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튼의 성서해석 50
우리는 왜 성경을 지키려다 성경을 잃어버리는가?
[맹신과 곡예를 넘어, 정직한 얼굴로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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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선 손님과 가짜 계엄령 (Exigency)
평화로운 신앙의 마을에 ‘현대성’이라는 낯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과학적 발견, 인권의 확대, 생태적 위기라는 손님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환대하는 대신 ‘괴물’이라 규정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급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 비상방책(Exigency)의 시작입니다. 성경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우리는 우리만의 ‘가짜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질문을 금지하고, 의심을 죄악시하며, 성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립니다.
2. 덮어놓고 믿는 안락함 (Credulity)
그 성벽 안에서 우리는 맹신(Credulity)이라는 달콤한 잠에 빠집니다. “성경이니까 현대 과학과 역사의 잣대로도 무조건 다 맞아야 해”라고 고집 피우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지적인 게으름’입니다.
문자라는 껍데기를 지키느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 즉 발화 의도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족보의 숫자가 하나 틀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이, 그 족보가 외치던 ‘소외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잊히고 맙니다.
3. 피로한 신학적 서커스 (Gymnastics)
하지만 세상의 질문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지적 곡예(Gymnastics)를 시작합니다. 빤히 보이는 차이를 메우기 위해 억지 논리를 짜내고, 고대의 은유를 현대의 도표로 바꾸려 애씁니다.
이 피로한 서커스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성경을 수호한다는 명목하에 행해지는 이 정교한 비약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 눈에 기독교를 ‘말이 안 통하는 집단’으로 고립시킬 뿐입니다.
4. 현실이라는 이름의 회피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곁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이 논쟁이 피곤하다며 ‘실용적 경건’ 뒤로 숨어버립니다. 당장 교회가 커지는 것, 내 마음이 평안한 것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시대의 고통(차별, 기후 위기, 민주주의의 후퇴)을 외면한 채 얻는 평안은 모래 위의 성과 같습니다. 그것은 정직한 신앙이 아니라, 거룩한 단어로 포장된 ‘현실 안주’입니다.
5. 이제, 정직한 위기를 마주합시다
진짜 위기는 성경에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내 상식과 교리’라는 작은 상자에 가두려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해석은 언제나 불충분(Deficient)합니다. 하지만 그 불충분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문자의 감옥에서 나와 하나님의 진짜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2,000년 전의 화자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발화 의도—사랑과 정의, 회복과 환대—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진짜 과제입니다.
[맺음말]
성문 밖으로 밀려나 외로운 길을 걷고 계신가요? 억지 논리(Gymnastics)를 부리지 않아도, 덮어놓고 믿지(Credulity)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정직한 고뇌 속에 이미 계십니다.
오늘, 비상계엄령을 거두고 성경의 창문을 활짝 엽시다. 거기,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