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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Vitamin Weekly 제142호 2017년 3월2일 발행
Cover Story
루터 종교개혁 500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파(宗派)를
루터교(敎)라고 부르는 걸 가장 싫어했다.
‘나의 쓸모없는 이름’에
의미(意味)를 절대 부여(附與)하지 말도록
당부(當付)하기도 했다.
그냥~
그리스도인(人)이라 칭(稱)하기를 바랐다.
그는 성직자(聖職者)가 된 배경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결정(決定)한 것도 아니고,
원(願)해서도 아니었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恐怖)와 고뇌(苦惱)에
휩싸여 어쩔 수 없이 서약(誓約)하게 되었다“고 말할 만큼~
큰 의미(意味)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루터(Martin Luther)가
1 5 1 7 년(年)
시작한 종교개혁(宗敎改革)은 세계(世界)의 역사(歷史)를 바꿨다.
종교개혁(宗敎改革)을 넘어
사회개혁(社會改革)이나
정치개혁(政治改革)까지 일궈냈다.
종교(宗敎)와 세속(世俗)이 합치(合致)된
중세시대(中世時代)를 무너뜨리고,
시민사회(市民社會)와
자유(自由)를 근간(根幹)으로하는 ‘근대(近代)’를 만들어냈다.
유럽사(史)는 루터없이 설명(說明) 불가능(不可能)하며
신학(神學)도 루터없이는 존재(存在)하지 못한다.
자본주의(資本主義)도,
공산주의(共産主義)도,
전체주의(全體主義)도 모두~
루터(Martin Luther)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근대(近代) 독일사(獨逸史)는
루터적(的) 세계관(世界觀)이 만든 역사(歷史)다.
독일(獨逸)의~
구교(舊敎)와 신교(新敎)의 전쟁(戰爭),
농민전쟁(農民戰爭)과 시민전쟁(市民戰爭),
모두 루터와 반(反)루터의 싸움이었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와 히틀러(Adolf Hitler)조차
루터(Martin Luther)를 찾았다.
당연히~
현대(現代) 독일에서도 루터 정신(精神)은 살아 숨쉬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總理)는 루터교 목사(牧師)의 딸이며,
요하힘 가우크 대통령(大統領)은 루터교 목사(牧師)였다.
독일인의 근면(勤勉) 성실(誠實) 검소(儉素)한 기풍(氣風)도
루터교(敎)에서 나온다.
올해(2017년)는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宗敎改革) 500년이 되는 해다.
루터 정신(精神)과 함께 그가 남긴 유산(遺産)에 대해 알아보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신정(神政) 일치(一致)’
중세(中世) 무너뜨리고 근대(近代)를 만들다
루터 신학(神學)의 본질(本質)은
성경(聖經)이며 복음(福音)이다. 그는 오직~
성서(聖書)와 묵상(黙想)을 통해
하느님과 직접 대면(對面)할 수 있으며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敎會)가 판매하는 면죄부(免罪符)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종교(宗敎)가 국가(國家)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기독교(基督敎) 신학(神學)과 달리~
루터 신학(神學)에선
국가(國家)와 종교(宗敎)가 분리(分離)돼 있지 않았다.
국가와 종교는 각각(各各)의 권세(權勢)지만, 경우에 따라서
서로 복종(服從)할 수 있다고 한 것이
루터교(敎)의 본질(本質)이다.
독일(獨逸)에서 오랫동안~
국가의 한 축(軸)으로 기독교(基督敎)가
존재(存在)해온 것은 이런 연유(緣由)에서다.
루터의 생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 지역의
부유(富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농촌(農村) 출신이었지만
광산업(鑛産業)에 손을 대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한스 루터는 아들이
법률가(法律家)가 되기를 희망해서
루터는 에르푸르트대(大)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1505년 7월 2일
고향(故鄕)을 방문(訪問)하고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스토터하임에서 심한 벼락[落雷]을 맞는다.
온몸을 다해 몸을 일으키면서
“성(聖)안나” 를 외쳤다.
만일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수도원(修道院)에 들어가겠다고 맹세[盟誓]했다.
