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金憲昌─亂]
김헌창은 태종 무열왕계로 822년 3월 충청남도 공주 웅진성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진압은 822년4월 1개월만에 진압되었다.
선덕왕이 자식이 없어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으나
김경신[원성왕]의 반란으로 원성왕에 오르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813년 무진주[武珍州/광주]도독, 816년 청주[菁州/진주]도독,
821년 웅천주[공주]도독을 지내면서 이들을 겁박하여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완산주[(完山州/전주], 사벌주[沙伐州/상주]를 굴복시켜 장악하고,
서원경[西原京/청주], 국원경[國原京/충주], 금관경[金官京/김해]의 수령과 군현을 굴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청주[진주]도독 향영[向榮]이 삽량주[歃良州/양산]로 탈출하여 금성으로 들어가고,
완산주[전주]에서 주조(주보(州輔)/부도독) 김영충(金令忠/아찬 김정련의 아들),
장사[長史] 최웅[崔熊] 등이 금성으로 탈출하여 헌덕왕에게 알린다.
김헌창은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짓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경운[慶雲]은 경운산[慶雲山]에서 유래한 것인데 후연의 수도 용성에 있었다.
모용희가 산동성 등주시 북부 하북성 동남단 천진 지방에서 실크로드 무역으로부터
우선 혜택을 받기 위해 하남성 서북으로 옮겨 서연을 점령하고 살다가 북위에 의해
강제로 산서성 대동시 용성으로 보내져 경운산을 조성하는 토목공사를 강행하다가
몰락으로 이어진다.
최초로 산을 조성하는 토목공사를 강행하다가 몰락하는 왕이 모용희다.
귀빈 부여씨 왕비를 끔찍히 사랑하고 편애하여 귀빈 부씨에게 잘보이려고 경운산을 조성하다
태후 정씨가 부친인 정신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시키려다가 발각되어
태후 낙랑 정씨는 자살케하고 정신은 주살[誅殺-가족을 연루시켜 베어 죽임]되었다.
태후 정씨는 모용희가 17살 때부터 간통하는 사이였다.
모용희가 귀빈 부씨와 소의 부씨를 맞이하고 나서 사이가 멀어지자,
질투가 난 태후 정씨가 모용희를 폐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죽게 된다.
귀빈 부씨는 소의 부씨를 질투하여 소의 부씨가 일찍 죽게 되고 훗날 소의 부씨 가문이
복수를 하여 모용희가 몰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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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이 나라 이름을 섬서성 서안에 있던 장안성을 본 따서 지은 것은
실크로드 무역으로 들어오는 선진 문물의 향수를 얻기 위하여 장안[長安]이라고 한 것이다.
지독한 가난과 가뭄으로 힘든 시기였고 골품제도로 인한 불만이 최 고조로 달해 가는 시기였으며,
중원 선진 문물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시기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장안이라 하였다.
중원처럼 실크로드 문물이 풍부한 새로운 나라로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에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진주 도독 향영은 도독으로 진골[왕족]이다.
진골은 제1관등 이벌찬>제2관등 이찬>제3관등 소판>제4관등 파진찬>제5관등 대아찬,
5관등 이상의 관직을 제수받을 수가 있었다.
즉, 금성[경주]에서 현지로 파견되어 다스리다가 금성으로 탈출해가는 것이다.
완산주[전주]의 부도독 (주조/주보)인 김영충 역시 금성에서 파견되어온 관리였다.
대아찬 다음 직급인 아찬 김정련의 아들 김영충은 신라 금성에서 파견되어 온 것이다.
이것을 마치 완산주 [전주]사람이 금성으로 밀고하여 김헌창의 반란이 실패한듯이
역사 저널 그날에서 방송하는 것에 가소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장사[長史] 최웅[崔熊]은 시랑급이다.
제6관등 아찬, 제7관등 일길찬, 제8관등 사찬, 제9관등 급벌찬까지가 도독, 시랑에 오를 수가 있었다.
도독급보다 높은 직급이 시랑급이다.
시랑급보다 상급은 중시령으로 진골 이상만 오를 수가 있었다.
도독은 진골이상만 오를 수가 있지만 시랑급보다는 한단계 아래 등급이었다.
시랑급은 진골이 아니거나 현지 관료가 맡는 직급이다.
그러므로 장사 최웅은 시랑 [중원에서는 정 3품]이었으며,
금성에서 진골 김영충이 부도독[주조/주보]으로 파견되어 와서 최웅을 감시하면서 근무하다가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니 최웅과 함께 금성으로 들어가서 헌덕왕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마치 완산주 사람이 밀고하여 반란이 실패하는 것처럼 역사 조작좀 하지 말란 말이다.
제대로 된 역사적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나서 밝히라는 말이다.
현지 관료인 최웅이 시랑급으로 한 직급 위이지만 진골인 부도독 김영충의 감시를 받으며
근무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실권은 전무한 상태로 없었다는 말이다.
진골이었던 부도독 김영충은 군사적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시랑은 한 직급 위이지만 행정만 담당하며 군사적 실권은 없고 진골이 아닌
현지 관료나 금성에서 파견된 관료가 맡으며, 도독, 부도독은 진골이 행정 동원 권한 일부와
군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김헌창은 웅진 공주성에서 저항하게 되는데 성산[성주군]이 쉽게 무너지고
삼년산성 [충북 보은군] 전투에서 쉽게 패하는 바람에 전의를 상실하고 웅진성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어 속리산에서 방어 전선을 형성하던 반란군도 무너진다.
