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부득이한 모임에서 삼가야할 밤이슬을 맞고 새벽 2시에 어떻게 출발하나, 체력이 버텨내 줄까 걱정하며 10시반 쯤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하는데 다시 눈이 떠진 것이 12시, 다시 뒤척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것이 새벽 1시. 몸에 물을 맞으며 이슬 자욱을 지우려 하지만 적지않은 양의 이슬 기운과 적정한 시간이 경과하지 않은 관계로 컨디션이 정상일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1시 40분 전화가 울려 모임 장소를 확인해 주고 전날 준비해 두었던 배낭에 몇가지를 더 채워 넣고는 집을 나섭니다. 약속 장소, 태장 초등학교 근처에서 다시 전화 받고 확인하고 모이니 다른 일행은 그대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벌써 안성지역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이서 차를 타고 정확히 2시에 출발합니다. 차 안에서 잠을 좀 자야겠는데 영 잠이 들지 않습니다. 합류장소는 인삼 랜드, 죽암 휴게소 근방을 지나는데 벌써 인삼랜드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옵니다. 수원을 출발한 지 한시간 반만에 인삼랜드에서 일행을 만납니다. 그 쪽이 4명, 일행은 총 7명이 되었습니다. 함양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시 출발,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채 한시간이 안되어 함양 휴게소에 도착합니다. 새벽 4시 반, 아침을 먹기에 이른 시간입니다만 함양 휴게소를 나가면 아침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을 듯 싶어 억지로 국밥 한 그릇씩을 먹기로 합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김밥을 사려고 하였더니 김밥이 없다며 팔지를 않습니다. 백무동 입구에서 라면을 사기로 하고 가다가 김밥을 파는 곳이 있으면 사고 아니면 수퍼에서 햇반을 사기로 하고 출발합니다.
함양 IC를 나와 마천으로 향하는데 전에는 기억이 없던 아주 높고 경사굽이가 심한 고개를 올라갑니다. 아주 큰 산 하나를 고갯길로 넘는 것 같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아주 높은 산 에 새로 길을 내어 직접 백무동으로 연결한 것 같습니다. 전에는 인월로 해서 백무동으로 들어 왔으니 길이 생소했던 것입니다. 백무동에 도착하니 86년인가 87년인가 왔을 때와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펜션이 지어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을 곳도 있고 사람들이 꽤 많이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5시 50분에 도착하였으니 6시면 등산을 시작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김밥 대신 도시락을 싸 준다기에 도시락 사고, 라면 사고 어쩌고 하느라 정작 매표소를 통과한 것은 6시 20분이었습니다.
역시 지리산입니다. 이 영산을 오르는데 나는 너무 불경스럽게도 최소 2 - 3일은 근신해야할텐데 바로 전날에도 근신하지 못하고 이슬을 맞은 후유증이 당장 나타납니다. 몸은 무겁고 숨은 턱에 닿습니다. 말로만 듣던 공포의 한신 계곡은 그래도 등산로가 많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곡이 길게 이어집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리산의 그 웅장한 계곡미를 이 한신 계곡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생각보다 가파른 길이 금방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에 백무동 길로 하동바위, 참샘으로 이어지던 등산로는 시작부터 급경사로 허덕거리던 기억이 나는데 이 한신 계곡은 가파르고 위험하기로 이름높건만 마지막 가파른 구간을 제외하곤 아주 아름답고 유장한 계곡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깨끗한 계곡 바위와 풍부한 수량을 가진 청류, 곳곳에 걸린 계류 위의 철다리와 흔들거리는 다리들, 힘이 들면서도 아 아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산을 오릅니다. 세석 바로 밑의 구간, 계곡물이 끊어지는 지점은 계곡 너덜지대로 등산로가 나 있는데 폭우나 악천후 시에 참으로 위험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한신 계곡은 악천후 시에는 아주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두에서 치고 올라가는 분을 부러워하며 그러나 무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쉬면서 오릅니다. 세석까지 어느 지도는 네시간, 어느 지도는 세시간 40분 표시되어 있습니다만 우리는 세석 샘물까지 세시간 20분 걸린 것 같습니다. 세석은 작년에도 느꼈습니다만 이제 나무들이 제법 자라 80년대 중반에 보던 그 초원으로 덮인 평전이 아닙니다. 작년 지리산 종주때 세석 산장의 빗물 내려가는 하수구 속에서 자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의 쏟아지던 별들도. 세석에서 물병에 물도 채우고 약간의 간식도 하고 20여분쯤 쉬다가 다시 출발하여 촛대봉에 오릅니다. 작년에는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만 올해는 촛대봉 정상에서 또 20여분 쉽니다. 날씨는 좋습니다만 저 멀리는 봉우리들이 구름에 덮여 있습니다. 멀리 저기가 반야봉인가 중얼거리니 옆에 있던 사람이 대뜸 저기는 반야봉이 아니고 오른 쪽으로 보이는 연봉이 반야봉 노고단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어림도 없어 보여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저기가 반야봉이고 그 너머 노고단 그 왼쪽으로 저 봉우리가 왕시리봉 아니냐 했더니 그 사람이 지리산 종주를 안해보았느냐고 한심하다는 듯이 묻습니다. 이럴 때 순진해 빠진 나는 곧이곧대로 종주를 다섯 번 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대답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 사람은 저쪽 토끼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여 종주 능선이라며 다시 반야봉을 들먹입니다. 나는 기가 막혀 코 웃음치고 맙니다. 정말 X도 모르는 놈입니다.그곳은 만복대,고리봉, 바래봉인데.
