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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엄십찰 [華嚴十刹]
신라 때, 의상(義相)이 당(唐)에 가서 지장사의 지엄(智儼)에게 『화엄경(華嚴經)』을 배우고 돌아와 창건한 10개의 절. 문무왕 16년(676)에 부석사(浮石寺)를 지어 화엄도량으로 삼고, 『화엄경』을 널리 펴기 위해 합천 가야산(伽倻山)에 해인사(海印寺), 보광사(普光寺), 경북 달성군 비슬산(琵瑟山)에 옥천사(玉泉寺), 부산 금정산(金井山)에 범어사(梵魚寺), 지리산(구례)에 화엄사(華嚴寺), 공주 계룡산(鷄龍山)에 갑사(甲寺), 서산 상왕산(象王山)에 보원사(普願寺), 경북 달성군에 미리사(美理寺 또는 美利寺), 청담사(淸潭寺)의 10개 절을 지었다고 하며 이를 화엄 10찰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미리사•청담사•보광사 대신, 비마라사(毘摩羅寺)•청계사(淸溪寺)•미현사를 꼽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엄십찰 [華嚴十刹]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영주 부석사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浮石寺] (두산백과)
◆합천 해인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말사(末寺)는 150여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합천 해인사 [陜川 海印寺] (두산백과)
◆파주 보광사 (普光寺)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고령산(高靈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이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894년(진성여왕 8)에 어명에 의해서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1215년(고종 2)에는 원진(元眞)이 중창하고 법민(法敏)이 불보살상 5위(位)를 조성하여 법당에 봉안하였으며, 1388년(우왕 14)에는 무학(無學)이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622년(광해군 4)에 설미(雪眉)와 덕인(德仁)이 법당과 승당(僧堂)을 복원하였다.
1631년(인조 9)에는 도원(道元)이 범종을 만들기 위하여 모연을 시작하였는데 3년 동안 청동 80근을 모은 뒤 죽게 되자 신관(信寬)이 그 뒤를 이어 1634년에 300근의 범종을 완성하였다.
1667년(현종 8)에는 지간(智侃)과 석련(釋蓮)이 중수하였고, 1863년(철종 14)에는 쌍세전(雙世殿)과 나한전(羅漢殿)·큰방·수구암(守口庵)을 건립하고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十王像)·석가여래삼존불·16나한상 등을 조성하였다.
1884년(고종 21)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지었고, 1893년에는 산신각을 신축하였다.
그 뒤 1901년에 인파(仁坡)가 상궁 천씨(天氏)의 시주를 얻어 중수하였으며, 6·25전쟁 때 별당 등 일부 당우가 소실되었다.
1957년에는 수각(水閣)을 건립하였고 1973년에는 주지 와운(臥雲)이 종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관음전·나한전·쌍세전·산신각·만세루(萬歲樓)·승당·범종각·별당·수구암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1215년에 만든 목조비로자나삼존불(木造毘盧遮那三尊佛)과 문수(文殊)·보현보살상(菩賢菩薩像)이 봉안되어 있고, 나한전에는 1863년에 조성한 삼세불(三世佛)과 나반존자(那畔尊者),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쌍세전에는 1863년에 조성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영조의 친필 편액과 김정희(金正喜)의 친필 편액, 부도 1좌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광사 [普光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비슬산 옥천사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蓮花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시도기념물.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1208년(희종 4)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수선사(修禪社)의 법석(法席)을 물려주려 하자 그 뜻을 뿌리치고 이곳으로 들어와서 자취를 감추었던 혜심(慧諶)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39년(인조 17)에 학명(學明)과 의오(義悟)가 중창하였으며, 1883년(고종 20)에 용성(龍城)이 중건하였다.
1919년에는 영호(暎湖)가 이 절의 강사로 있으면서 세진교(洗塵橋)를 놓은 것을 비롯하여 두 차례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에 자방루(滋芳樓), 좌측에 심검당(尋劍堂), 우측에 적묵당(寂默堂)이 있으며, 그 밖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된 명부전과 금당(金堂)·팔상전(八相殿)·나한전·산신각·독성각(獨聖閣)·칠성각·객실 등이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큰 규모를 보이고 있고, 가람의 지붕이 마치 연꽃무늬처럼 배열되어 있어 규모면에서 본사인 쌍계사를 능가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95호로 지정된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자방루,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인 반종(飯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대웅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인 고성 옥천사 소장품 등이 있다.