삼년산성은 백제의 성왕(50여명)이 이곳을기반으로 신라군을 정탐하러 성밖으로 나갔다가 전사하는 곳이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3년뒤 825년 한산주[漢山州 여주, 이천, 광주]로 옮겨
고달산[高達山 여주군~양평군 경계]의 산적인 수신[壽神] 등과 함께 한산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태종 무열왕계는 왕권에서 완전히 밀려나 사라진다.
김헌창의 반란으로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왕건의 고려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는 행정과 군사가 분리된 나라였다.
군사적 실권은 진골이 전담하여 도맡은 나라였다.
고려, 조선시대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고려, 조선은 시랑에 해당하는 관찰사[도지사]가 군정을 도맡아서 이끌어가는 체제였다.
진골 왕족이 군권을 가지고 9주 5 소경에 파견되어 현지 행정 관료를 감시하는 기능을 하여,
후기신라가 빨리 무너지게 되는 것이며, 이에 대한 반발로 고려시대에는 호족 제도가
등장하는 원인이 된다.
고려시대는 호족의 난립으로 폐혜[弊惠]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호족을 타파하고
중앙집권 제도를 도입하면서 각도의 수령인 관찰사 [종 2품]에게 행정과 군권 중 군행정권을 주고
감영에 병력을 주둔시켜 군사력 일부 [지방군 군행정권/인사권]를 지휘하게 하는
절충형 제도를 도입한다.
각도에는 군령권을 가진 조선 주력 육군 도병마 절도사 [기마 군단/종 2품]를 따로 두어
군사력을 유지시키면서도 군행정권에 대해 관찰사의 지휘를 일차적으로 받게 하고,
차후 군행정권은 병조의 재가를 받았으며 군령권은 왕명을 받은 비변사의 재가를 받았다.
전시에 비변사에서 순찰사 [종 2품], 도순찰사[정 2품]를 파견하여 지휘하게 하였던 것이다.
부윤 [정 3품 시장]이 지휘하는 종 5품 도사 병력은 부윤이나 목사, 지방 유력인사,
또는 비변사에서 파견하여 절제사 [정 3품~종 3품], 도절제사 [종 2품]로 임명하여
지방 방위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상시적으로 설치했던 전주진, 경주진의 절제사만 정 3품이고 타지방의 절제사는 종 3품,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전략적 요충지 해안 방어선에 성을 쌓고 수성하는 절제사를
첨절제사라 한다.]
이밖에 해당 지역인을 중심으로 하는 직업군인 집단인 방어사 [종 3품]병력이 있었다.
[중도 방어사, 전라도 방어사는 정 3품]- 평시에 군행정권에 대해 관찰사 지휘를 받고
전시에는 도순찰사의 지휘를 받음.
전시에는 도관찰사가 도순찰사를 겸임하기도 함.
군사 전략 물자관리, 군수지원 및 지방군을이끌고
수륙군을 지원하는 부사[정3품~종7품]병력이 있었다.
부사는 실력이 출충한 부사 중에서 전시에 관찰사의 전략 제1참모격인
조방장[군권 임시 부관찰사]이나 수군절도사의 제1참모인 조방장[임시 부 수군절도사]으로
임명되어 출전한다.
관찰사에게 힘이 지나치게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비변사에서 해마다 순찰사,
도순찰사를 파견하여 군영을 순찰하며 지휘 감독한다.
[상시 정규 순찰 1년, 수시 순찰, 특별 순찰제도가 있었다.
[큰 도시에는 정 3품 부사가 임명되고 중간급 [남원] 도시에는 종 3, 4품이 임명되며
소도시 군에는 종 4, 5품이 임명되었으며 요충지 현단위의 부사에는 종 7품이 맡기도 하였다.
- 군부사, 현부사. 군수 전략물자 관리]
북방 전방에는 순변사 [종 2품], 도순변사 [정 2품]를 보냈다.
p/s
시랑이라는 관직명은 돈황지구 하서회랑, 하서회랑과 하서시랑 사이의
실크로드 길 구간을 뜻하는 하서주랑[오르도스], 중원 물류 도착지인
하서시랑 [산서성 진성시 진평 2군]에서 나오는 관직명이다.
당나라 시기 실크로드 물류를 통제하는 경제적 요충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역과 동유럽에서 들어오는 하서시랑의 상업무역을 통제하는 책임자에게
시랑 [정 3품]직을 두고 관리하게 되면서 나오는 직책이었다.
장사라는 말은 실크로드 물류 제2의 도착지인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을 뜻하는 말이다.
시장에서 장사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탄생하였다.
[오르도스- 서역, 동유럽에서 들어오는 실크로드 물류가 중원으로 들어가 판매 대금과
교환 물품을 중원 산서성 진성시 하서시랑에서 교환하여 다시 돈황지구,
청해성 서령지구로 올려줬다는말.
돈황지구(서역 비단길/초승달 무역), 서령(청구-동유럽, 그리스 초원의 길/반달 무역)지구를
하서회랑이라고 한다.
서역인, 동유럽인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는데는 중간 길목마다 위험했기 때문에
중원으로 들어가 직접 판매하지 못하고 대리 판매해주는 중원인들에게 의탁해야 했기 때문에,
하서시랑에서 판매한 판매대금과 실크로드 교환물품을 돈황지구, 청해지구,
내몽고 서북부 파단 길림사막 시라/사라선맹 번외지구로 다시 올려주었다는 말이
오르도스(하서주랑)이다.
돈황지구에서 하서시랑까지의 실크로드 구간을 뜻하는 말이 하서주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