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 시달린 가족
어머니는 배꿈 꾸면 짐 쌌다…‘빨갱이 아버지’가 새긴 원죄
1950년 9월 홀로 월북한 아버지
내 문학과 젊은 시절을 이야기를 하며 연좌제를 빼놓을 수 없다. 1950년 9월 아버지의 월북이 가족들에게 강요한 생존 환경은 끔찍하고 고달픈 것이었다. 연좌제는 아버지의 공산주의 부역을 고스란히 가족들의 원죄로 뒤바꿔놓았다.
젊은 어머니와 아이들은 끊임없이 경찰의 소재파악에 시달려야 했다. 30대 중반에 월북한 아버지가 언제든지 간첩으로 남파돼 접촉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6·25라는 피투성이 내전을 겪으며 피해의식을 키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별난 생존원칙을 고집했다. 전쟁이 다시 터졌을 때 개전 직후에 체포되지 않도록 항상 경찰의 소재파악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운나쁘게 체포되더라도 반드시 도회지에서 체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역자학살이 대개 개전 직후 신속하게 이뤄졌고 대도시에서는 법적 절차가 살아 있어 마구잡이 학살이 자행되지는 않았다는 전쟁 체험에 따른 것이었다.
경찰이 찾아오면 우리는 떠났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야반도주나 다름없는 이사를 당연한 것처럼 다녔다. 덕분에 어린 나는 영문 모르고 매 맞는 아이, 일찌감치 뿌리 뽑힌 신세였다.
어머니 꿈엔 신통력 형사들 들이닥쳐
어머니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꿈이나 이빨이 뭉텅 빠지는 꿈을 꾸면 그날로 이사를 서둘렀다. 한가지 일에 집착하면 신통력이라도 생기는 것인지 결국 꿈이 들어맞는 경우가 적지 않아, 며칠 안으로 낯선 중년 남성들이 들이닥쳐 이것저것 캐묻곤 했다. 지나고 보면, 경찰서 대공 담당형사들이었다. 형사의 불길한 방문을 받으면 이사는 대개 한 달을 넘기지 않고 감행됐다. 어머니는 언제든지 이사를 떠날 수 있도록 살림을 항상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버들고리짝 하나와 이불 보퉁이, 부엌살림을 담는 사과 궤짝, 나와 여동생의 책 보따리가 살림의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세 들어 살던 집주인에게 아무 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은밀하게 단 칸방을 빠져나와야간열차에 오르는 식이었다. 그런 잠행이 62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될 때까지 반복됐다.
57년 경북 안동에서 서울 안암동으로 이사한 것도 그런 잠행의 하나였다. 안동의 중앙국민학교에서 2학년까지 마친 나는 안암동의 종암국민학교 3학년으로 전학했다. 어머니가 안암동을 선택한 건 고향 영양 출신의 한 독지가가 세운 일종의 기숙사가 거기 있어서였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5개씩, 10개의 방을 갖춘 건물에 영양 출신 학생들 낼 수 있었다. 하숙집보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머물게 해줬다. 성인 한 사람이 보통 한 달에 쌀 서 말을 먹는데, 그 두 배인 여섯 말을 내면 먹여주고 재워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생도 있었고 고대생은 물 론 단국대·동국대생도 있었다. 어머니는 학생들에게 빨래 같은 건 해주지 않았지만, 밥을 해주는 사실상 식모였다.
80년 연좌제 폐지, 전두환 좋아질 정도
안암동 시절 역시 형사의 방문으로 끝난다. 불쑥 나타난 신사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나를 풀빵집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풀빵이 수북이 쌓인 접시를 앞에 두고 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문득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싹했던 기억이 난다.
오래도록 아버지는 내 기억에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월북했을 때 나는 생후 2년 3개월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사진 한 장 변변히 남아 있는 게 없었다.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그나마 몇장 안 되는 아버지 사진을 모조리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빛바랜 사진으로나마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본 건 한참 뒤인 서른 살무렵이었다.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도 나는 아버지 친구분이 보관하고 있던 낡은 사진속에서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렵던 시기에도 고향 영양에는 우리 가족이 의지해 살아갈 만한 넉넉한 전답이 있었다. 하지만 제값 받고 팔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다른 방도가 모두 끊기면 전답을 팔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그런데 고향 땅에 눌러앉아 무작정 땅이 팔리기를 기다리거나 일부라도 팔리는 날엔 그동안 생긴 빚을 갚거나 하며 1년가량 돌아 오지 않기도 했다.
