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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김기석 지음-청파교회담임목사)
1부 공동체의 길
모든 사람과 함께 가라
선생님, 백운동 계곡을 선생님과 함께 걸었을 때에 계곡 사이에 틀어박힌 작은 마을, 사람과 자연이 한 덩어리로 아름답게 뒤엉켜진 이 마을 공동체가 부스러져가는 모습을 보시고, 천박한 자본주의가 이 산간 마을에도 들어와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셨지요. 돈은 어느 곳을 가든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을 ‘맘몬’이라고 하신 것이겠지요. 마을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은 삶을 삶답게 하는 생활 조건으로서 정신적 귀소(歸巢)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 공동체에서 인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마을 공동체는 모두 한 가족이었습니다.집안의 대소사를 모르는 이가 없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었으니까요. 산이 깎여져 나가고 바다가 메워지면서 우리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던 삶의 이야기와 공공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삶이란 인생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풍경들이 우리 가슴에 아로새긴 무늬가 아니겠습니까? 이 땅은 인간들의 거주 공간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생명들의 삶터라는 사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세계관과 생명주의적 세계관 사이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마커스 보그라는 예수님의 삶을 자비의 정치학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건한 종교인들의 ‘거룩의 정치학’과 구별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정확히 둘로 나뉩니다. 정결과 부정, 순결과 더러움, 성스러움과 속됨, 유대인과 이방인, 죄인과 의인, 남성과 여성의 양극성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변인들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거룩의 정치학을 벗어난 땅의 사람들, 세리와 창녀와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의 잣대를 버리고 자비의 에토스를 가지고 사람들과 만나셨습니다. 거룩은 나누게 하지만 자비는 하나 되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비의 에토스가 아닐까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성지 순례란 이름으로 레바논에 다녀왔습니다. 그 옛날 이 땅을 지나셨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발자취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1975년 4월 레바논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내전에 시리아가 개입하고 이어 이스라엘이 개입하면서 점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다가 10만 명이 희생된 가운데 1990년에야 막을 내렸습니다. 그곳에 가서 깨달았습니다. 저를 소환한 것은 여전히 평화의 꿈이 난폭하게 짓밟히고 있는 분쟁의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흘린 피였습니다. 저마다 평화를 가르치고 때가 되면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는 종교인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 정치적인 맥락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알라의 이름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어느 편이 되었던 으뜸 되는(宗) 가르침(敎)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그 땅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 분의 은총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생명의 외부는 없습니다. 모두가 내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을 긋거나 담을 쌓아 너와 나를 가릅니다. 송기숙 선생은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화남출판사)에서 사람이 모여서 ‘더불어’ 사는 최소 단위인 동네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라면서 다섯 부류의 사람이 어느 동네나 있는 사회의 구색이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동네 어른, 둘째, 늘 말썽만 피우거나 버릇없는 후레자식, 셋째, 일삼아서 이 집 저 집으로 말을 들어 물어 나르는 입이 잰 여자, 넷째, 틈만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웃기는 익살꾼, 다섯째, 좀 모자란 반편이나 몸이 부실한 장애인. 마을은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말없이 품어 안았습니다. 간디가 마을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 인도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한 말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나날의 삶이야말로 너희의 사원이며 종교”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이 만나고 부딪치는 저잣거리나 생선 비린내가 배어 있는 시장 골목조차도 사원과 종교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든 신에게 가지고 가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됩니다. ‘쟁기와 풀무’, ‘망치와 피리’ 무엇 하나 신 앞에서 속된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 부득이 경험하게 되는 어둠과 부끄러움조차도 다른 이름으로 명명할 생각을 버리고 그분께 가져가면 그것은 빛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억을 나누어 드립니다
아름다운 기억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도 소중합니다. 인생은 어쩌면 즐거운 기억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엮은 실을 씨실로 삼고, 보이지 않는 돌봄의 손길을 날실로 삼아 짜내려가는 테피스트리(tapestry)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시 하샤냐(Rosh Hashana)는 유대인들의 설날입니다. 그들은 설날을 욤 하지카론(Yom Hazikaron)이라고도 부르지요. ‘기억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뜻일까요? 자기들의 살아온 지난날을 참회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동시에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기억은 그런 의미에서 동일성의 뿌리입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시대나 가까운 이들과 불화를 겪게 마련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낸 기억의 응축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엘리 비젤(Elie Wiesel)은 『흑야』, 『새벽』, 『팔티엘의 비망록』, 『예루살렘의 거지들』, 『벽 너머 마을』 등의 소설을 통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그는 199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엘리 비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앞서 죽어간 이들에 대해 증언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희생자들의 고독과 슬픔, 거의 미쳐가던 어머니들의 눈물, 불붙는 하늘 아래서 드리는 불운한 이들의 기도 등을 말입니다. 이 기억을 통해서 피가 맺히도록 아우성 쳤던, 실존의 고함소리를 말입니다.