임자명반자는 고려시대에 동으로 만든 것이고, 자방루는 지은 지 300년이 넘는 우아한 건물로서 이 절의 품위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 밖에도 큰 법고(法鼓)와 자방루 앞뜰에 하얀 화강암으로 다듬어 세운 청담(靑潭)의 사리탑이 있다. 이 절은 청담이 처음 출가한 사찰이기도 하며, 고려 말의 요승 신돈(辛旽)이 노비로 살았던 절이기도 하다. 절의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청련암(靑蓮庵)·연대암(蓮臺庵) 등이 있고, 절 안에는 약수가 있다.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이 약수는 수질이 다소 변질되어서 조금만 많이 마셔도 설사를 일으키게 되는데,
변비 증세가 있는 사람은 단 한 번의 복용으로 효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절 주변에는 송이버섯과 산딸기 등의 특산물이 많이 자생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천사 [玉泉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금정산 범어사
화엄종(華嚴宗) 10찰(刹)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는 31교구 본산의 하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삼국유사》의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산(金井山)으로 이름짓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어사창건사적(創建事蹟)》에 보면 당시 범어사의 가람(伽藍) 배치는 미륵전 ·대장전(大藏殿) ·비로전(毘盧殿) ·천주신전(天主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鍾樓) ·강전(講殿) ·식당 ·목욕원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서고 360 요사(寮舍)가 양쪽 계곡에 꽉 찼으며, 사원에 딸린 토지가 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奴婢)가 100여 호에 이르는 대명찰(大名刹)이라 하였는데, 이 많은 것이 창건 당시 한꺼번에 갖추어졌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상당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으나 또다시 화재를 당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여러 고승들의 협력으로 중창하여 법당 ·요전(寮殿),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모든 집기(什器)를 갖추었다.
현재 보물 제43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3층석탑(보물 250호), 당간지주(幢竿支柱), 일주문(一柱門), 석등(石燈), 동 ·서 3층석탑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이 밖에 많은 전각(殿閣) ·요사 ·암자(庵子) ·누(樓) ·문 등이 있다.
옛날부터 많은 고승들이 이 곳을 거쳤으며, 중요한 인물만도 의상을 비롯하여 그의 고제(高弟) 표훈(表訓) ·낙안(樂安) ·영원(靈源) 등이 있다.
《선찰대본산 범어사안내(禪刹大本山梵魚寺案內)》에는 역대 주지(住持) ·승통(僧統) ·총섭(摠攝) ·섭리(攝理) 등으로 구분하여 수백 명이 기록되어 있다.
부산 금정구 청룡동(靑龍洞) 금정산(金井山)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어사 [梵魚寺] (두산백과)
◆구례 화엄사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智異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삼국시대 승려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사찰. 사적.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중관대사(中觀大師) 해안(海眼, 1567~?)이 1636년(인조 14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신라 진흥왕 5, 백제 성왕 22)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례속지(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石刻)되어 장륙전의 사방 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의문은 1978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신라 제24대 왕) 때가 아닌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 제35대 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다만, 8세기보다 앞선 어느 시기부터 이 터에 가람이 있었고 그것이 연기조사 대에 이르러 대가람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절은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覺性)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다.
특히 신라 말 화엄학이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王建)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希朗)과 대립된 학파(學派)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이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影幀)에 예를 표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선수(善修)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처능(處能)·수초(守初)·명안(明眼)·새봉(璽峰)·조관(?冠)·윤장(玧藏) 등이 그 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해안(海眼)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雪泓)·윤눌(潤訥)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陳震應)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 삼층석탑(四獅子 三層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은 보물 제133호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에 해체하여 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많은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 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 진감국사비(雙磎寺 眞鑑國師碑)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敎旨: 선조(宣祖)가 벽암선사(碧巖禪師)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가 있다.