그는 2주(週)후
그의 부친(父親)과 친지(親知)들에게 이 사실(事實)을
알리고 수도원(修道院)으로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修道院)의 엄격(嚴格)한 훈련(訓練)과
스콜라(schola) 철학(哲學)의 교리(敎理)에
만족(滿足)하지 못한 채~
1507년
사제(司祭)가 되었다.
면죄부 판매와 루터의 ‘복음주의’ 개혁
당시 독일(獨逸) 가톨릭 교회(敎會)는
면죄부(免罪符)를 팔았을 만큼 부패(腐敗)했다.
교회(敎會)는
용서(容恕)에 필수적(必須的)인 것은 선행(善行)이며
선행(善行)은
현세(現世)에서 수행(修行)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 연옥(煉獄)에서 수행(修行)되어야 한다고
선포(宣布)했다.
연옥(煉獄)
1.[천주]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일부 영혼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장소
2.은총을 받기는 했으나 세상에서 지은 작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영혼들이
천국에 가기 전(前)에 그 죄를 정화시키는 장소이다
사람들이 죄(罪)를 범(犯)하고도 처벌(處罰)을 받지 않았다면
무서운 연옥(煉獄)에서
배상(賠償)되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다.
당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오로지~
연옥(煉獄)에 대한 개념이었다.
하늘의 모든 기쁨을 맛보기 전(前)에
수천년(數千年), 수백만년(數百萬年)의
징벌(懲罰)을
견뎌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징벌(懲罰)을 피하기 위해 교회(敎會)는
교황(敎皇)의 면죄부(免罪符)가
수표(手票)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대주교(大主敎) 알베르트는
“여러분의 동전이 현금(現金) 궤속에 들어가
소리가 나는 순간~
사랑하는 영혼들은
연옥(煉獄)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루터는 면죄부(免罪符)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오직 복음(福音)과 성서(聖書)에
대한 입장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면죄부(免罪符)와 관련한 반박문(反駁文)을
1 5 1 7 년 1 0 월 3 1 일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
성당(聖堂) 문(門)에 게시(揭示)했다.
루터(Martin Luther)는
교황(敎皇)의 권력(權力)과
면죄부(免罪符)의 정당성(正當性)을
집중(集中) 공격(攻擊)했다.
교회(敎會)에는
공적(公的) 재산(財産)과 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의
복음(福音)과 영광(榮光)만이 있어야 한다는 점,
특히
성(聖)베드로 성당(聖堂)을 짓기 위해서
부(富) 대신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搾取)하는 건
매우 잘못됐다는 점을 지적(指摘)했다.
무엇보다 반박문(反駁文) 사건(事件) 2년후
신학자(神學者) 엑크와의 논쟁(論爭)은 유명(有名)하다.
그와의 논쟁(論爭)에서
루터(Martin Luther)는
인간(人間)을 구원(救援)해 줄 대상(對象)은~
같은 인간(人間)인 교황(敎皇)이 아니라
오르지 하느님이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敎會)의 우두머리임을 역설(力說)했다.
이 논쟁(論爭)으로써
루터(Martin Luther)와 로마(Rome) 가톨릭교회(敎會)는
더 이상 공존(共存) 할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렀다.
결국 1521년
가톨릭교회(敎會)에서 파문(破門)당했다.
루터와 반(反) 유대주의
루터가 살았을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敎會)에는
반(反) 유대주의(Anti-Semitism)가
만연(蔓延/蔓衍)했다.하지만
루터는 반(反)유대주의를 적극 비판(批判)하고
가톨릭 교회의 유대인 탄압을 비난(非難)했다.
1523년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라는
글에서 예수가 유대인 때문에
죽었다는 설교자(說敎者)들을 비난(非難)했으며,
유대교인(人)이 기독교인(人)보다
열등(劣等)하다는 주장도 반대했다.
특히 그는 가톨릭 교회(敎會)가 행한
모든 죄악(罪惡) 가운데
반(反)유대주의적 폭력(暴力)의 배후(背後)라는
사실을 맹렬히 비난(非難)했다.
하지만 루터는 죽기 전(前)인
1543년
돌연 반(反)유대주의로 돌아선다.
그는 ‘유대교인(人)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글에서
“유대인의 회당(會堂)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 매장(埋葬)하고,
회당(會堂)을 무너뜨리고,
탈무드[Talmud]를 빼앗아라“고 주장(主張)하며
유대인 탄압(彈壓)을 선동(煽動)했다.
