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이 없다. 코로나 전인것은 확실한데 몇년이 지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연도는 잘 모르겠지만 6월 말쯤이었던것 같다. "여기 경로당인데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 별안간 전화에 깜짝 놀라 츄리닝 상태로 경로당을 찾았다. 어머니는 우리집 근처에 방 하나를 얻어 기거하고 계셨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살았던 어머니의 생활터전도 같은 동네 였다. 어머니는 나와 같이 살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 아파트 경로당을 꾸준하게 다니시고 계셨다. 경로당에서 총무 역활도 맡으셨다. 그래서 총무할머니로 알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근처에 살고 계시니 불편한 점도 많았다. 어머니는 형광등이 나가도 문고리가 고장나도 어디가 아파도 전화를 했다. 나는 그때마다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어쩔수 없이 형광등도 달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도 다녔다. 어머니는 위가 좋지 않아 저녁은 잘 드시지 않았다. 건강하지 않으면 자식에게 구박을 더 받을것으로 생각해선지 몸을 잘 챙기시려 노력했다. 점심에는 항상 동네를 걸어다니셨다. 경로당에서도 총무일을 보시며 활기차게 생활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쓰러지시다니. 경로당 앞에 나가보니 119 구급차가 와 있었다. 내 신원을 확인한 후 같이 119를 타고 병원을 향했다. 처음 차에 올랐을 때는 정신이 약간 있어 말을 알아듣고 대답도 하셨다. "점심에 뭘 드셨어요" "경로당에서 떡국을 조금 먹었어" 그리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으셨다. 119대원이 말했다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할머니 할머니 내 말 들리세요" 우리는 목동 이대병원 응급실로 어머니를 데려갔다. 응급실에 어머니가 들어가고 조금 있어 의사가 나와 "상태가 많이 안좋습니다. 지금 수술을 해야 해요, 뇌신경이 터져 수술이 늦어지면 큰일 납니다. 뇌신경이 터졌을 경우 5단계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4단계 정도로 위험하십니다. 수술을 해도 잘되면 반신불수, 잘못되면 식물인간입니다. 빨리 결정해주세요" 나는 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이 오자 나는 의사가 말한대로 전달했다. 자식된 입장에서 수술 경과를 걱정하고 수술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어머니는 수술에 들어 갔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나오질 못했다. 2주 쯤 지나 자신들 병원에선 더 이상 치료가 안되니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형님 거주 인근에 요양병원 비슷한 곳이 있어 그곳으로 어머니를 옮겼다. 그 병원 중환자실엔 여러 중증 환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에 한번씩 어머니를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기도에 호수를 끼워 음식물을 주입했고, 코에 호스를 끼워 숨쉬는것을 조절했다. 오랜시간 침대에 누워있어 엉덩이가 헐어갔다. 옆 침대엔 젊은 여성이 드러누워 있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병원에 온 후 벌써 10년 째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를 방문해서 얼굴을 드려다 보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듯 했다. 그러나 목에 가래가 끼어 가래를 기계로 흡수하면 괴로운 듯 눈을 찡긋거리고 입술도 조금 움직이는것 같았다. 말 그대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버렸다. 병원이 형님 집에 가까이 있어 형수가 하루에 두차례 어머니를 방문했다. 형수는 어머니를 방문하면 얼굴도 닦아주고, 손발도 닦아주었다. 그리고 "우리아기 잘 지냈어요, 아이고 예쁘다" 하며 얼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잘 한것이 없지만 어머니와 형수 사이를 생각하면 모든것이 가식처럼 보였다. 2~3개월을 병상에 있어도 변하는것이 없었다.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하는지 기약이 없었다. 나는 병원을 찾을 때마다 속으로 "어머니를 위해서나 우리를 위해서나 빨리 돌아가셔요" 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나쁜 놈이다. 나 혼자만 아는 이기적인 놈이다. 살아 생전 어머니에게 잘 해준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병상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보고 빨리 돌아가시라고 기도를 했다. 이 불효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병원에 입원하신지 4개월정도 지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병원 확장을 위해 병상을 옯겼는데 어머니가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것 같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찹찹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어떤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지 못했다. 어머니는 벽제 화장장에서 화장을 했다. 화장장 옆엔 산골터가 있었다. 우리는 납골당에 모신다는것을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화장후 어머니의 납골함을 들고 산골터로 향했다. 보자기에 싸인 유골함은 아직까지 따둣했다. 나는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후 돌아가실 때 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전 부터 성당을 다니셨는데 성당사람들이 성가를 부르며 앞장섰다. 나는 성가를 부르는 사람들 뒤를 따르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어머니,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나는 산골터가 떠나가듯이, 목청을 다해서 울었다. 미친놈처럼 울부짖었다. 돌아가시고 나서 미친듯이 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아 생전 따듯한 말 한마디, 따듯한 미소 한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내가 어머니의 주검앞에 목놓아 운다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한동안 슬픔속에 살았다. 집사람의 꼴보기 싫었다. 집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우고 싶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집을 나와 술을 퍼마시고 다녔다. 밤 늦게까지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 거실 쇼파에 들어 누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나는 나의 죄를 씻을 수 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번도 꿈에 나타나질 않는다. 화장을 하면 살아생전 연이 완전히 끊어 진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명절이 되거나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날 때 찾아갈 곳이 없다. 나는 머리속으로 살아생전 어머니를 그려볼 뿐이다. 어렵게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다 눈을 뜬다.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어머니 옷자락을 붙잡고 "어머니 저를 용서 하지 마세요" 하며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베갯잇이 눈물에 젖어있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내 자식을 건사한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다. 내 비뚤어진 마음이 어머니를 내팽개쳤다. 지금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눈시울이 뜨겁다. 어쩌면 이 글로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지 모르겠다. 정말 나는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나쁜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