그들은 엄마 뒤에 숨어서 아주 부드럽게 ‘지금 울어도 돼요?’라고 물었던 소녀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들은 굳게 잠긴 짐칸에서 동료들에게 바치는 선물인 냥 노래를 시작한 병든 걸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할머니를 껴안으면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는 것을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 나는 두렵지 않아요”라고 속삭였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도. 두려움 없이, 후회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향해 나아갔던 어린 소녀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1996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 일부. 사역)
기억을 기록하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엄펑스럽게 우리를 끌고 다니는 시간, 때로는 가혹하게 시린 등을 밀어젖히는 시간 속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부 주체적 정신의 설자리
한 사랑이 스쳐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랑하기에 함께(com) 아파하는(passion) 그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물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가 이외수는 “사랑을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달리는 도중에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절교 선언이나 배신행위에 개의치 말라. 그러나 마라톤에서의 골인 지점은 정해져 있지만 사랑에서 골인 지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평생 달려도 골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은 그대의 반평생을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진정한 사랑을 탐내기에는 자격미달이다.
사랑의 집은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겪어낸 시간이 덧쌓여 이뤄낸 건축물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따뜻함과 차가움, 사랑과 미움, 감사와 원망이 뒤섞이며 이뤄낸 아늑한 공간, 그곳이야말로 창조적 생명의 뿌리일 것입니다.
자기를 열어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다보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상처가 두려워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고, 또 그것을 치유해가는 과정일 텐데 상처를 받아도 좋다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속이 편안할 것 같아요. 선택의 여지도 더 많이 생길 것이고요.
칼 구스타프 융은 사람은 나(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바깥세상과 어울릴 뿐 아니라, 나를 통해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살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아의식 속에는 ‘우리’라는 집단적 견해, 집단적 가치관 또는 행동 규범이 들어와 있답니다. 사람들은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이나 행동 규범을 마치 자기 것인 냥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지요. 이렇게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집단이 요구하는 태도, 생각, 행동, 규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persna, 가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집단에 적응해 나갑니다. 자아의 어두운 면인 그림자는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성격입니다. 자아의식의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지요?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의 내면에는 일탈의 욕망이 들끓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겁니다.
선생님 너무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자기의 이미지에 집착하며 살다보면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여도 내면은 황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여백이 적을수록 작은 상처에도 큰 신음소리를 내게 됩니다. 사랑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면서 자기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용기가 아닐까요?
