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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는 좋고 사닥다리는 싫은 사람>의 줄거리 :
십자가가 좋아서 세상에 대한 죽음을 애써 생활화 하는 사람 중에는 야곱이 꿈에서 본대로 땅에서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너무나 많습니다.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장자라고 속이고 우기던 일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염소 새끼의 가죽인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몸을 입고 자기가 장자라고 우기는 일을 멈춘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기를 무척 좋아함에도 결코 사닥다리 타고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장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십자가는 좋고 사닥다리는 싫은 사람
(창세기 28:1~22)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붓감을 선택하기 위해 하란으로 떠날 때 이삭을 데려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면서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에서의 위협 때문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일 것 같았기에 하란으로 피신을 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머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누렸던 장자의 특권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태어나서 열다섯 살까지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것을 평생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삭 또한 그 특권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특권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예정 가운데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는 다른 출발점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칠십오 세에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 등지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는 체험을 하며 아버지가 보고 계시던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가 왜 그러실까? 아버지가 왜 나를 죽이려 하실까? 왜 나의 결혼에 대해서 아버지와 나를 배제하고 엘리에셀에게 위임하실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아버지가 보고 계셨던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고, 그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 갖고 계신 절대 주권을 보며 장자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야곱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브라함이 출발했던 하란으로 보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출발지로 갈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아버지로부터 영광의 하나님 보는 것을 자기의 특권과 직업으로 상속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러지 못했고 이에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처음 장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출발점으로 보냅니다.
한편 야곱이 하란으로 피신하여 가던 중에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야곱에게도 영광의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야곱에게 영광의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주권적으로 상황을 주장하셔서 십자가 효과가 나타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일하시는 모습이 왜 다른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따질 수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마음은 십자가 예수님 안에 있었지만 야곱의 상황은 십자가 효과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것과 십자가 효과 안에 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이 야곱의 마음에서 영광의 조명을 받으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란 이 세상에서 야곱에게 주어져 있던 모든 것을 없애버리시는 것입니다. 루스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자던 야곱의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특권에 대한 열정으로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삭은 이것에 대해서는 야곱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이미 리브가에게서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이 모든 속임의 과정 자체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상속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야곱에게 상속합니다. 이를 통해 야곱은 정말로 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관심 있었던 것은 이 세상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들이 있었기에 장자의 특권을 노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장자의 특권을 받아냈지만, 주어진 상황은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장자의 특권을 받고자 했으나, 장자의 특권을 받자마자 이 세상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다 잃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 집안의 장자에게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효과입니다. 다만 야곱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내 마음에는 더 이상 세상 것이 대상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야곱은 바로 이 십자가 효과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효과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은 오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었기에 마음에서 세상 것들을 자발적으로 다 버렸습니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버리는 자는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서는 이러한 자발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원하던 세상 것이 실제로 다 없어지고 맙니다. 좋아하던 세상 것들이 강제로 박탈되는 상태가 십자가 효과입니다.
이렇게까지 세상 것이 다 없어지기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세상 것을 다 떨쳐내십니다. 그 결과 야곱은 캄캄한 밤에 루스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자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속여서라도 장자 권을 빼앗으므로 갖고 싶어 했던 이 세상 것이 정작 장자의 명분을 받게 된 이후에는 싹 다 없어지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효과입니다.
