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선사(曼庵禪師 1876~1957)
[ 만암선사 진영 ]
속명은 송(宋)씨, 법호는 만암(曼庵), 목양산인(牧羊山人). 본관은 여산. 전북 고창에서 1876년(고종 13)
1월 17일 태어났다. 1886년(고종 23) 부모님을 여의고 장성 백양사에서 취운 도진(翠雲 道珍)에게 출가하
고, 16세에 구암사 한영(漢永)스님과 운문암 환응(幻應)스님에게 수학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에는 호남 지방을 떠돌면서 여러 곳에서 불교 사상을 강설하였다. 이 무렵 우리나
라 불교계에서는 비구와 대처 문제로 논란이 많았는데, 그는 사원 생활에서 처음으로 비구와 대처를 구분
해서 법당에 정법중(正法衆; 비구)과 호법중(護法衆; 대처)이라는 표찰을 써 놓고, 각각 구별해서 앉도록
했다.
1917년 백양사 주지로 부임하고, 전통과 현대를 겸비한 승려교육을 위해 광성의숙을 설립했고, 일반인들
을 위해 심상학교를 세웠다. 1925년 임제종 설립을 주도하였고, 그후 1928년 박한영 스님과 함께 중앙불교
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전남 광주에 정광(淨光)학교를 설립
하였다.
1945년 무렵에는 당시 총무원과 그가 이끄는 고불회(古佛會)가 맞섰다. 그는 새로운 것을 따라 불교가 변
질되는 것을 보고, 과거의 엄격했던 계율과 법식으로 불교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교계에 세력
을 형성했다. 호남 고불(古佛)총림을 결성하여 불교 정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조계종 정화
운동의 효시이다.
1952년 정호의 뒤를 이어서 교정(敎正)이 된 그는 고불회의 뜻을 살려 종명을 조계종이라 하고 종헌에서
교화승(대처)과 수행승(비구)의 구분을 두었다. 1950년 한암스님에 이어 제2대 교정에 추대되면서 종단 명
칭을 조계종으로, 교정을 종정으로 바꾸어 한국불교의 법통을 세웠다.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 정화운동에 관한 유시가 있자, 비구측은 9월 전국대회를 열어 종정에 그,
부종정에 동산 혜일(東山 慧日), 도총섭에 청담 순호(靑潭 淳浩)를 선출하여 정화운동을 추진키로 했다. 그
러나 그는 정화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구 대표자들의 이견을 조정하려고 노력하다 실패했다. 1957년 1월 22
일(음력 12월 22일) 나이 82세, 법랍 71년으로 입적했다. 다비 후 사리 8과가 나와 제주와 백양사에 봉안했다.
제자로는 서옹(西翁) 등이 있다.
‘주는불교’ 설파 빈민구제 혼신
흉년들면 공사벌여 품삯“눈이 오니 풍년 들겠구나”대중들과 기뻐하다 입적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백양호수 맑은 물 옆길을 거슬러 발자국이 나있다. 서산대사의 부도탑지 옆에서 눈
길을 걸으니 어찌 대사의 시가 더욱 간절하지 않을까.
부도탑 인근 절 입구엔 쌍계루가 있다. 백암산의 산봉우리 백학봉 좌우에서 흘러내린 물이 냇물이 되어 만나
는 곳이다. 이 물을 만암 선사가 막아 보를 쌓았다.
백양사는 예부터 가장 가난한 절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만암은 주지가 되자 죽을 쑤어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
지는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하촌의 집들에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 때 신세를 진 마을 사람들이 가을 추수 때 흉
년인데도 곡식을 지고 되갚으려하자 다음해부터 보막이 공사를 벌여 노임을 줘서 구제사업을 펼쳤다. 일거리
가 사라지면 멀쩡한 보를 다시 터서 또 공사를 벌여 노임을 주곤 했다.
‘이뭣꼬’ 씨름 7년만에 득도
전북 고창에서 빈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만암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1살 때 어머니마저 잃자 곧 출가했
다. 어머니가 흰양을 안은 태몽을 꾸고 그를 얻었다니 흰양을 뜻하는 백양사 출가는 필연이었을까.
당대의 대강백 한영·환응 스님 등으로부터 배워 불과 25살 때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됐던 그는 교학에 그치지 않
고 ‘이뭣꼬’(이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7년 동안 정진하다 마침내 운문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 학명 스님을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만암을 만암이게 한 것은 그의 삶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300년간 닫혀 있던 산문을 중생을
위해 활짝 열어젖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노승들의 반대에도 산내 청류암에 광성의숙이란 교육기관을 만
들어 훗날 조국과 불교계를 이끌 인재 양성에 나섰다. 이런 열정으로 만암은 1928년부터 3년 간 동국대학교 전
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1947년엔 광주 정광중고교를 설립했다.