세석에서 촛대봉 거쳐 작년에 흥겨운 노래가락을 부르던 사람을 떠 올리며 삼신봉 그리고 연하봉 거쳐 장터목. 일행은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한시간 운운하였지만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2시간 걸립니다. 결국 한시간 50분 걸린 것 같습니다. 11시 50분 도착, 라면을 끓이기 위하여 물 받기를 시도하였지만 물 받는 줄이 길고 물이 잘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을 마치고 한 분이 남아서 짐을 보기로 하고 우리는 천왕봉으로 오릅니다. 13시 30분에 오르기 시작하니 장터목에서 점심 등에 40분을 쓴 셈입니다.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에 고사목들은 이제 거의 베어지고 넘어지고 하여 얼마 서 있지 않습니다. 천왕봉 정상 14시 20분. 천왕봉 정상석에서의 사진 찍기는 차례 오기가 어려워 앞에 일행이 사진 찍는 동안 지팡이를 대고 있다가 우리가 지팡이로 줄섰다고 우기고선 억지로 얼굴 들이밀고 증명사진을 찍습니다. 작년엔 정상주 한잔이 없어서 껄덕거렸는데 이젠 한 병이 기다리고 있어도 한모금씩 밖에는 마시지 않습니다. 한 20여분 쉬다가 14시 40분 장터목으로 하산합니다. 고사목 지대 못미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지리산의 날씨는 참으로 천변만화입니다. 소나기가 오면 피하라. 나무밑에서 한참을 버팁니다. 조금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냥 비를 맞으며 나가는데 나는 더 버텨 봅니다 이윽고 비가 그치기 시작하여 다시 하산합니다. 장터목. 15시 25분.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하산을 시작한 것이 아마 15시 40분이었을 것입니다.
제석봉 옆을 돌아 하산을 시작한지 한 10분이나 20분 되었을까요. 내 산행 20여년에 제일 큰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어제 근신하지 못한데 따른 불경죄인지 이제는 높은 산은 그만하라는 노쇠의 경고인지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슬쩍 소나기가 와서 미끄러운 돌을 디딘 왼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앞으로 나동그라지려는 순간 반사적으로 내디딘 오른발이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리면서 내 몸은 완전히 중심을 잃고 허공으로 솟습니다. 그리고 무릎과 배,가슴, 머리 차례로 속수무책 돌 깔린 길로 그대로 일자로 넘어집니다. 왼쪽 무릎에 커다란 충격 배와 가슴, 오른쪽 손바닥에의 심한 충격, 게다가 내 머리는 공중에서부터 바닥으로 쑤셔 박히는데 그 떨어지는 곳에 바위가 솟아 있습니다. 내 머리가 그 바위에 그대로 가 부딪히는 걸 속절없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아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그 찰라의 순간에 온갖 괴상한 생각이 다 납니다. 머리에서 솟구치는 피, 팔,다리의 골절 등 등. 그런데 조금 있다 그냥 일어나집니다. 그리고 별로 다친 곳이 없어 보입니다. 무릎과 팔목, 고개, 바위에 찧은 얼굴의 통증은 있었지만. 얼마나 다행입니까. 엉성하지만 구급낭을 가져 왔기에 반창고 붙이고 압박 붕대하고 걸으니 걸을 만 합니다. 하느님, 조상님, 감사합니다. 몸무게나 가벼워야 누가 메고 가지 이 무거운 내 몸을 내가 걷지 못하면 누가 어떻게 끌고 가겠습니까. 감사하며 조심하며 쉬며 내려와 참샘에서 물 마시고 하동바위 거쳐 하산합니다.
하산 종점이 가까워지며 걱정입니다. 이 땀에 절은 몸을 씻어야 할텐데 마땅칠 않습니다. 백무동 매표소에 17시 35분 도착합니다. 총 11시간 15분입니다. 물론 루스 타임이 한시간 이상은 되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이 시간을 총 산행시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시에 출발하지 않고 2시에 출발한 것이 참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산행을 한시간 씩 앞당길 수 있었으니까요. 차 타고 내려오다 사람들 바글거리는 동네 개울에서 찜찜한대로 대충 씻고 옷을 갈아 입고 통영에 가서 멸치회와 전어회를 먹자던 계획은 차를 운행해준 통영에 사시는 분한테는 미안하지만 생략하고 인월 가까운데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차를 운행해 준 한 분이 다시 화엄사 쪽으로 가고 나머지 일행이 한 차에 좁게 타고 대진도로를 달려 수원에 온 것이 11시는 다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리산 천왕봉에 또 한번 인사드렸습니다. 온 몸이 아픕니다. 13일 정리 운동 겸 광교라도 갈까하다가 더위와 맞서 허덕거리다가 포기합니다.
첫댓글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강건한 심신을 위하여 당분간 휴식 취하시라는 지리산 산신령님의 교시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