반항하는 정신
선생님, 믿음이란 날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예적 안일함을 박차고 일어나 자유를 향해 길 떠나는 것, 바로 그것이 청년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사유하지 않는 젊은이, 불온하지 않는 젊은이, 기존 질서에 순치된 젊은이, 소비사회에 투항해버린 젊은이를 바라보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비판적 성찰이란 귀찮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일하게 통설에 기울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조작하기 좋아하는 대중’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만만치 않는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논리와 정신을 꿰뚫어 보면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어 튀모스(thumos)는 사람이나 동물 속에 깃든 어떤 요소를 지칭하는 말인데, 예컨대 위협을 받을 때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힘을 뜻합니다. 개가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이나, 사람이 자기 가족과 종교, 자기의 삶의 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결연히 일어서는 힘이지요. ‘호기呼氣’라고 번역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문제는 부드러움과 호기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입니다. 경직된 마음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면 누군가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상처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진실은 실종되고 대립하는 두 성격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낮춤으로 남을 살리던 예수의 정신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갈릴리의 밑바닥 사람들의 삶 속에 화육했던 예수, 열병 걸린 이들의 손을 붙잡고 마음 아파 눈물을 글썽이던 소박한 예수의 모습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카타콤 시대에 양을 어깨에 메고 있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우주의 주관자인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 꿩 잡는 매라고, 암암리에 교회의 크기가 목회자들의 영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평화의 문제도, 생명의 문제도 한쪽으로 밀쳐놓고 오로지 교인 수 늘리는 데만 몰두합니다. “목사님, 왜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편협할까요?” 그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합리와 정리 사이에서
선생님, 저는 합리(合理)와 정리(情理)의 경계선상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저는 처세에 능하지 못합니다. 종종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리원칙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분리의 담을 헐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는데,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이 오히려 분리의 장벽을 높이 쌓아가는 것은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아닐까요? 공적인 일에는 ‘정리’보다는 ‘합리’라는 척도가 사용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도심 중앙의 광장인 아고라(agora)에 모여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곤 했습니다. 그곳은 어떤 견해라도 개진될 수 있는 열린 광장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공적인 일을 밀실에서 처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고라의 주인은 로고스였습니다. 조직 또는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귀속감이 로고스를 억압하는 곳에서는 주체적인 정신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서열관계를 중시하는 집단 속에서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일쑤이고, ‘조직의 쓴 맛’을 볼 때가 많습니다. 주체적인 정신이 보편적인 정신에 동참하지 못한 채 사사로운 ‘우리’ 속에 함몰될 때 영혼의 타락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많지요. ‘합리’의 배를 타고 건너기엔 삶의 너울이 너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리’의 배 한 척을 더 마련하고 살아갑니다. 탕자의 귀환을 반기는 아버지의 태도는 합리가 아니라 정리이겠지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예수님의 다정함은 합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을 품어 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다점함을 ‘정리’라는 말에 담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합리’와 ‘정리’를 종교적으로 확장하면 ‘미쉬팟(mishpat)’과 ‘째다카(tsedakah)’라는 개념과 통할 수 있겠는지요. 미쉬팟이란 재판관이 내린 판결을 뜻합니다. 정의, 규범, 법령, 법적 권리, 법률 등의 뜻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째다카는 의(righteousness)로 번역될 수 있는데, 박애, 친절, 관용 등 인격적 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가 법적인 것이라면, 의는 억압받는 자에 대한 동정과 연결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두 개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서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신의 독립군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거나 불편한 것으로 여기곤 하지요. 어쩌면 그게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발전시켜온 내재적 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낯선 것과의 만남이야말로 자기 확장의 기회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타자’라는 거울 앞에 있을 때뿐입니다. 반성이란 정신의 자기복귀라지요?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해가는 과정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은 자신에 대한 엄밀한 인식으로서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고 있는 우리 말살이의 무의적인 뿌리는 낯선 것에 대한,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낯선 것과의 열린 만남은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합니다.
나태한 정신은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의 목소리를 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차이를 드러낼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 독립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언어와 입장에 편승하기보다는 스스로 철저히 검토해보고 내린 결론이라면 비록 그것이 편견일지라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에 잘못된 것이면 질정을 받겠다는 열린 태도가 필요하지요. 저는 이 시대가 정신적인 독립군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과 힘이 모든 인간적 가치의 목덜미를 죄어치는 시대일수록, 대오를 이탈해 탈주를 거듭하는 정신의 독립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신의 독립군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는 연대할 줄도 알아야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홀로 걸어가는 오솔길도 있Viewer어야 하지만, 어깨를 겯고 함께 나아가는 광장도 필요합니다.
3부 웃으면서 싸우려면
의붓아버지에게서 벗어나라
선생님, 언젠가 선생님이 “세상은 권력(power)과 이윤(profit)과 쾌락(pleasure)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것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초월적 가치의 영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참담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일 테니까요. 순교자인 카즈 뭉크(Kaj Munk)는 오랜 역사를 통해 교회의 상징은 사자․어린양․비둘기․물고기였지 카멜레온이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유린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대규모로 파괴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분노 또한 믿음에 바탕을 둔 낙관주의와 결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될 테니까요. 시인 황지우는 박정희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내게 낯설고 억압적인 ‘타자’인 의붓아버지 같은 이미지로 짙게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박정희는 다만 상징적일 뿐이고,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나의 스승들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요직을 차지했던 내로라하는 원로들이 다 ‘아버지들’이다”라는 말에 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벌 혹은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이들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욕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타율적인 존재로 길들여지고 만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저는 이 목록에 ‘종교’ 아니 더 정확히는 ‘기독교’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 대신 ‘의붓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듯 합니다. 결국 문제는 ‘타자 체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경우 타자 체험이 주체성 확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의붓아버지를 자처하는 압도적인 타자 앞에서 주눅이 들어 타자화 된 자아가 있을 뿐입니다. 우직야愚直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곧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똑똑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곧은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 그런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쉽게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시몬 비젠탈의 『해바라기』(뜨인돌)를 보면서 저는 용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몬 비젠탈은 배고픔과 피로, 굴욕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젠탈은 수용소 동료들과 함께 임시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학교 건물로 일을 나갑니다. 그런데 적십사 소속의 간호사가 나타나 그가 유대인인지 확인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간호사는 그를 어느 방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은 임종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비젠탈은 온통 흰색 붕대에 감싸인 채 미동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한 독일군 병사를 보게 됩니다.
