아멘! 하였습니다. 이제는 날 버리고 너 혼자가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는 말씀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 대해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배설물이라고 버린 그 은 30에 즉 이 세상의 영광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혼자 어두운 곳으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하기 원하셨지만 유다는 그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천국을 팔아 지옥을 사고, 안식을 팔아 영원한 고통을 사는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혼자서 영원한 어둠과 고통으로 가는 그 불쌍한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한 빛과 안식만 있는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는 너 혼자 가지마! 나와 함께 가자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 영혼과 마음을 향해 애타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 혼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는 말씀을 말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 가십니까? 주님과 함께 하지 않고 혼자 가는 그 길의 끝은 어디겠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과 함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은 내 육신에 편한 게 아닙니다. 연습하고 훈련이 되지 않으면 아주 불편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타락한 자들입니다.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살기 원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자신을 위해, 육체를 위해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타락을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고 춤을 추고 나팔을 불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좋아하더니 곧바로 하나님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조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 건 좋은데 내 마음대로 섬기겠다는 겁니다. 그건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하나님의 밑으로 들어가 그 종이 되어 그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아버지가 없는 먼 나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세상에 온 타락한 인간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에만 즉 함께 할 때에만, 순종할 때에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순종할 때에만 만족과 안식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혼자서 살기는 하는데 그 존재의 상태는 영원한 고통과 불만족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삶이 고통스러우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아도 즉 순종하지 않아도 인간의 존재는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없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즉 불순종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인생을, 말씀과 뜻에 순종하지 않고 제 멋대로 섬기는 사는 자들을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고 함께 믿음의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치 않는 겁니다. 교회에 나와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믿는다고 하여도 여전히 자기 혼자 가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싫은 것입니다. 믿어도 내 마음대로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뜻에는 절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주여 주여 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인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과 영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과 죄와 싸우며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 함께 하는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제 멋대로 섬기며 나도 하나님을 알고 믿음이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우기며 자기 혼자 가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혼자 가는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믿어도 될까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둠 안에 있는 영적인 소경인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곧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좁은 길을 가셨고 나와 함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죄인들은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혼자 가던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대속해주신 그 은혜는 나를 위해 나 혼자 자기 마음대로 가던 그 죄를 대속해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십자가에 자신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살며 자기 혼자 가고자 하는 그 교만한 죄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걸 못하는 겁니다. 은혜는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그 욕망과 자아를, 주인 됨을, 그 교만과 자존심과 자아숭배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짜 그리스도인인 겁니다. 교회에는 이 가짜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은데 진짜는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나를 위한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많은 성도들도 다른 하나님을 섬기며 자기 혼자 가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는 해도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그 길의 끝은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지옥의 불구덩이 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의심 없이 나 혼자 믿는 척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열심과 정성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기 위해 보낸 예수님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여 주여 하며 열심을 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는 것입니다.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그 교만한 나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이 내 마음과 영에 없으면 누구도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교만한 나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고 부인하는 그 십자가의 믿음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 말입니다.
이것은 머리와 지식으로 뻔히 알아도 못하는 것입니다. 꿈에서 곰이 나를 쫓아와 도망가려고 하는데도 막상 발은 본드를 붙여놨는지 천근만근 무거워 안 떨어지는 것처럼 십자가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도 실제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순종하며 주님과 함께 가는 사람들은 적은 것입니다.
교회만 다녔지 내가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내가 죽고 주님이 인도하는 데로 함께 가는 것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십자가의 좁은 길은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함께 가는 그 십자가의 길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아멘? 잘 안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 길만을 가야 합니다. 내 사전에 나 혼자 가는 길은 없다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죽더라도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가는 그 생명의 길만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믿음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남은 있는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나를 위해 살고 싶은 그 죄의 세력과 말입니다. 그것이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는 좁은 길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왜 지식으로는 다 아는 성도들이 순종하지 못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다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의 믿음이 없으면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부인이 없이는 임마누엘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와 은사를 받았어도 서서히 다 죽는 겁니다. 자신과 싸우는 게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육체로 타락한 죄인에게 자신과 싸우는 것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그 싸움이 길어지면 많은 성도들이 서서히 싸움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믿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오래 다니면 지식은 늘어나 아는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으면 그건 죽은 지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처음 믿은 것처럼 믿어야 합니다. 오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과 싸우면 날마다 그 은혜는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은혜는 다 식어버립니다. 먼저 되었으나 나중 되고 영으로 시작했으나 육으로 마치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은 잠자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후반전이 아름답고 그 끝이 더 좋은 자가 될 겁니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서 선교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했는데 이쪽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 계셨고 이쪽에는 젊은 분들이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신 목사님들은 말씀을 전하는 저를 하나도 쳐다보지를 않는 겁니다. 순간 말씀의 문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분도 쳐다보지를 않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쪽에 앉은 목사님들은 다 저를 쳐다보는 겁니다. 무당들에게 전도를 많이 하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젊은 무당들은 전도가 쉽게 된다는 겁니다.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늙은 무당은 안 되더라는 겁니다. 이게 무서운 말입니다. 늙었다는 것은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늙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은혜가 새롭게 되지 못하자 마음이 서서히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 아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쓴 ‘너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라’ 라는 시에서 ‘너 낡아지지 마라 더 이상 나를 품지 못하리’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낡아지는 것은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러면 마음은 굳어져버립니다. 단단하게 굳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떨어지면 열매를 맺겠습니까? 그 마음과 영에 하나도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나도 순종을 않는 것입니다. 단단한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마귀가 빼앗아 간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부드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심령이 가난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싹이 나고 줄기가 나와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하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동행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자기 혼자 가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없습니다. 자신을 부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해 떠들어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고 혼자 제 멋대로 믿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는 나 혼자 내 마음대로 믿으며 가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자신이 몰라서 그렇지 우리 교회에 혼자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이제 클 대로 컸는데 어떻게 어린아이가 됩니까? 묻겠습니까? 어린아이는 부모를 손을 꼭 잡습니다. 보호자의 손을 잡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해야 안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손을 꼭 잡던 어린아이도 크면 더 이상 손을 잡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손을 찾아 꼭 잡아달라고 할 때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예쁘고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크면 무섭습니다. 결단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은 성도들아! 내 손을 잡지 않고는,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인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혼자 제 멋대로 믿으며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이는 목사 말도 듣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은 듣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피 흘리는 그 손을 잡으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자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신 겁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갈 사람들입니까? 주님이 그것을 모르십니까?
예수님은 함께 하지 못할 자들과 함께 하러 오신 것입니다. 성탄은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의 은혜이며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임마누엘의 은혜를 받고 그 믿음으로 거듭났다면 십자가에 날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찾아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난 베드로는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다니지 못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모시고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네 마음대로 살면 안 돼! 내가 원치 않아도 주님이 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곧 나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 내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에 은혜를 믿고 나도 그 십자가에 날마다 나를 못을 박고 주님이 원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믿음인 것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송년주일의 결론도 십자가입니다. 임마누엘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이 성탄을 맞아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가며 천국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