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6
무정자증인 남성 A씨는 지난 1985년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A씨는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내의 동의를 얻어 제3자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1993년 인공시술로 첫째를 낳았습니다. 4년 뒤인 1997년에는 둘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A씨는 자신의 무정자증이 치유돼 둘째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A씨는 두 자녀가 자신의 친자식이라며 출생신고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났을 때 둘째가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때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내가 다른 남성과의 혼외관계로 둘째 아이를 가졌던 것이죠. A씨 부부의 불화는 이때부터 시작된 걸로 보입니다.
부인과의 다툼이 잦아지면서 A씨는 2013년 협의이혼을 신청했습니다. 양육비 지급을 놓고 갈등이 커지자 A씨는 두 자녀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적으로 친자식 관계가 계속 이어지면 양육비도 줘야 하고 유산도 상속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탓이 컸겠죠.두 자녀도 자신의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때 알았습니다.
A씨가 제기한 소송은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입니다. 친생자라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에 이를 재판부가 확인해달라는 것입니다.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 외에 친생자 관계를 거부할 수 있는 ‘친생부인의 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친생부인의 소는 친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날부터 2년 이내로 제소기한을 두고 있어 A씨는 불가피하게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을 택했습니다. 두 자녀 모두에게 A씨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A씨의 주장은 언뜻 타당해보입니다.
법원의 판단은 A씨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1심은 A씨가 제기한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혼 생활 중에 태어난 자식은 친생자로 추정해야 한다는 민법을 적용했습니다. 2심은 타인의 정자로 낳은 첫째는 친생자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A씨의 주장을 기각하는 형태로 일단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다만 부인의 혼외관계로 낳은 둘째는 친생자 추정의 예외로 볼 가능성은 일부 있지만 1심과 마찬가지로 소송 요건이 안 된다고 봤습니다. 결과적으로 1심과 2심 A씨의 두 자녀가 친자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종종 있는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A씨가 법원의 판단을 승복할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최근 대법원이 전향적인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A씨의 주장을 들어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됐기 때문이죠.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공개변론까지 열어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법무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한국민사법학회, 한국가족법학회, 한국가족관계학회, 한국헌법학회 등으로부터 참고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쟁점이 되는 법률은 1958년 제정된 민법 제844조와 제847조입니다. 이에 따르면 아내가 혼인 중 임신한 자녀는 원칙적으로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합니다. 추정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설령 생물학적으로 남편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법적으로는 친자식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조항이 없으면 혼인 중 여성이 낳은 아이가 남편의 자녀임을 일일이 증명해야 하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녀 역시 생물학적 아버지는 누군지 알지 못하고 법적인 아버지도 존재하지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이죠.
혼인기간 중 낳았어도 친생자로 추정할 수 없는 판례는 한참 뒤에 등장했습니다. 1983년 대법원은 친생자로 추정할 수 없는 예외로 ‘부부가 동거하지 않는 등 임신할 수 없는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혼생활 중 낳은 아이는 여전히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됩니다. 아내는 아이를 직접 낳았기에 당연히 친생자 관계가 성립합니다.
관심을 모았던 대법원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하급심과 같았지만 새로운 판례가 더해졌습니다. 우선 타인의 정자로 낳은 첫째는 남편 A씨가 동의했기에 친생자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A씨는 “아내가 다른 사람 정자를 제공받는 것에 묵인은 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다”고 줄곧 주장해왔습니다. 대법원은 A씨가 동의했기에 아내가 임신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한 것이고 이를 번복하면 소송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부인이 혼외관계로 낳은 둘째는 이미 A씨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지가 한참 지났기 때문에 소송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친생자로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민법은 혈연관계를 기준으로 적용 여부를 달리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A씨가 둘째를 친자식으로 인정하기 싫었다면 그 사실을 안 지 2년 안에 소송을 제기했어야 한다는 의미지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비록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의 중요성을 법적으로 보장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친자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단순한 혈연관계로만 가족을 규정하면 가정의 평화를 담보할 수 없고 예상 밖의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을 보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가족이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행복을 만끽합니다. 비록 표현은 딱딱했지만 대법원의 이번 선고도 그랬습니다.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확인됐다는 사정만으로 친생 추정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자녀의 법적 지위를 안정시키는 친생 추정 규정 본래의 입법 취지에 반한다. 혈연관계 유무를 기준으로 친생자 관계를 정하면 친자 관련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 친자 감정을 하거나 부부의 내밀한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 자녀의 복리를 책임지는 부모에게 이들 자녀와의 신분관계를 귀속시켜 부모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지성 기자 engine@sedaily.com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