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회를 설립하면서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고린도후서 12장 14~15절)
해방이 되어 농사를 지으면서 산에 가서 땔감을 할 때 일이다. 나는 집에서 6km나 떨어져 있는 칠장사(七長寺)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오곤 했다. 워낙 거리가 멀기 때문에 나무를 지고 오면서 10여 번을 쉬어야 집에 도착했다. 때는 여름, 비가 금세 올 것 같은 날씨라 나는 부지런히 나무를 해 가지고 오다가 어느 곳에 쉬게 되었다. 땀을 닦고 앉아 있노라니 땅바닥에 개미들이 떼를 지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장마가 져서 집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을 예상하여 미리 먹이와 알들을 안전한 새 집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 들여다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이 미물도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저렇게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을 하는데 인간은 이 땅에 와서 고작 먹고 살기에만 급급하니 이 땅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생각하였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기를 쓴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땔감)를 때지 않고 밥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태양열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큰 렌즈를 이용하여 밥짓는 방법을 연구하면 나의 업적이 영원히 남을 것이며 이 땅에 태어난 보람을 얻을 것이다. 이것을 일생 동안 연구하여 영원히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일을 하리라.’ 한낱 공상으로 끝났지만 그날의 생각은 두고두고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 후 예수님을 만나면서 나의 생각이 100% 변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를 믿으니 자신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나도 출세할 수 있다’, ‘공부를 하자’, ‘봉사를 하자’, ‘이웃을 돕자’ 등등 꿈이 많아졌다. 나에게 알맞은 의미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과 노력을 기울였다. 청신회 활동을 하며 개척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돈을 벌면 내 단독으로 개척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 바치기로 여러 번 마음으로 다짐을 하고 기도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개척교회가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야 개척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1980년대 어느 날 예배에 참석했다가 학교를 세워 성공한 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恨)을 풀고 후세들에게는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중고등학교를 물색하여 알아보았다. 우리 교회 김주봉 장로님이 소개한 경기도 부천의 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학교에 대한 설명과 학사 운영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초기 자본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 이후에도 여러 중고등학교와 전문 전산학교를 두루 검토하였으나 모두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운영해서는 운영수지를 맞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자금을 100% 투자하여 인수하고 운영비까지 검토한 것이 문제였다. 다른 분들이 학교재단을 은행융자금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관례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아들 내외가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을 하게 되어 보스턴에 갔을 때다. 아들 내외와 함께 교육의 도시 보스턴 시내를 다니는데 아들이 대학 같아 보이지 않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이 건물이 무슨 대학, 저 건물이 무슨 대학하며 구경을 시켜 주었다. 나는 대학이란 우리나라와 같이 큰 캠퍼스를 짓고 한군데 모여 있는 줄만 알았기 때문에 느끼는 바가 컸다. 그래서 나도 대학을 세우는 연구를 해보리라 생각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생각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나는 특수학과 한 과목만 가르치는 대학을 세워 세계의 제일 가는 한 과목 단과대학을 세우는 것을 계획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한 과목 대학은 문교부에서 인가도 안 해주고 국민들이나 학생들이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학교의 꿈은 완전히 접었다.
나이 70을 바라보던 때 일이다. 그동안 하나님께 약속하고 기도했던 일을 실천에 옮겨야 할 시점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 노인인구가 증가하고 그들을 위한 사회복지가 점점 필요하다는 뉴스를 접하고 노인복지를 위한 시설을 생각해 보았다. 우선 준비작업으로 나의 생질이 근무하는 은평구청 가정복지과를 방문하였다. 나는 사회 환원 차원에서 노인복지재단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생질은 내 말을 다 듣고는 뜻은 좋으나 지금 구청에 등록된 많은 복지재단이 목적과는 달리 이권사업화 되고 있다며 선의와는 달리 이권사업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돌아섰다.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나의 뜻을 제대로 펼칠 사업이 없을까 하며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장학재단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고 전금년 권사님이 출연하여 운영되고 있는 장학재단이 하나 있다. 고인의 뜻대로 수입의 전부를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나는 기도 중에 장학재단이 나의 역량에 맞고 나의 뜻을 잘 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고 가족회의를 열었다. 감사하게도 가족 모두의 찬성으로 장학재단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2003년 5월에 재단법인 죽헌장학회를 발족시켰다.
장학회 설립까지 많은 고민과 기도를 했다. 막상 재단을 설립하려고 하는데 자녀들이 반대하지는 않을지, 친인척 가운데도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남을 돕는 게 옳은 것인지, 장로로서 교회에 신앙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사회가 나의 참 뜻을 인정할 것인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결정을 하고 보니 마음이 편해지며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이 땅에 공수(空手)로 와서 공수로 간다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는 많은 업적을 내고 올바른 일을 하라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장학회는 설립한 지 벌써 10년이 지나 그동안 어려운 환경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적으나마 도움을 주었다. 내게 작은 흔적이나마 남길 수 있도록 힘써 주신 주위의 분들과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의 뜻을 이해해 준 가족과 친척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한다.
죽헌장학회 현황
죽헌장학회를 2003년에 설립하고 어언 10년이 흘렀다. 그간 죽헌장학회는 연인원 137명 장학금 총 2억 3천만 원을 지급하였으며 자본금 3억으로 시작하여 현재 10억에 이르렀다. 죽헌장학회는 자본금이 모두 현금이기 때문에 이자가 비교적 높은 저축은행에 5,000만 원 이내로 쪼개어 수익을 창출하고 있으며 이자로 들어오는 금액을 모두 장학금으로 지급한다. 그러다 보니 원금은 그대로 있으나 실질적인 자본이 줄어드는 결과가 되어 매년 1억 원씩 사재를 투입하여 증자를 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얼마를 증자할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재단 운영에 고민을 하고 있다. 실질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부동산으로 옮기기에는 자본금이 너무 적고 금리는 매년 떨어지고 물가 상승률은 높고 지속적인 재단 운영에 비상이 걸렸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증자가 가능하지만 그 이후가 걱정이 된다.
또 하나 염려가 되는 것은 그간 우리나라가 발전하여 정치권에서는 반값 등록금, 전액 국가 지원 등 전망이 좋아진다. 과연 장학재단이 앞으로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다른 재단처럼 여유가 있는 기업이나 개인이 투자하여 세운 것이 아니고 신앙적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또 나에게 준 축복을 다소나마 사회에 보답하려고 무리하여 세운 재단이기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재단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인재 양성과 사회 공헌인데 국가가 발전하고 사회가 부유해지니 장학재단 존립 자체가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직업전선에서 가장의 역할을 하느라 공부할 기회를 잃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고 평생 동안 안타까움으로 살았기에 다음 세대에게는 나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운 재단이다. 그러나 모든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죽헌장학회가 성장하여 설립 동기에 어긋나지 않는 글로벌 시대의 장학재단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