외가 쪽은 흥청거리는 기질이 있었다. 웬만큼 돈을 손에 쥐면 그때부터 온 가족의 씀씀이가 커졌다. 탕수육을 사 먹거나 형과 누나가 양복이나 시계를 장만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두어달 지나면 또다시 빈손이었다.
내가 연좌제의 폐해를 뚜렷하게 인식한 것은 대학 진학 후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다. 어느 날 가르치던 아이들의 어머니가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학교에서 데모하다 퇴학당한 적이 있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다. 낮에 경찰이 찾아와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더라는 것이었다. 쫓기듯 가정교사 자리를 옮겨봤지만 한 달 후쯤 경찰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느새 나는 큰 형님이나 작은형님처럼 경찰의 정기 동향보고대상이 돼 있었다.
군 제대 후 대구의 고시학원에서 강사로 일할 때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연강을 마치고 강사실로 돌아갔더니 뭔가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역시 경찰이 다녀간 것이다. 나 없는 사이 그런 일이 벌어지면 깊게 사귀면 안될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심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78년 대구 매일신문 기자가 되자 내가 서두른 일 중 하나는 관할 경찰서에 수소문해 나를 담당하는 형사를 찾아낸 다음 내가 먼저 연락해 만난 일이었다.
사대 국문과로 대학 전공이 좁혀진 것도 연좌제로 인해 다른 길이 막혀 있어서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사시에 도전하겠노라고 했지만 막상 통과한다 하더라도 판·검사 임용은 불투명했다. 80년 10월 5공화국 헌법에 연좌제 금지 조항이 명문화돼 공포됐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 감정적으로 좋아질 정도였다.
그 많던 재산을 이데올로기에 붙들린 아버지가 모두 날려버려 고생한다고 하면 처음에는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감정은 이십 대 중반 '오이디푸 콤플러스(부성 살해충동)'라는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은 곧 아버지에 대한 서늘한 회한에 길을 내줬다. 나는 내가 부정하고 짓밟았던 아버지의 흔적을 돌아보게 됐다. 10대 후반에 시작돼 30대 들어서 끝난 내 사상 편력은 아버지 살해와 아버지 찾기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 흔적이었다.
사회주의 서적 보관하다 대구고검 압송
일본에서 출간된 소화(昭和)판 사회주의 사상신서 네댓권을 갖고 있다가 문제가 됐던 것도 사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부산에서 낭인처럼 지내던 10대 후반, 어머니의 사촌 친척집에서 그 책들을 발견하고는 나중에 읽을 생각으로 집에 가져와 보관했다. 폴란드 출신 혁명가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이 신서 1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아대를 다니던 둘째 형님이 동생이 금서를 가지고 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한 게 탈이 났다. 일본으로 밀항하다 붙들린 형님 친구들 입을 통해 내게 불똥이 뛰었다. 나는 부산에서 붙들렸지만 부산지방검찰청을 관할하던 대구의 고등검찰청까지 압송됐다.
내 혐의는 월북해 아버지를 만나고 6개월간 밀봉 교육을 받은 다음 그 책들을 가지고 내려와 사람들을 월북시키려 했다는 것으로 부풀려져 있었다. 그 6개월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대야했는데 내가 다녔던 술집이나 친구 집에서 그런 증명이 가능할 리 없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 참작돼 결국 처벌을 면했지만 며칠 고생해야했다.
대구 학원 강사 시절에는 국내 2세대 아나키스트 하기락(1912~97) 선생과 교류한 적이 있다. 당시 선생은 칠순이 가까웠는데도 내가 아나키즘에 관심 있어 하자 나를 젊은 동지라고 부르며 반가워했다. 선생을 통해 접한 아나키즘은, 일제가 악의적으로 번역해 잘못 알려진 무정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국가주의적 억압이나 자본주의적 착취, 생존경쟁에 따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치사상이었다. 오히려 지방자치 와 분권화를 지향했다. 선생은 아나키스트를 자주인(自主人)이라고 불렀는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돼 자유로운 인간생활을 해나가자는 뜻이었다.
선생이 읽기를 권한 러시아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에는 가슴 저릿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순정하고 정직한 이념의 아름다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신뢰와 애정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젊은 나는 그것이 이념일망정 아름다운 것이면 허무주의에도 반하고 아나키즘에도 반하곤 했다. 물론 그 이념을 실천에 옮겨 운동이 되면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 이문열, 시대를 쓰다(11) 중앙일보 2024년 7월 4일 목요일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