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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청렴한 관리 농암은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군 - 중종 - 인종 - 명종 등 4대를 섬기면서 무려 32세에서 76세까지 40여 년간이나 벼슬아치로 봉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내직보다는 주로 외직을 자청하여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으며,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하에서는 그의 관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그의 나이 32세 되던 1498년 마침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분관되었다. 그의 교서관 분관은 불운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마 과거 급제 성적이 나빴던데1) 기인하는 것 같다. 34세 때 처음으로 받은 실직은 함경도 영흥부 향교의 훈도(訓導, 종9품)였다. 당당한 문과 급제자가 변방 향교의 훈도로 간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좋은 출발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부임하여 자신이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문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 김세필(金世弼)이 임금의 사명(使命)을 띠고 함경도에 왔다가 그를 한 번 만나 보고는 한눈에 인재임을 알아보고 적극 추천하여 훈도로 부임한지 일년만에 흔히 사관(史官)으로 일컬어지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발탁되었다. 사관시절 그는 경연에서 임금 연산에게 그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신이 사관(史官)이 되어서 모든 일을 자세히 듣고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하지마는, 다만 전하께서 경연에 납실 적에, 신 등의 자리가 가장 멀기 때문에 대간이 아뢴 말을 혹시 미처 자세히 다 들을 수 없으면 밖으로 나가 대간에게 물어서 쓰게되니,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전교하실 때 미처 듣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사관이 대간 앞으로 나가서 들으면 비록 미처 다 쓰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밖으로 나가서도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연산군일기 권46, 8년 10월 정묘조) 곧 사관의 자리가 임금이 앉아 있는 용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기 어려우니 자리를 좀 더 가깝게 배치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당한 요청은 어느 정도의 양식을 갖춘 임금이라면 당연히 수용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나, 연산군은 이에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이때부터 그를 미워하였다. 원래 사관은 승진이 빠르기 때문에 예문관의 대교(待敎, 정8품), 봉교(奉敎, 정7품)를 거쳐 3년 만인 1504년(갑자년)에 참상관으로 승진하여 같은 해 2월에 성균관 전적(典籍, 종6품)이 되고, 4월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연산군이 점점 광포해져서 갑자사화를 일으키던 해에 임금의 잘못을 간하여 바로 잡아야 하는 정언이 된 것은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간관(諫官)이 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세자(世子)가 공부하는 서연(書筵)에서 강관(講官)이 실수한 일을 보고하자 연산군은 당일로 보고하지 않고 하루가 지난 뒤에 보고했다는 트집을 잡아서 그를 의금부에 하옥하고 이어서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으로 귀양보내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달 뒤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안기역으로 유배당한 몇 달이 지난 같은 해 12월에 다시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는데 사관의 자리를 임금 가까이로 옮겨 달라고 요청한 일을 재조사하라는 연산군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압송된 지 70여 일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어 안기역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이 때 궁궐의 호위병 가운데 한 사람이 근무를 태만히 했다는 이유로 함께 갇혀 있었는데 그를 석방하라고 죄수 명단에 점을 찍던 연산군이 잘못하여 바로 다음에 있는 그의 이름 위에다 점을 찍었던 것이다. 1507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성균관 전적으로 다시 조정에 돌아왔다. 다음해에는 호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으로 승진하였다. 지평 시절 그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잘 하였던 까닭에 친구들로부터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의 소주병은 검은 색 도자기로 되어 있었는데 소주병이 겉은 검어도 안에는 맑은 소주가 있듯이 그가 얼굴은 검어도 마음씨는 소주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다. 42세 되던 1509년 양친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영천(永川) 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스스로 외직을 선택한 것은 수재들이 판치는 조정보다는 어버이의 봉양이 수월함은 물론 성실함이나 근면함을 살릴 수 있는 외직이 자신의 적성에 더 맞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천(永川)군수, 밀양도호부사(48세, 이하 모두 발령 받은 나이임), 충주목사(50세), 안동부사(51세), 성주목사(56세), 대구부사(62세), 평해군수(발령만 받고 근무하지 않음),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군수(63세)를 거쳐 경주부윤(68세)과 경상도관찰사(70세)를 역임하는 동안 여러 차례 우수한 지방관으로 선임되어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가는 곳마다 향교(鄕校)를 재정비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거행하거나 양로연이나 노인회를 자주 열어 효도를 권장하는 등 주로 교육과 도덕의 진흥에 힘썼다. 그 한 예로 충주목사 시절에 있었던 예를 들어보자. 그가 50세에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양로회를 만들어 효행을 비롯한 유교의 실천윤리를 권장하는 한편, 향교를 부흥시켜 유교이념을 확대하는데 주력했다. 여기에 더하여 권농과 함께 남한강을 무대로 상거래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세금부담을 경감하여 그들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시책이 상당한 성과를 얻었는지 그 곳 백성들의 환영을 받아 다음과 같이 중종 임금에게 상소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신이 살고 있는 충주는 길가의 고을로 피폐가 막심합니다. 전 목사 이귀(李龜)가 재임할 적에는 유망한 사람들이 차츰 모여들었고, 목사 이현보(李賢輔)가 정치함에 백성들이 열복(悅服)하였는데, 그의 부모가 예안현(禮安縣)에 있다 하여 지금 바뀌어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습니다. 인민이 소복할 동안에는 그대로 눌러있게 하소서. (중종실록 권31, 12년 12월 무오조) 라고 입직(入直)한 정병(正兵) 최숙징(崔淑澄)이 상소한 것으로 보아, 그의 선정을 백성들이 얼마나 감복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외직을 자청해 나가 있던 1510년(44세 때), 이미 고향에다 ‘명농당(明農堂)’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그 벽에다 귀거래도(歸去來圖,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주제로 한 그림)를 그려서 벼슬에서 은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5년 뒤 49세에 잠시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들려 시를 써서 붙이고 다시 한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다.