그리고 인조 하사 어석(御席) 1건, 인조 하사 가사(袈裟) 1령, 인조 하사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발우〔西山大師鉢盂〕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覺皇殿重建上樑文) 1매,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覺皇殿三如來四菩薩腹藏記) 1축, 고종(古鐘),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 1책 등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는 신라 경덕왕 때에는 81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원소암(圓炤庵)·청련암(靑蓮庵)·적기암(赤旗庵)·은무암(隱霧庵)·은선암(隱仙庵)·백련사(白蓮社)·도선굴(道詵窟)·연기암(煙起庵)·보적암(寶積庵)·내원암(內院庵)·봉천암(鳳泉庵)·문수암(文殊庵) 등의 상당히 많은 암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암자가 없어지고, 구층암(九層庵)을 비롯한 금정암(金井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세 암자만이 있을 뿐이다.
구층암에는 탑신 전면에 여래좌상을 조각한 3층석탑과 석등·배례석 등이 있고, 천불을 모신 천불보전(千佛寶殿), 선실(禪室),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1562년 설응(雪凝)이 창건한 금정암에는 조선 고종 때에 세운 칠성전(七星殿)과 요사가 있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셨다. 1959년 원응(源應)이 창건한 지장암의 본전인 보광전(普光殿)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절 일원이 명승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례 화엄사 [求禮 華嚴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주 계룡산 갑사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삼국시대 에 창건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계룡갑사(鷄龍甲寺)·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한다.
420년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556년(진흥왕 17)에 혜명(惠明)이 창건하였다는 설, 아도가 창건하고 혜명이 중창했다는 설 등이 있다.
또한, 503년(무령왕 4)에 천불전(千佛殿)을 신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679년(문무왕 9)에는 의상(義湘)이 중수하였고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로 삼았으며,
이 때부터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859년과 887년에 중창하였다.
1424년(세종 6) 4월 나라에서 사원의 승려 수와 토지의 규모를 정할 때, 예조에서 ‘충청도 공주 계룡사는 원래 100결의 토지가 있었지만 이제 50결을 더해서 70명의 승려를 거주토록 할 것.’을 건의해서 결정되었다.
1583년(선조 16) 여름에는 정문루(正門樓)를 중수하였고, 1584년 여름에는 철 8,000근으로 대종(大鐘)을 주조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린 뒤에 대웅전과 진해당(振海堂)을 중건하였다.
1654년(효종 5)에는 사정(思淨)·신휘(愼徽)·경환(瓊環)·일행(一行)·정화(正華)·상균(尙均)·행준(行俊) 등의 승려가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의 도움을 얻어 크게 중창하였다.
같은 해 여주목사 이지천(李志賤)이 지은 계룡산갑사사적비명을 건립하였고, 1738년(영조 14) 표충원(表忠院)을 세웠으며, 1797년에 원선사(圓禪師)가 중창하였고, 1875년에 중수를 거쳐 1899년에는 적묵당(寂默堂)을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강당·대적전(大寂殿)·응향각·진해당·적묵당·팔상전·팔상문·장경각(藏經閣)·표충원·삼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56호인 갑사철당간 및 지주와 보물 제257호인 갑사 승탑, 보물 제478호인 갑사동종, 보물 제582호인 선조 2년에 새긴 월인석보목판이 있다.
지방문화재로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인 강당이 있고, 대웅전은 제105호, 대적전은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안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석조보살입상은 제51호로, 갑사사적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5호인 영규대사묘가 있다.
표충원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 삼성각은 제53호, 팔상전은 제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인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 제56호인 영규대사비, 제68호인 천진보탑 등이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강당에는 절도사 홍재의(洪在義)가 쓴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표충원에는 휴정(休靜)·유정(惟政)·기허(騎虛)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승탑은 갑사 뒤편의 산속에 있었으며, 상륜부까지 갖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오다가 1917년에 훼손된 뒤 대적전 앞으로 옮겼고, 1583년에 주조된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쇠 공출로 제공되었다가 8·15광복 후 인천에서 다시 찾아온 것이다.
부속암자로 1808년에 청담(淸潭)이 세운 내원암(內院庵), 수정봉 아래의 신흥암(新興庵)·대성암(大聖庵)·대적암(大寂庵)·대자암(大慈庵)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갑사 [甲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산 상왕산 보원사 (普願寺)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伽耶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 사적.
