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대학교가 봉황산 밑 사대부고 자리에서 현재의 신관동 캠퍼스로 이전한 것은 1970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신관동 개발이 점차 이루어졌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신관동 모습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제일 아래쪽 사진 2장은 신관동으로 이전하기 전 공주대학교 교정 모습니다.
40여년전의 공주대학교(1948-1990) 모습, 아니 공주대학교가 들어서기 전 야산 풍경,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보곤 했는데, 아직까지 그럴듯한 사진을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학교 교사자료실에 사진이 몇장 있기는 한데, 대부분이 특정 행사때 인물 중심으로 촬영된 것들 뿐입니다. 아래의 사진들도 예외없이 행사사진인지라 재미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것들을 여럿 발견을 할수 있습니다.
가령, 아래의 기념식 사진을 보면, 공주 사범대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모두 교복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수 있지요. 여러분들은 촌스럽게 느낄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달랐습니다. 당시 사범대생 교복은, 중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썩 잘한 모범생라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 별탈 없는 한 중등학교 선생님이 되실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표였습니다.
1969년 삼선개헌을 한뒤 대통령에 당선된 독재자 박정희의 부인, 이른바 '영부인'이 육영수(1925-1974)였지요. 아래사진은 1970년 10월 8일 영부인이 공주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왜 하필 학생생활관을 목련사로 이름 붙혔을까요. 공주 내려와서 이와 관련한 구전을 들어본적이 있는듯데, 육영수 여사님이 특별히 목련을 좋아하셨답니다. 지금은 많이 베어졌으나 1970년대 초반 공주대학교에 유독 목련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도 이런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아래의 행사 사진 윗쪽 둔덕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게 보이시죠. 그곳이 요즘 제1과학교육관이 들어서 있는 둔덕인데, 당시 학교를 다니신 분들의 회고담에 따르면 날이 좋으면 점심때 그 곳 무덤가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까먹었다더군요. 당시 공주사대 학생들은 매일 소풍을 다닌거나 마찬가지였던듯 합니다.
당시 속칭 날나리 학생들이 범생이들에게 흔히 했던 말, 그게 뭔지 아세요. "공부 열심히 한다고 교장시켜주는 것도 아닌데...". 당시 국립 사범대생들을 '의무적'으로 소정의 기간동안 중등학교 교사직(일종의 役)을 수행해야 했었습니다. 그 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소정의 배상을 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낮선 제도이지요. 당시 사범학교는 사관학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사와 장교는 동격이었지요. 맨 아래쪽 사진을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날 겁니다.
제일 첫 번째 사진은 공주 사범대학교(1948-1990) 역사를 쓸때 반드시 써먹어야할 사진이라 여겨집니다. 사범대학이 어떤 뭘하는 학교인지, 왜 만들었는지, 어떤 교사를 양성했는지, 어떤 교사가 양성되었을지 등을 잘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의 사범학교는 사관학교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인재’(교사와 장교)를 키워내는 일종의 ‘목적 학교’였습니다.
첫 번재 사진에 멀리 보이는 산들이 공산성입니다. 희미하게 금강철교도 보이지요. 여학생들 뒷편 뜰이 바로 대운동장입니다. 운동장 공사가 한창일때 찍은 사진인듯 합니다. 1970년 가을 무렵 공주대학교 후문쪽 모습이 이랬다는 겁니다. 지금의 후문 모습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지금의 현대아파트 인근에 '상록원'이라는 학생들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는데, 그곳의 모습도 보이는듯 합니다.
인류학을 하는 분들이, '낮설게 보기'라는 걸, 강조합니다. 그런 자세를 견지하며, 아래의 사진들이나 앞서 올린 사진들을 찬찬히 감상하신뒤, 소감을 달아주시면 전시작품 제작에 많은 도움이 될듯 합니다.






첫댓글 신관캠퍼스, 옥룡캠퍼스 어디인지 전혀 감을 못 잡겠군요. 특히 첫번째 사진에서 구경 나오신 부모님, 이웃분들, 내빈 들의 옷차림과 자세, 서 있는 위치 등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뒷모습이 진지하고 매우 집중하는군요.
맨 윗편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지금 우체국이 입점해 있는 구인사대 건물이고, 한창 공사중인 건물이 바로 현재의 박물관 건물이라 여겨집니다. 헌데 아래 사진들에 보이는 양옥집은 사택인듯한데, 어디쯤에 있었던 건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공주대학교 건물은 위 사진에 보이는 것들이 다였던 듯 합니다. 공주대 졸업생 교수님들로부터 점심때가 되면 무덤가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까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진속에 보이는 무덤들이 그곳인듯 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택이 아니라 이게 목련사입니다. 가정교육의 산실이라고......
그래서 아마도 육영수가 참석했을 것 같구요. 이후 각 여자고등학교에 가정실습관이 지어지게 됩니다.
이 목련사의 위치는 현재 중앙도서관로비부근쯤이구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준공식인데, 구박물관 건물 공사가 한창인 걸 보고 좀 이상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맨 아래쪽 사진이 준공식의 주인공인 목련사였군요. 중앙도서관은 틀림없이 제가 공주로 오기 전에 지은 건데, 그전에 그 자리에 뭐가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네요.
목련사에 한번 들어가본 적이 있습니다. 영어과학생이 축제 때 목련사에서 토론이 있다고 참석하지고해서.....
원래지표가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잇었는데 지형을 완벽하게 무시한 토목공사를 한 것 같네요.
아...그러네여..다섯번째 사진이 목련사가 맞구여 그게 있던 곳은 지금 교양관과 중도 사이 정도..지금의 중도 옆 주차장이 있는 곳 정도가 아닐까 싶어여...물방울님이 말씀하신 중도 로비부근 쯤이네여..그리고 중도는 최근에 들어선 것이고 그 이전에는 거기에 광장이 있었습니다..민주광장이라고 불렀지여..목련사 바로 서쪽편에 해당됩니다..근데 학생들이 거기 모여 시위를 하니까 그 광장을 열십자로 나눠서 하나로 모일 수 없도록 해 놨었지여...85년에 이미 그렇게 해 놨었어여..민주광장 북쪽으로는 높에 축대가 나 있었고, 그 위에 매점이 있었습니다..지금 중도를 보면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게 다 그런이유때문입니다.
남쪽에서 3층에 해당되는게 북쪽으로 들어가면 중도의 1층이나 마찬가지여...실제로 지금이 중도 북쪽 출입문과 남쪽 출입문 사이에는 큰 낙차가 있었습니다. 그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중도를 지은거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