우리 선대는 영천의 향족으로 동도(東都)에 사셨는데, 고조 소윤공(少尹公, 諱:軒)께서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소윤으로 치사하고 처음으로 이 곳에 정착하셨다. 그 후 집을 짓고 벼슬을 마치고 늙기를 여기서 했다. 산수의 빼어남과 전원의 아름다움은 천작(天作)으로 구비되어 있었으나, 정자와 지대(池臺)같은 것이 없었다. 무진년(1510년) 가을, 내가 형조 정랑으로 어버이의 연로하심이 염려스러워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는데, 그 때 고향 ‘부내(汾川)’와는 공사간에 달마다 왕래가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조그만 빈터를 얻고 연못(影襟塘)을 파서 그 위에 정자를 지어 도연명의 ‘귀거래도’를 그렸으니 생각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기가 되어 서울로 갔다가 갑술년(1515년) 겨울, 밀양부사로 임명되어 다시 고향을 찾으니 벽에 ‘귀거래도’는 여전한데, 5두의 봉급으로 허리를 꺾음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으랴만, 이 때는 아직 어버이가 계시니 그 형편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만 시를 지어 다른 날 그 성취를 시험해 보고자 한다. (농암집』권1, 「제명농당 병서(題明農堂 幷序)」)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간 중간에 내직을 잠깐씩 맡기도 했지만2) 주로 외직으로 돌면서 아홉 고을의 군수, 부사, 목사, 부윤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매우 유래가 드문 일이다. 그가 이처럼 오래 외직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자청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 치적이 탁월하고 또한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향 안동이나 본관(本貫, 永川임)의 인근에 있는 여러 고을을 다스렸지만 그의 자제나 친척, 친구들이 감히 그를 찾아 갈 생각을 못할 정도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한다.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외직은 내직보다 소득은 많았으나 조금만 방심하면 뜻하지 않는 사고가 나거나 음해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조선조 500년 동안 210여 명의 청백리(淸白吏)3)가 선발되었는데, 그 중에서 30여 년을 외직에 있으면서도 청백리로 선발된 사람은 아마도 농암 이현보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렇게 30여 년을 외직으로 도는 동안 그는 나이 70이 넘어서야 겨우 참판(參判)이 될 수 있었지만, 그 반면에 사림 출신이면서도 사림들이 대거 희생되던 4대 사화를 운 좋게 피해갈 수 있었다.4) 73세 때 3년 상을 마친 뒤 형조참판, 이듬해에 호조참판을 거쳐 76세에 동지중추부사로 바뀌어 임명되었다. 76세 되던 1542년 7월에 병이 들어 온천에 가서 치료하기를 요청하여 하락을 받고 7월 17일에 도성을 나오니 중종 임금은 친히 농암을 접견하고 금서대(金犀帶)와 비단도포(錦袍)를 특별히 하사하였고, 한강변에 있는 제천정(濟川亭)에서 거행된 전별연에는 조정 고관들과 도성 사대부들이 운집하여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배를 타고 떠났는데 당시 배 안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 뿐이었다 하니5) 그의 검소함과 청렴결백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국왕과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계를 은퇴했을 때는 첨예한 사화의 시대였지만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일제히 은퇴식장에 참가하였다. 이 날의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근고(近古)에 없는 성사(盛事)”라고 찬탄했다. 농암집에는 당시의 전별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안의 사대부들이 선생의 영원한 은퇴를 짐작하고 일시에 조정을 비우고 나와 전별을 하는데, 도성 문(門)의 전별 여막에서부터 한강가 제천정 전별연까지 수레가 길을 메우고 구경꾼들이 담장을 이루듯 했다. 모두들 탄식하며 눈믈을 흘리며 ‘근고에 없는 성사’라고 했다. 여러 진신들과 종일토록 정담을 나누고 작별을 했다. 전별연의 기록에 의하면, 임인(1542년) 7월 17일, 국왕께 사직 인사를 하고 문밖에 설치한 전별연에는 경기감사 신거관(愼居寬), 판돈령 윤임(尹任), 동지 정사룡(鄭士龍), 동지 윤사익(尹思翼), 공조참판 윤개(尹槪), 첨지 이희보(李希輔), 첨지 윤계(尹溪), 부원군 윤여필(尹汝弼), 이상 유관(柳灌), 삼재 권벌(權橃), 사재 이언적(李彦迪),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형조판서 이기(李芑), 형조참의 이임(李霖), 호조판서 정순붕(鄭順朋), 공조판서 홍경림(洪景霖)이 참석했는데, 두모포(頭毛浦)에 이르기까지 따라와 전별했다. (小記) 병조참판 정세호(鄭世虎), 참의 권응정(權應挺), 첨지 김광준(金光準) 등 당하관은 기록하지 않았고, 전별연 석상에서 증행시를 지어준 사람은 예조판서 김안국(金安國), 창령군 조계상(曺繼商), 형조판서 성세창(成世昌), 예조판서 송인수(宋麟壽), 호조참의 장적(張籍), 예조참의 조사수(趙士秀), 의정부사인 이황(李滉) 등이다. (농암집』연보, 선생 76세조)
