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목하는 한 편의 시조
천년전 사랑의 가교(架橋), 그 미적 세계 / 최도선
그림자 나를 따라 해시계를 도는 사이
남천의 물결 위로 한세상 흘러간다
전생의 약속이었나, 꿈꾸듯이 오시던
풍덩 빠진 그 사랑에 나도 그만 첨벙했네
팽팽한 현을 골라 아들 하나 낳고 싶던
월정교* 난간대 위로 달이 뜨는 저 소리
손가락 끝 보지마라, 달을 보라 이르시던
시간을 질러가도 가는 길 아득하여
휘영청 월성을 돌아 천년토록 걷는다
- 김덕남, 「월정교를 걷다」, 《시와문화》, 2020 가을호.
경주 월정교를 검색하니 월정교 야경 사진들이 황홀하여 그 아름다움에 입이 딱 벌어졌다. 강물에 비친 월정교, 강 위 월정교의 모습이 환상적이 다. 주황 불빛의 석축들, 다리 난간, 오색찬란한 단청, 누각의 날렵하면서 도 부드러운 팔작지붕의 곡선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건축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다리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궁전인 경주 월성과 그 남쪽 남천 건너편의 남산 쪽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월정교 아래 강바닥에 누워 있던 불탄 기와와 목재 부재가 1986년 발굴됨에 따라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을 하였다(2018년11월 완공).
그러나 통일 신라의 건축양식에 따라 축조되었을 뿐 전체적 디자인은 창작된 부분이 많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천 년의 역사를 되짚어 새롭게 다리가 놓여 문화재가 살아 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다리는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이 월정교는 궁궐 과 일반 백성과의 소통 관계, 경주 남산으로 이어지는 불교와의 관계(신라 왕궁인 월성과 남산을 잇는)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끈 등 여러 의미를 지 닌다. 월정교에는 전해오는 설화가 있는데 그것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초월적 사랑의 이야기다.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는 화랑 김흠운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김흠운이 양산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과부가 되자 요석궁에 들어 와 살고 있었다. 그 무렵 원효는 요석공주를 본 뒤 반하여 노래를 지어 거리에 퍼뜨린다.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몰부가沒斧歌」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려나 /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려네誰許沒柯 我斫支天柱' 이 노래를 들은 태종은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얻고자 하는 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일이 어디 있을까하여 궁리를 시켜 원효를 데려오게 한다. 원효는 이를 미리알고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 궁리를 만나게 되자 월정교 아래 물에 빠져 젖은 몸으로 요석공주에게로 가 쉬게 된다. 그 후에 과연 공주는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이다.
이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나온 작품이 김덕남의「월정교를 걷다」이다. 세월은 흘러도 역사의 흔적은 남아 후대인들 마음속에 스님의 사랑이야기가 잔잔히 새겨져 있다. 김덕남 시인도 그런 사랑 하나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월정교를 걷는다. 감성적 마음에 이끌려. / 풍덩 빠진 그 사랑에 나도 그 만 첨벙했네 / 스님으로선 여인을 품을 수 없건만 품어낸 행각. 모든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깨고 나와 하늘을 떠받칠 아들 하나 낳고 싶던 원효. 일체 유심조, 무애無碍 사상을 실천한 그 정신을 닮고 싶은 거다. 그러나 견지망월(見指忘月)'손가락 끝 보지마라, 달을 보라 이르시던’하 며 툭 치고 나온다. 스님이 본질을 외면한 채 잠시 사랑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 마음에서 시인은 이성적 사리事理에 접어든다. 사실 그것은 승화된 대각을 이룬 구도자의 뜻을 뒤집어 말함이다. 견성에 닿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니 천년토록이라도 걷고자하는 시인의 마음. 잘 빚은 작품이 탄생 되었다.
김덕남 시인은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올해로 3권의 시조집을 출간했다. 현실의 유기적 뼈대가 있는 시 정신을 고양해가는 김덕 남 시인의 작품 한 편을 더 소개한다.
모시적삼 쪽찐 머리
물동이 이고 온다
찰랑찰랑 넘친 물을
한 손으로 흩뿌리며
똬리 끈
살짝 문 당신
앞섶 자락 젖는다
-「쪽동백」 전문, 시집 '거울 속 남자」
이 작품의 제목 쪽동백이 지니고 있는 속성과 작품 내용과는 어떤 큰 연계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 쪽동백의 하얀 꽃과 고운 향기가 ‘모시적삼 쪽찐 머리'로 연상되어 물동이 이고 오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60~70년대 농촌의 박우물에서 물 길어오는 아낙네의 정경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적이 멋인가!(그 당시 여인들은 고생이었지만)이 작품을 보는 순간 이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은 아련한 그리움에 젖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의 뒤쪽에 무엇이 있을까, 본래적인 어떤 뜻이 있을까 하여 그것을 찾으려 한다. 일상의 소통을 넘어서는 심미적인 아름다움으로만 만나주면 안될까.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시적 아름다움을 충분히 살렸다. 시를 쓴다는 것은 전래된 전통 속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찾는 일.
김덕남 시인의 미적 세계다.
최도선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3년 《현대시학) 소시집 발표 후 자유시 활동. 시집 『그 남자의 손, '서른아홉 나연 씨」, 비평집 「숨김과 관능의 미학 있음. 시와문화 작품상
- 《시와문화》 2020.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