야곱에게는 십자가 효과가 꼭 필요했습니다. 십자가 효과가 없다면 야곱은 계속해서 영광의 세상 것을 보았을 것이고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듯이 야곱에게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야곱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 자리에 서게 됨을 드러내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마음에서 영광의 세상 것들을 다 없애십니다. 이것은 장자의 특권 때문에 주어져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장자란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일대일로 직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장자의 자리를 얻은 후에도 여전히 땅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세상 것들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장자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장자인 야곱을 하늘의 장자로 바꾸시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야곱에게는 십자가 효과가 필요했습니다. 야곱이 마음으로 직면하고 있었던 세상 것들을 다 없애버림으로써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굉장히 놀라운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 모두는 야곱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믿음을 상속하는 것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을 선택하여 은혜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이나 이삭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전부 야곱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에서 같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에서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9절을 보면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헷 족속의 아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걱정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의 자식인 이스마엘의 자손 중에서 다른 아내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서의 태도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중에 장자답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효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에 자기의 체질이 영광의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바람대로 영광의 세상 것들을 마음에서 버리고, 죽이고, 없애고, 등지는 과정을 자발적으로 겪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계속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세상 것들을 잘라내는 과정을 밟아갔던 것입니다. 한편 야곱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효과를 통해 야곱에게 영광의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사닥다리가 의미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사실 천사들에게는 사닥다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닥다리는 어디까지나 사람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도구입니다. 이 사닥다리는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아있다고 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여주신 뒤에 사닥다리가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야곱아! 이제 너의 마음이 올라와서 하늘에 있는 나와 직면해야 한다. 내가 너를 예정하고 선택한 이유인 장자의 자리에 서서 장자의 특권을 누려라. 나를 즐기고, 나를 가지고, 나로 부자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사닥다리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야곱이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세상 것을 다 제거하는 십자가 효과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은 세상에서 안정된 미래를 향한 길을 선택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계셨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주권적 계획입니다. 그리고 꿈을 통해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야곱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미래에 대한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두 가지를 금하셨습니다. 첫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는 이방인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이방인의 기도에 대해 마태복음 6장 7~8절을 보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희 삶을 위한 필수조건들은 하나님께서 너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계획하셨으니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서 깬 야곱의 기도를 보면 20~21절에서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계셨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별도로 생각하는 미래에 대해 기껏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에 대한 바람을 간구합니다. 사닥다리를 통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대신에 안정된 미래라는 길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길을 걸어간 야곱은 말년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그야말로 험산준령을 넘어야 되는 인생길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정표입니다. 십자가를 좋아하여 붙잡고 있는 분들도 사닥다리로 올라가지 않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봅니다. 야곱처럼 적극적으로 이 땅에서의 자기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지 않더라도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너무나 강렬하게 십자가를 붙잡는 이단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계에서 십자가에서 죽는 일은 평균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한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단인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 알았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옷 입고 승천하여서 보좌 우편까지 가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야곱이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야곱은 20~21절에서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을 다 이루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입을 옷이나 먹을 떡을 주시지 않으실까요?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전혀 듣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야곱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자마자 ‘내가 잃어버린 세상 것을 다시 얻을 가능성이 생겼구나!’라는 마음을 갖고서 자기가 그리는 미래를 말하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 계획을 갖고 이루시는 것에 대해서 들을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마음에 세상을 향한 애착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눌리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포기해야 했던 소원들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태도는 22절에서 계속됩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라고 합니다. 야곱이 세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야곱은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사닥다리를 꿈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를 보았다면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루스 들판에 돌을 세우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라고 말하는 야곱의 태도는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장면을 굉장히 좋게 여깁니다. 야곱이 루스 들판을 벧엘이라 하고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완전히 정신 없는 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꿈에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해놓고 깨어서는 자기가 누웠던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여호와의 집이라고도 말합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8장 29절에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러러보시는 분이심을 언급합니다. 이에 야곱은 자기가 배를 붙이고 잠을 자던 땅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21~22절을 보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자기 삶을 위해 취직시키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듯이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예배당의 종교 생활과 똑같은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려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앞서 야곱은 염소 새끼 가죽을 입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이것이 속임수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여 장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옷 입었다는 것은 ‘나는 당신들이 알고 있는 육체를 입고 말하고 행동하던 내가 아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옷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장자다.’라는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속임수와 같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하나님의 장자가 되기를 우기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육체의 몸 대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다는 것을 우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다는 의식을 생활 속에서 도출하고 기억해 내면서, ‘나는 예수님의 옷을 입고 있다.’라고 말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부활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자가 아니라는 것이 들통난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벗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고 내가 하나님의 장자임을 우기는 것이 중단되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일은 멈춥니다.