카를이라는 SS대원인 이 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수백 명의 유대인을 한 곳에 몰아놓고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반대쪽에서 기관총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수류탄을 안에 던져 넣었습니다. 카를은 아비규환의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2층 창문에서 어린아이를 안은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아이의 눈을 덮어 가린 채 길바닥으로 뛰어내렸고, 카를의 동료들은 기관총을 발사했습니다. 카를은 죽음 직전에 직면해서야 양심의 괴로움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유대인 누구에게라도 고하고 용서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젠탈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카를을 남겨두고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갑니다. 어떤 이들은 비젠탈을 이해의 시각으로 보지만, 어떤 이들은 비젠탈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로 물어보라고 권합니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너무 쉽게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했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용서의 신학은 형제가 내게 지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이에게 저지른 죄까지 용서할 권한은 내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쉽게 용서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쉽게 눈을 감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마음대로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없다면 결국 저는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과 비겁과 위선에 맞서 싸우되 미워하지 않고, 웃으며 싸울 수 있으려면 더 치열한 내적 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슬픈 인생에게 희망을 말하기
전쟁 통에 정든 땅을 떠나 떠돌던 야나로스 신부는 어느 개울가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몸을 구부리고 흐르는 물을 지켜보는 노인을 발견합니다. 개울에는 그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노인은 머리를 들고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내 인생을, 내 삶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오.” “걱정마세요. 영감님, 인생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답니다.” 노인이 한숨을 지었다. “그래요 젊은이,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오. 수많은 사람의 눈물이 모였기 때문이라오.”『전쟁과 신부』(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고려원)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떳떳한 마음만 있다면 죽음을 애달파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지호지간(指呼之間)입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중남미 여러 나라 사람들의 비탄에 잠긴 모습과 절규를 보고 들으며, 강력한 지진으로 초토화된 파키스탄의 여러 마을들을 보며 삶과 죽음을 자각하는 인간존재로 몸 받아 살아간다는 것이 복인지 화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난감한 것은 욥의 고난만이 아닙니다.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에 나오는 신부처럼 하나님께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벨브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 때문에 탈출로가 막히자, 신부는 몸을 던져 벨브를 잠그고는 자기들의 길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외치며 떨어져 죽지요. 그 모습은 젊은 시절에 제 가슴에 새긴 하나님 일꾼의 인장이었습니다.
저는 슬픔에 찬 사람들에게 희망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잊었습니다. 아니지요. 사실 희망은 말이 아닐 것입니다. 곁에 다가섬이지요. 유한한 인간은 슬픔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모두의 슬픔이라면 슬픔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서로를 품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겪는 누군가의 불행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얼싸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 섬김과 사람 아낌의 도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뭐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서슴없이 ‘아낌’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는 세상이니 모든 것을 아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합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주변부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부름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강고한 자본주의 세상에 균열을 내라는 것이 아닐까요?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사람 하나면 충분합니다.
저는 바른 신앙인은 정신의 독립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형무형의 강제에 떠밀리듯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자본이라는 바로(Pharoh)가 지배하는 세상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 예수적 가치가 교회와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열망하며, 식을 줄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그 예수적 가치 완성의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는 교회로, 한국 교회가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보여준 삶의 핵심이 ‘아낌’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세리든, 행실이 나쁜 여자라고 소문난 여인이든, 죄인이라고 규정된 사람이든,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백안시되는 병자들이든, 귀신에 들린 사람이든 예수님은 모두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인간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을 떠나, 그들 존재의 중심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아내셨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것이 참 삶의 시작일 겁니다. 아낌이야말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지름길입니다.