그는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며 스님들에게 산에서 칡넝쿨과 싸리나무를 베어다 소쿠리를
만들고, 대나무를 베어다가 바구니를 만들게 했다. 또 곶감을 만들고 벌을 쳤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동안 신세
진 불자들에게 보내졌다. 처음엔 “중들이 수행이나 하면 되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불만의 소리가 적지 않았지
만, 만암은 직접 낫을 들고 일에 앞장섰다.
“선과 농사는 둘이 아니다”
일이 많다고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을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새벽과 저녁 예불에 참여하지 않는 중은 밥
도 주지 말라고 엄명했다. 만암의 말년에 3년 간 그를 시봉했던 서울 용화사 한주 학능 스님(67)은 “큰스님은 뒷
방에 거처하지 않고 대중방인 향적전 옆에 조그만 방에서 거처하며 늘 대중생활을 했으며, 열반하기 며칠 전까
지도 늘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며 조석예불에 참석하고, 방에 돌아와서는 밤새 좌선 정진하곤 했다”고 회
고했다. 만암의 슬로건은 ‘선농일여’(禪農一如:선과 농사가 둘이 아님)였다.
그렇다고 그가 사찰 운영을 ‘독재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절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대소사를 만장일치로 결
정하는 게 대중공사다. 그는 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중의 합의로 일을 해나갔다. ‘백양사에서 (대중)공사 자랑
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자신에겐 철저하고 대중에겐 관대했던 만암선사
만암의 삶의 방식은 조계종 종정이던 당시 ‘취처승(아내가 있는 승려)을 절에서 몰아내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의 유시로 불붙은 ‘정화’ 때도 잘 드러났다. 그는 강경파들이 대처승들을 절에서 폭력적으로 몰아내려하자 종정직
을 홀연히 벗고 백양사로 돌아갔다. 그는 대처승들도 절을 돕도록 하되 상좌(제자)는 두지 못하도록 해 자연스럽게
정화를 이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가장 철저히 계율을 지킨 청정 비구승이었지만 대처승들을 불가 안에서
활로를 찾아주고자 했다.
만암은 세납 80살이던 어느 날 대중들과 함께 죽로차를 마시다 “눈이 저렇게 오니 풍년이 들겠구나”고 기뻐하며
그대로 입적했다. 평생 흉년에 배곯이하고 배울 학교조차 갖지 못한 중생들과 동고동락해온 만암의 상여길도 이처
럼 눈밭이었으리라.
원오스님이 입적한 뒤 다시 대혜스님에게 귀의하여 경산(徑山)에 수좌로 있었다. 무착 묘총(無?妙聰) 비구니가
아직 출가승이 되지 않았을 때 대혜스님이 그녀에게 방장실에 숙소를 정해주자 스님은 항상 이를 비난해 왔다.
이에 대혜스님이 "그녀가 비록 아녀자이긴 하지만 훨씬 나은 점이 있다"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대혜스님이 강제로 그를 만나보도록 명하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무착이 스님에게 말하였다.
"수좌께서는 저와 불법으로 만나시렵니까? 아니면 속세법으로 만나시렵니까?"
"불법으로 만납시다."
"옆의 사람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그리고는 스님을 방으로 들어오라 청하였다. 스님이 휘장 앞으로 다가서 보니 무착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반듯이 누워 있었다. 스님이 손가락질하며 말하였다.
"여기서 무엇하는 것이오?"
"삼세 모든 부처와 육대 조사, 그리고 천하의 노화상도 모두 이속에서 나왔습니다."
"이 노승이 들어가도 되겠소?"
"여기는 말이나 당나귀가 건너는 곳이 아니오."
스님이 말을 못하자 무착은 말하였다.
"수좌와의 첫인사는 끝났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망신을 당하고서 나오고야 말았는데 대혜스님이 물었다.
"이 못난 중생이 지각없는 짓을 한 게 아닌가?"
그러자 스님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대혜스님은 입실법문에서 남전스님이 암자에 주석할 때 산에 올라가 일을 하는데 한 스님이 찾아오니 그
스님에게 밥을 지어먹고 산으로 한 그릇 가져오라 했던 인연을 들어 설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산호 베개 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은 하나는 님 생각이고, 하나는 님을 원망하는 마음일세."
대혜스님은 시자에게 명패(名牌)를 거두게 한 뒤 "이 한 마디로 충분히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였다."
하고 법문을 끝냈다.
스님은 처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다가 뒤에 고향에 돌아가 운정산(雲頂山)에 머물렀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양나라 지공(誌公) 화상이다."
"무엇이 불법입니까?"
"기막히게 절묘한 말[黃絹幼婦 外孫?臼]이다."
"무엇이 스님입니까?"
"낚싯배 위에 있는 사삼랑(謝三郞 : 玄妙스님)이다."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젓가락통에는 젓가락과 이쑤시개가 뒤섞여 있지 않고 늙은 쥐는 떡시루와 바구니를 물어뜯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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