조선시대에는 ‘강당사(講堂寺)’라고도 불렸다. 이 사찰은 백제시대 이래의 고찰(古刹)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지(寺誌)나 사적기(事蹟記) 등의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창건연대는 이 사지(寺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6C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아마 6C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이 사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서산마애삼존불이 백제의 대표적 불교조각이라는 점,
당시 서산 지역이 중국과의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이 사찰의 사지나 사적기는 전하지 않지만 최치원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나 현재 사지에 남아있는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의 명문을 통해서 그 종파나 사세(寺勢)에 대한 간략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熊州) 가야협(伽耶峽)의 보원사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화엄십사(華嚴十寺)중의 하나라고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찰의 종파가 화엄종임을 알 수 있다.고려시대의 이 사찰에 대한 내용은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과 관련된 내용이다.
비문에 의하면 탄문은 장의산사(藏義山寺)의 신엄(信嚴)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그 계행이 매우 높아 고려 태조가 별화상(別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 후 태조(太祖)·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대를 거치면서 왕실과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혜종과 정종은 그를 지극히 공경하였고 광종을 그를 왕사(王師)로 봉하여 귀법사(歸法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고려 초기에 화엄종이 왕권강화를 위한 이념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 화엄종 사찰이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를 대표하던 탄문이 보원사에서 머물렀고 975년 국사(國師)로 책봉된 후 이 사찰에 살다가 입적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고려 초기에 이 사찰의 사세(寺勢)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찰은 아마도 화엄종의 쇠퇴와 함께 무신집권기인 고려 후반기 이후 점차 사세가 기울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佛宇)조에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때까지도 이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 편찬된 『호산록(湖山錄)』에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에 실시된 지표조사에 의해 가람배치가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석교(石橋)를 지나 중문(中門), 석등(石燈), 석탑(石塔), 금당(金堂), 강당(講堂)과 승탑(僧塔)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回廊)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철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현재 사지에는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5층 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978, 보물 제105호)과 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원사 [普願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달성군 미리사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의상이 창건한 사찰. 미리사
신라 중대 화엄종(華嚴宗)의 사찰이며, 대구(大丘)의 공산(公山) 아래에 있었다.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과 폐사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미리사(美理寺),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에는 미리사(美利寺)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대구군(大丘郡)의 속현(屬縣)인 해안현(解顔縣)조에 일운 미리(一云 美里)’라고 기록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해안현에 있으며 ‘혹은 해안(解顔)을 미리(美理)’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었다.
의상의 ‘화엄십찰(華嚴十刹)’ 또는 ‘전교십찰(傳敎十刹)’ 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의상의 ‘십대제자(十代弟子)’와 병칭되고 있다.
927년(경애왕 4) 11월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경애왕은 견훤에게 죽었다.
왕건은 5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다가 견훤의 군사를 공산 남쪽 기슭 아래에 있는 미리사 앞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고려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이 전사하였고, 왕건은 혼자 몸만 빠져나오는 패배를 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리사 [美里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청담사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 가운데 한 곳.
최치원(崔致遠, 857~?)이 904년(효공왕 8)에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의상(義湘)과 그 제자들이 전국에 세운 화엄10찰(華嚴十刹)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청담사(靑潭寺)이다. 『법장화상전』에는 청담사가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에 위치한다고 되어 있다.
『법장화상전』을 제외하면 청담사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 위치와 연혁에 대해서도 그 동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2008년 은평뉴타운 개발사업부지를 발굴조사하는 중 정면 9칸, 측면 1칸의 남향 건물지의 북쪽 기단부 주변에서 ‘삼각산청담사삼보초(三角山靑覃寺三宝草)’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명문에 보이는 청담사(靑覃寺)는 화엄10찰 중 하나인 청담사(靑潭寺)를 가리킨다.
이 명문기와가 출토된 곳의 인근에는 나말여초에 제작된 석조보살입상(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5호)이 봉안된 자씨각(慈氏閣)을 비롯해 하체만 남은 석불좌상과 각종 석조 부재가 있으며, 예로부터 이 일대는 ‘탑골’로 불려왔다.