4부 온 마음을 다해 현실을 보라
시린 마음을 기억하라
마종기 시인의 ‘겨울 기도’라는 시에 이불이 얇은 자리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해 달라는 시인의 염원이 참 절실합니다. 시린 자의 마음을 잃어버린 순간에 우리는 마음의 감옥에 살게 되지요. 예언자들의 정념에 대해 말하면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악의 뿌리는 열정 속에, 고동치는 가슴 속에 있지 않고, 굳어진 가슴에, 그 냉담과 무감각 속에 박혀있다”는 말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열정이 많으면 실수도 많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 가슴에 상흔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의 열정이기보다는 냉담이 아닌가요. 내놓고 비난하는 사람보다 냉소적 미소를 띠고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더 큰 모욕을 느낍니다.
우리는 다리 놓는 자로 부름 받았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막힌 것은 뚫어 소통하게 해 주는 자, 바로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여자와 남자, 죄인과 의인, 거룩과 속됨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길을 내는 일에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천하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큰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좇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좇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정약용 다산문선』”
다산은 세상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是와 비非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익과 손해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지만, 물론 다산이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옳은 것을 지킴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옳은 것을 지키려다가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일수록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옳고 그름의 기준 대신 이익과 손해의 잣대로 인생을 대할 때에 우리는 병든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가르고 나누는 세상에서 품어 안으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나라와 나라, 종교와 종교 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때문에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 대동 세상을 이루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다
선생님, 지금쯤 서남아시아의 어딘가에 계시겠지요? 지진과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태국, 몰디브…. 그곳이 어디든 휑한 눈망울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말없이 그들의 손을 잡고 계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해일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제일 먼저 나온 탄식은 ‘왜 하필이면 그렇게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였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체와의 관련성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됨의 길을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목말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지 않고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에게 무슨 계기로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지요?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생명은 기술일 수 없다
지식이나 기술은 개발되는 순간에 예측 불가능한 자율성을 갖게 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기술의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돈이 권력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돈을 투입한 권력은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어로 기술을 테크네(techne)라고 하더군요.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이란 모든 존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현출(顯出)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닭이 알 잘 낳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땅이 소산을 잘 낼 수 있도록 지심을 북돋워 주는 것이 기술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소박한 기술은 존재자들의 조화를 중시합니다.
그에 비해 근대 이후의 기술은 존재자들을 닦달하는 과정입니다. 닭에게 성장 촉진제를 먹이고, 땅에는 화학비료를 뿌려대는 것이지요. 문제는 생산력의 증대는 생명을 위축시킨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이것은 외면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학은 그 죽음의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연기하는 기술을 터득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있어 아름답다는 말을 하려면, 눈 홀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삶이 결국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의 기회를 선용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때가 되면 결과에 관계없이 홀가분하게 손을 털고 갈 수 있다면, 이게 복이 아닌지요?
삶터를 도량삼아
선생님, 사람들은 삶을 보이지 않는 전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늘 승리와 패배의 경계선에서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무한경쟁의 싸움터에서 대치하고 있습니다.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은 승리자에게 눈길을 보내지만, 패배자에게는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행복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저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전선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터입니다. 사람됨이 도전받고 있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아테나의 최초의 행동은 전투였습니다. 지혜는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오류와 거짓에 맞서 저항할 때에 자랍니다. 맹렬하게 저항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투항한 셈입니다. 물론 이 싸움의 무기는 부드러움이어야 합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우리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삶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밥을 먹을 땐 맛있게 먹고, 잠을 잘 때에는 달게 자고, 일을 할 때는 신명나게 하고, 쉴 때는 마음 편히 쉬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께 ‘다음에’란 말은 없습니다. 상황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의 가슴에 생명의 싹을 틔워주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계산이 개입되는 순간에 사랑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계산 없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또 그 분은 우리를 그런 자리에 부르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혁명을 하자는 것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성년』에서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썼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고, 마주침에서 비롯되는 감성적인 일렁임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회피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회피하고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사랑은 사람됨이 핵심이고, 사람됨(being human)을 포기하고는 사람(human being)이 될 수 없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