루터의 이런 주장(主張)은
나치와 독일인(獨逸人)의 내면(內面)까지 파고들었다.
* 탈무드[Talmud]
교훈(敎訓), 교의(敎義)라는 뜻으로,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사회의 모든 사상(事象)에 대하여
구전(口傳)한 것을 집대성한 책을 이르는 말.
고유명사[책명]
유대교의 율법(律法), 축제(祝祭), 전통적 습관(習慣),
민간전승(民間傳承) 따위를 모은 것으로
성서(聖書) 다음으로 유대인의 정신적(精神的)인 기둥이 되어 왔다.
유대인의 종교적인 생활(生活) 뿐 아니라
법적 규정(規定)이나 판례법(判例法)까지 포함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종교개혁(宗敎改革)
루터의 개혁(改革)에 힘입어~
각국(各國)에서 종교개혁(宗敎改革)이 일어났으며
그 가운데
프랑스의 칼뱅(Calvin, Jean)과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돋보였다.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루터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성서(聖書) 중심의 복음(福音) 사상을
전파했지만 실패(失敗)했다.
칼뱅(Calvin, Jean)은
프랑스에서 적극적인 종교개혁(宗敎改革)
운동(運動)을 펼쳤지만
국왕(國王) 프랑수아 1세의 박해(迫害)로
스위스로 망명(亡命)하였다.
스위스 제네바(Geneva)에서
시장(市長)으로 당선(當選)된
칼뱅(Calvin, Jean)은 엄격한 개혁(改革)을 추진했다.
철저한 성서(聖書) 지상주의(至上主義)에 입각(立脚)해
성서(聖書)에 명시(明示)되지 않는
의식(儀式)은 모두 부정(否定)했고,
정(政) · 교(敎) 일치(一致)의
신정정치(神政政治)를 추구했다.
신정정치(神政政治)
[정치] 신(神)의 대변자인 제사장(祭司長)이 절대적인 권력으로써 지배권을 행사하는 정치
모든 시민(市民)은 새로운 교회에서 새로운 맹세[盟誓]를하고,
일상 생활에서 경건(敬虔)한 생활(生活)을 해야 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宗敎改革)을 일으킨
칼뱅(Calvin, Jean)은
루터(Martin Luther)와 중요(重要)한 차이(差異)를 보였다.
루터(Martin Luther)는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받는다고 했지만
칼뱅(Calvin, Jean)은 예정설(豫定說)을 주장(主張)하였다.
예정설(豫定說)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교리.
에라스무스는 루터(Martin Luther)가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파(派)의
예정설(豫定說)이
인간(人間)을 신(神)의 영원한 포로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人間)이 죽은 뒤에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는
신(神)에 의해 미리 정(定)해져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人間)은 구원(救援)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열심(熱心)히 일하고
경건(敬虔)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다.
근로(勤勞)를 강조(强調)한 캘빙의 교리(敎理)는
자본주의(資本主義) 형성(形成)에
커다란 영향(影響)을 줬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프로테스탄티즘은
칼뱅주의(主義)를 말한 것이었다.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막스 베버(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1904)
독일에서 살아 숨쉬는 ‘루터 정신(精神)’
루터교(敎)와 정치(政治)
루터교(敎)를 국가(國家) 재건(再建)에 적극 이용(利用)한 사람은
독일(獨逸)의 철혈(鐵血) 재상(宰相)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1848년
독일(獨逸)의 혁명(革命) 이후 강(强)한 힘을 지닌
통일 독일의 탄생을 원(願)했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이를 위해 독일이 민족적(民族的)으로
통합(統合)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터교(敎)에 뿌리가 깊은 독일(獨逸) 교회(敎會)가
그런 통합(統合)의 원동력(原動力)이었다.
우선 로마(Rome)가톨릭교회 수도원(修道院)을
폐쇄(閉鎖)하고
주교(主敎)와 수사(修士)들을 구속(拘俗)했다.
대신 루터교(敎)를 살리기 위해
성직자(聖職者)의 정치적(政治的)
등용(登用)의 문(門)을 활짝 열었다.