회재(晦齋, 이언적)는 장문의 전별시를 지었으며, 모재(慕齋, 김안국)와 충재(冲齋, 권벌)는 한강까지 나왔고 신재(愼齋, 주세붕)는 죽령에서 농암을 맞이했다. 퇴계는 이날 배를 타고 따라오면서 거듭해서 시를 바쳤고, 훗날 자신도 은퇴를 감행했다. 훗날 퇴계의 은퇴에 대해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은 한 때 ‘선생님의 사퇴는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날카롭게 공격하자, 퇴계는 이 공격에 대하여 최후로 농암의 은퇴를 인증하면서,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라고 개탄했다.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은 농암의 정계 은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아!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학문과 현달이 아니오, 벼슬과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아니다.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오직 정계를 자진해서 은퇴한 것이라 하겠다. 대개 유사이래 벼슬한 사람이 용퇴한 경우로는 한나라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와 당나라의 양거원(楊巨源) 외에는 다시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 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수 천년을 내려왔는데, 유독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세사풍속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소광, 소수, 양거원의 자취를 이어 용퇴하셨다. 회재(晦齋), 충재(冲齋)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 퇴계(退溪)께서 시를 지어 작별했으니, 소광, 소수가 떠날 때의 1백 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비유하겠는가.… 우리 농암 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한 분뿐임을 진정 흠모하게 되었다. (구전집』권5, 장33, 「농암선생퇴휴병발(聾巖先生退休屛跋)」) 정계에서 은퇴하여 환가(還家)한 뒤에도 조정에서는 벼슬을 높이며 그를 불러 77세에는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79세에는 자헌대부(정2품) 상호군에 올랐으며 삼세추증(三世追贈)의 영예를 입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83세에는 정헌대부(정2품, 8월), 숭정대부(종1품, 10월)에 오르고, 경상도 관찰사를 통하여 음식물을 하사 받고, 이어서 명종 임금으로부터 금서대와 비단도포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4)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자연을 소재로 하여 벼슬길의 영욕이나 세속의 이해를 멀리한 채 살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하는 강호문학은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학의 주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진(晉)나라 때의 시인인 도잠(陶潛, 호는 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상(濫觴)으로 하는 강호문학은 당나라 때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같은 대시인에 의하여 계승되고 심화되어 한문학 분야에서는 일찍부터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강호문학의 전통을 국문시가에 수용하여 이를 우리의 현실에 알맞도록 변형시켜 재확립한 인물이 바로 영남의 이현보와 호남의 송순(宋純, 1493~1583)이다.
5) 농암은 생원시에는 100명 가운데 2등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예비시험인 관시(館試)에서는 1등으로 선발되는 등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막상 본시험에서는 운이 없었던지 병과로 급제하였다. 6) 농암은 내직에서도 바른말을 서슴치 않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그 예로 중종실록 권4 (2년 10월 계사조), 중종실록 권19 (8년 11월 신미조), 중종실록 권44 (17년 4월 무자조), 중종실록 권60 (23년 3월 을해조), 중종실록 권75 (28년 7월 경오조) 등을 참조하기 바람.
7) 강효석(姜斅錫)이 펴낸 전고대방(典故大方) 권2, 장42~46의 청백리록에는 조선 태조조에서 순조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218명의 청백리 명단이 보인다. ‘청백리’란 문자 그대로 청렴결백한 관리를 말하지만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호칭은 아니라, 조정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후 임금의 재가를 받아 청백리록에 이름이 올라야 ‘청백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청백리’로 선발되면 자신만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인 동시에 자손들에게도 많은 혜택이 있었다. 8) 그는 무오사화가 일어나던 해 과거에 급제하였고,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안기역으로 유배되어 참화를 모면했다. 또 기묘사화는 안동부사로 재직시에 일어났고, 을사사화는 그가 벼슬에서 은퇴하여 병석에 있을 때 일어났다. 9) 중종실록 권 98, 37년 7월 신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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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한 자료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