『법장화상전』에는 청담사의 위치가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으로 되어 있는데, 한주는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고 부아산은 북한산의 줄기인 북악(北岳)의 옛 명칭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청담사’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지점과 자씨각 일대에 청담사가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 자락의 여러 절터 가운데 고려 이전으로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 현재로서는 자씨각 일대 밖에 없다는 점도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청담사가 자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2008년 발굴조사를 통해 모두 6동의 건물지가 조사되었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기와와 자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따라서 청담사는 통일신라시대에 화엄종 사찰로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폐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담사지 [淸潭寺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비마라사 [毗摩羅寺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1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
통일신라 초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서 많은 암각(菴閣)이 세워졌으나 화적(火賊)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신해년(辛亥年)에 사언(師彦)이라는 승려가 개창하였다고 전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비마라(毗摩羅)라는 명칭은 의상대사의 10대 제자가 전국 10대 사찰의 건축에 참여하여 터를 고를 때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의상대사가 날린 철마(鐵馬)가 이곳에 앉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는 절터에 주초석(柱礎石)이 남아 있고, 밭 주변에 수막새와 암막새가 산재한다.
법당의 규모는 정면 8칸, 측면 5칸으로 추정되며, 20~30m에 이르는 석축이 있다.
법당터 옆에 연못터가 남아 있으나 지금은 거의 평지를 이룰 정도로 메워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마라사지 [毗摩羅寺址] (두산백과)
◆청도 용천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670년(신라 문무왕 10)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은 화엄십찰(華嚴十札) 중 하나로 이 절을 창건하고 옥천사(玉泉寺)라고 불렀다.
창건 이후 백련암과 극락암 등 모두 47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3천 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대찰로 성장하였다.
1261년(고려 원종 2) 일연(一然)이 중창하여 절 이름을 현재의 용천사로 바꾸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31년(인조 9) 조영(祖英)이 중창하였으며,
1805년(순조 5) 의열(義烈)이 중수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산신각·요사채가 있다.
이 중 청도 용천사 대웅전은 1996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목재에 칡덩굴을 섞어 사용한 것이 독특하다.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유물로는 부도 6기가 전한다.
경내에 우물이 있는데, 언제나 일정한 양의 물이 솟는다고 하며 천년 된 물고기와 5백년 된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천사 [湧泉寺] (두산백과)
◆금강산 마하연사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금강산에 있는 절.
676년(문무왕 16)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지은 뒤 창건한 절로,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가 1831년(순조 31) 선사 월송(月松)이 중건한 것이며, 1848년(헌종 14)대운(大雲)이 마하연 뒤에 마하연 선실을 지었다.
1932년에는 형진(亨眞)이 59칸의 당우를 중수하였다.이 절의 주봉인 법기봉은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상징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봉우리 밑에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 상제보살(常啼菩薩) 모양의 자연석이 있다.
『화엄경』에 7일 동안 간절히 기도하면서 법기보살의 반야법문(般若法門)을 듣는다고 설명되어 있는 보살이다. 또한, 이 절 남쪽 혈망봉(穴望峯)에는 법기보살의 석상이 있어 나옹(懶翁)을 비롯한 도속(道俗)들이 참배하였다
하나, 지금은 그 반석도 어느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들 모두는 신라의 불국토설(佛國土說)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옛날 의상이 중향성(衆香城)에서 법기보살의 주처를 경배하고 일만이천 보살과 함께 마하반야(摩訶般若)를 강설하였으므로 마하연사라고 했다 한다.
마하연(mahā-yāna)은 대승(大乘)을 의미한다.
속전(俗傳)에는 금강산을 자주 찾았던 조선 세조의 근기(根機)가 소승(小乘)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 도량에는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즉, 마하연의 부속암자인 원통암(圓通庵)과 불지암(佛地庵)에는 세조가 친히 베푼 경찬회(慶讚會)가 있었지만 이곳에서만은 법회를 열지 못하였다고 한다.
마하연사 주위에는 가섭암지(迦葉庵址)·수미암(須彌庵)·선암(船庵) 등의 유적지가 있다.
가섭암은 가섭동에 있으며,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이곳을 보고 “이 굴의 유정(幽靜)하고 명묘(明妙)함이 서역의 빈발암을 방불한다.”고 한 뒤부터 가섭암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수미암은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그 남쪽의 영랑대(永朗臺)에는 수미탑(須彌塔)이라는 자연 석탑이 있다.선암은 수미암 서쪽에 있는데, 박빈(朴彬)이 창건한 암자이다.그는 이곳에서 혼자 염불정업(念佛淨業)을 닦다가 30년 되던 해의 백중일(百中日)에 극락세계의 성중(聖衆)들의 내영(來迎)을 받으며 왕생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하연사 [摩訶衍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신라 화엄십찰 (新羅 華嚴十刹)|작성자 moongyu3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