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뷰에 앞서: "시간여행"이란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 뒤로가기를 누른 뒤 일단 보고 올 것을 추천한다.
* 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모든 설명은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
또한, 이 영화가 아닌 다른 시간 여행 영화에 대해서는 스포일러를 잔뜩 해놓았다.
영화의 원제는 Predestination. 운명, 예정 이라는 뜻이다.
<타임 패러독스>라는 개노잼삘을 풍기는 제목 번역과 대놓고 스포하고 있는 포스터 때문에 스크린에서 놓쳐버리고, 지인의 추천으로 나중에서야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시간여행물의 끝판왕이다. 시간여행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봐야 한다.
시간여행. 지독히도 우려먹었지만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사용되는, 이제는 로맨스 영화까지도 흔하게 사용하는 소재이다.
수많은 클리셰(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스토리 또는 연출)를 낳았고 이미 다 우려내서 더 나올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이 나왔지만, 여전히 시간여행의 인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시간여행은 그 만큼 창의적인 플롯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과 재미를 갖춘 아주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시간여행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물리학적인 가능성과 그에 관련된 다양한 역설들을 찾아보곤 했다. 재밌는 것들이 많으니 관심이 있으면 시간역설을 구글에서 한 번 검색해보길 추천한다. 유명하고 간단한 예는 이런 것이 있다.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나를 죽인다면, 나는 타임머신을 탈 수 없게 되고 미래에서 온 나는 과거의 나를 죽일 수 없게 된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는 이런 모순을 만들어내기 쉽고, 모순에서 재미가 만들어진다.
헷갈릴 수 있으니 먼저 용어를 확실히 정의하고 가자. 모순(Irony)와 역설(Paradox)라는 용어이다.
모순(Irony)은 두 개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는 상태이다.
모순이란 단어의 어원인 중국의 고사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 보이며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선전했고, 또 자신의 방패를 들어 보이며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선전했다. 그러자 그모습을 본 명나라왕 신하중 한명이 상인에게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무기 상인의 말은 모순이 있다. 쉽게 말해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비슷하지만 다른 역설(Paradox)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알아보자. 역설은 많은 정의가 있지만, 나는 이렇게 정의내리겠다.
역설(Paradox)은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순이 없는 상태이다.
몬티홀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당신의 눈 앞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이 문 중 하나는 최고급 세단이 있지만 나머지 2개의 문 뒤에는 말똥 무더기만 있다. 당신이 문 하나를 고르자, 어디에 말똥이 있는지 알고 있는 사회자가 나머지 두 문 중 하나를 열어 그 안에 말똥이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자가 당신에게 선택을 바꿀 기회를 준다면, 당신은 선택을 바꿔야 하는가 바꾸지 말아야 하는가?"
정답은 "바꾸는 것이 유리하다."
문을 바꿨을 때 정답일 확률 = 처음에 오답을 골랐을 확률 = 2/3
문을 바꾸지 않았을 때 정답일 확률 = 처음에 정답을 골랐을 확률 = 1/3
이기 때문이다.
흔히 바꾸든 말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바꾸는 것이 더 유리한 이상한 상황.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순은 없다. 이런 상황을 역설(Paradox)이라고 한다.
(몬티홀 문제에 관심이 간다면 구글에 검색을 해보길 바란다. 조건부 확률이라는 개념을 쓰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순과 역설에 대한 정의를 이해했는가? 내가 이렇게 공들여 둘을 구분한 이유는
이 영화에는 역설만 있을 뿐 모순은 없기 때문이다.
앞서 내가 말했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는 모순이 생기기 쉽고, 이 모순에서 재미가 만들어진다고. 그런데 이 영화는 모순을 없애버렸다. 영화의 스토리는 분명히 복잡하게 꼬여있지만, 분명히 다 매끄럽게 연결 되며 어긋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먼저 수많은 영화에 해당하는 모순이 있는 경우를 살펴보자.
모순이 없으려면, 시간 여행으로 타임라인이 꼬여서 수정이 가해지더라도 타임라인 외부에 있는 우리는 어느 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영화에서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
많이 쓰는 설정 중 모순이 있는 경우를 살펴보자.
<루퍼>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예시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스포일러가 대량 포함돼 있으므로 이 두 영화를 안 봤다면 (스포주의)라는 글이 보이면 조심할 것을 추천한다.
1. 그냥 안 맞는 경우
어떤 시점에 일어난 일이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스포주의) <루퍼>에서 주인공이 미래의 자신을 쏴죽였지만, 미래의 주인공이 안 죽고 도망친다는 묘사가 있다. 모순이다.
2.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 실시간으로 미래에 반영되는 경우.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미래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난 이후의 시간이다. 과거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가 모두 적용된 것이 미래인데, 과거의 변화가 실시간으로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주의) <루퍼>에서 한 캐릭터가 과거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신체의 말단(손가락 등)이 절단되자 현재에 있는 캐릭터의 신체가 갑자기 사라진다. 과거에 고문을 해서 이미 죽었다면 현재에는 처음부터 그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난 일이 실시간으로 현재에 반영되는 것은 모순이다.
3. 시간여행을 했서 과거로 왔을 때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
물론 시간여행을 한 당사자야 기억이 있는 게 당연하지만 종종 시간여행을 하지 않은 다른 사람까지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스포주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주가 시간을 돌리면서 여주의 마지막 시간 여행 카운터가 복구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시간여행을 한 사람은 남주이기 때문에 여주에게는 그 전에 남주와 했던 대화의 기억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기억은 남아있는 채 시간여행 카운트만 복구되었으므로 이는 모순이다.
+ 추가로, 여주가 했던 시간여행은 기억만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다. 하지만 남주가 한 시간 여행은 몸(물리적인 실체)이 이동하는 시간여행으로 이 둘을 구분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것도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내 능력의 한계로 이 정도만 소개하겠다.
지금까지 모순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만 소개했다. 그럼 모순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몇 가지 장치를 이용해서 이런 모순을 해소시킬 수 있다.
한 가지는 평행 이론이라는 설정을 도입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너무 글이 길어지니까 빼자. 그리고 다행히도 이 영화에는 평행 이론이 필요 없다.
타임 패러독스는 치밀하게 스토리를 끼워맞춰서 모순이 없다.
시간 여행을 반복하면서 스토리가 꼬였지만, 분명히 우리는 어떤 시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스토리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사실 이런 장르에 익숙하다면 좀 뻔해보이는 면도 있지만, 이렇게 치열하게 노력해서 시간여행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순을 뺀 채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반전을 터뜨리는 점에서 이 영화를 시간여행물 끝판왕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첫댓글 뛰어난 지식을 기반으로한 멋진 글이었다. 귀관은 매우 흥미롭게 읽어보았다.
감사합니다 ㅎ
개인적으로 시간 소재물 중에선 나비효과 이후 최고..
제가 나비효과를 안 봤네요. 봐야하려나...
사실 이거원작때문에 기대하다가 바로봤는데 반전은 없었지만 시간여행영화중에선 역대급으로 잘짜여있어서 좋았죠, 위에언급한대로 나비효과도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매끄러운느낌도보다는 충격적이고 강렬한느낌이에요
시간여행으로는 어바웃타임이나 시간여행자의아내도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