사닥다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가신 연쇄 과정입니다. 이 사닥다리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마음으로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장자의 자리에 서려고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 야곱의 사건을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왜 십자가에서 죽는 것에서 끝나면 안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십자가에서 죽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부딪히는 상황이 다음과 같습니다. 눈으로는 계속 세상을 봅니다. 그러면 마음이 따라갑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기는 것을 압니다. 그럴 때 이건 아니다 싶어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계속 병행합니다. 이건 마치 운전할 때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동시에 밟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눈으로 세상을 보는 한 마음은 세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지만 어느새 마음은 또 세상을 따라갑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붙잡는 힘이 약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정도 할 수 있으면 충분히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십자가를 붙잡는 힘이 약한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약하게 붙잡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죽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의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은 반드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한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떠났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떠날 곳을 정하지 못했기에 다시 세상으로 향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옷 입은 자라는 의식이 없다면 마음은 절대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지 않습니다.
‘육체의 몸은 그리스도의 할례인 십자가에서 잘렸고 나는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라는 의식이 강해야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붙잡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옷 입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염소 새끼 가죽을 입었다는 의식을 주장하고, 우기고, 기억하고, 내세울 수 없다면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은 다시 재생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재생된 육체를 입고 있는 나를 또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이 반복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면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의식이 없기에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않습니다.
십자가 가족들이 강릉에 오시면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 강릉역까지 바래다 드립니다. 강릉역을 십자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많은 분들이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강릉역까지 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차를 타고 강릉 시내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제가 바래다 드린 분들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강릉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갑니다. 그러나 저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없기에 강릉역까지 갔다가 다시 강릉 시내로 돌아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세상에 대해 죽는다면 그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라는 목표가 있어야 떠날 수 있습니다. 서울 가는 티켓을 사지 않은 채 강릉역에 백 시간, 천 시간 머물러 있어 봐야 강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울로 가겠다는 목표 의식이 있고 티켓을 끊어야 합니다. 그 티켓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 몸을 입어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의식을 갖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속임수와 같습니다. 속일 수 없다면 육체를 입고 있는 그게 나입니다. 내 속에서 그들의 생각에 어긋나는 속임수의 이야기를 나에게 강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옷을 입은 자라고 속이지 않고 우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부활 승천의 과정을 거쳐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옷 입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맴돌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24시간 십자가를 붙잡아도 세상에 대해 죽지 않습니다. 끝없이 세상을 향한 재생이 반복될 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면 그 영광의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선민임에도 영광의 미래를 내다보며 다른 길로 접어듭니다. 이로부터 험악한 생애가 시작됩니다. 야곱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장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면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 미래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시려고 시동을 걸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의 눈을 통해 끊임없이 바라보는 대상들에게 마음이 붙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그렇게 마음이 세상에 붙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지만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기에 이 십자가의 죽음과 마음에 세상을 담는 재생의 과정이 무한 반복됩니다. 이것을 십자가 생활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은 세상을 등지는 것입니다. 다만 세상을 등진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고 장자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이유는 하늘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가려는 목표 의식이 없는 자들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붙잡고 죽으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향하여 재생됩니다.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릉역까지 갔어도 서울로 가겠다는 목표가 없는 사람은 강릉 시내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늘로 향하는 사닥다리가 있고, 내 미래에 대한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길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는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예수로 옷 입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그 의식을 모든 사람 앞에서 주장하고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기지 않는 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건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옷 입었다고 속이지 않고 우기지 않는 한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이제 강릉역을 떠나듯이 십자가 역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해주시옵소서. 떠나려면 예수님으로 옷 입은 자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 모두가 속임수라고 할지라도 우겨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내가 예수님으로 옷 입은 자라는 것을 우기며, 생활 현장 모든 곳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장자의 특권을 누리게 하시며 땅에서는 아버지가 계획하신 바가 다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