누구보다 루터교(敎)를 가장 잘 이용(利用)한 건
나치의 히틀러(Adolf Hitler)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기독교(基督敎) 지도자(指導者)들은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부르짖고
교인(敎人)들에게 조국(祖國) 수호(守護)를 호소(呼訴)하면서
전쟁(戰爭)에 나섰다.
국가(國家) 프로테스탄트로 불리는 전통(傳統)이었다.
나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지자(支持者)를~
민족적(民族的)이고 보수적(保守的)이며
반(反)유대적 성향(性向)의 교회(敎會)에서 구(求)했다.
많은 기독교인(基督敎人)은 나치운동(運動)에서
민족적(民族的) 정서(情緖)를 공유(共有)했으며
나치가 마르크스주의의 반(反)기독교적 세력(勢力)에
대항(對抗)하는 것을 적극 찬성(贊成)했다.
당시 독일 루터교(敎)의 총주교(總主敎)인 뮐러[Müller]는
“종교적(宗敎的)인 분열(分裂)은 사라져야하고
하나된~ 민족(民族)은
하나된~ 신앙(信仰)만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할 정도였다.
신학자(神學者) 베르크만은
루터교(敎)를 국가교회(國家敎會)로 변혁(變革)하려는
시도(試圖)까지 했다.
루터교(敎)는 2차대전 폐배(敗北)후 힘을 잃었지만
여전히 독일인(獨逸人)들
신앙(信仰)의 뿌리였다.
독일 통일(統一) 이전(以前)~
동독(東獨)에서도 루터교(敎)는 불가침(不可侵)이었다.
현재 독일 총리(總理)인 앙겔라 메르켈도
루터교 목사(牧師)의 딸이었으며
독일 대통령(大統領)인 요하임 가우크도
루터교 목사(牧師) 출신이다.
올해는 루터 개혁(改革) 500년(年)을 맞아
독일(獨逸) 전역(全域)에서
다양한 행사(行事)가 펼쳐진다고 한다.
그의 개혁정신(改革精神)이
지금의 독일인(獨逸人)들에게
어떻게 녹아 있는지 궁금하다.
(끝)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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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정 2017-10-30 03:25
2017-10-30 A39면(한국경제신문)
500년 전 루터(Martin Luther) "의인은 없나니…"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모금함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른다.” 중세 도미니크 수도회의 요하네스 테첼이 면죄부(免罪符·가톨릭 용어로는 면벌부·免罰符)를 팔 때 사람들을 꼬드긴 말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유럽의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각 교구에 할당된 금액만큼 면죄부를 팔았다.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순응할 수 없었다. 그는 목회자의 양심에 따라 설교할 때마다 이를 비판했다.
그래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1517년 10월31일 엘베 강변의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내걸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의 논제가 처음부터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는 조심스러운 시도’였다. 그러나 ‘95개 논제’는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으며 제후들과 지식인, 농민의 열띤 지지를 받았다. 얼마 뒤 그는 교황 레오 10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철회 요구’를 잇달아 거부함으로써 파면됐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나 교회 내 갈등을 넘어 정치·경제를 아우르는 거대한 대결 국면으로 바뀌었다.
루터는 내성적인 데다 말주변도 없어 토론할 때 어눌했다. 하지만 논쟁이 끝나면 상대의 모순을 신랄하게 공박한 기록물을 인쇄해 배포했다. 이로써 독일 민중의 폭넓은 지지와 결속을 끌어내며 개혁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교황청은 이를 얕잡아봤다. 뒤늦게 맞불을 놓으려 했지만 라틴어만 고집해서 독일 민중의 대부분은 읽지도 못했다. 루터와 지지자들은 15세기 발명품인 인쇄술의 위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파급력을 키워갔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은 각 지역 방언과 이질적인 문화를 융합해 근대 독일어의 문장 체계를 확립했고 민족의식까지 키웠다. 루터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유럽의 한 변방 수사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회 개혁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태동과 로마 가톨릭의 쇄신 외에 약 1000년간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럽 각국은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국민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볼테르의 말처럼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닌’ 존재가 됐다.
개혁을 촉발한 면죄부는 1563년 없어졌다. 하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는
깨달음에서 출발한 루터의 개혁 정신은 500년이 지난 오늘도 ‘빛’과 ‘소금’이 돼 우리를 비추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