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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일 평화철도 정책위원장
▲ 류동열 자신과 일가 피붙이들은 딛고 선 자리와 첫 걸음을 달랐을망정 종국에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라는 겨레의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가고 넘어왔다. 사진 왼쪽부터 사돈 최동오, 사위 최덕신, 외손자 최인국. 류동열의 딸 류미영(아래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한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들을 보라”는 말이 있다. 류동열의 경우 ‘친구’를 ‘가족’으로 바꿔도 의미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류동열의 집안사람들은 구한말의 혼돈과 망국의 한, 해방과 분단, 대결과 전쟁 그리고 냉전의 심연을 헤쳐 온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며, 분단의 빗장을 풀고 남북이 하나 되기 위한 소중한 발판을 마련해온 가족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류동열과 함께 남과 북을 오고 간 혈육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한 사람을 알려면 그 가족을 보라”
사돈 최동오.
독실한 천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직접 지도를 받은 최동오는 3·1 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다. 일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중국 상해로 망명해 천도교인들을 결속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최동오는 이때부터 독립군 맹장이자 같은 천도교인이었던 류동열과 함께 일했다.
동북지방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최동오는 1925년 정의부 산하 ‘화성의숙’을 건립하고 숙장을 맡았다. 이때 훗날 김일성으로 불리는 김성주가 화성의숙에 입학하면서 스승과 제자로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최동오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함께 민족주의 좌파로 불렸으며, 무장독립투쟁을 적극 주창했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젊은이들 속에서 불고 있던 새로운 사조에도 비교적 너그러운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김형직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그의 동지들은 김성주를 아버지의 대를 잇는 독립군 기둥으로 키우기 위해 최동오가 숙장으로 있던 화성의숙으로 보냈다. 그러나 학생 김성주는 낡고 고루한 민족주의 교육에 회의를 느꼈고,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독립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길림 육문중학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해방 후 남쪽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최동오는 한국전쟁 때 류동열과 함께 북으로 가 재북평화통일촉진회 간부로 활동하다 1963년 사망했다. 최동오는 사망 후 류동열과 함께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으며, 남쪽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았다.
사위 최덕신.
최덕신은 1936년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복무하며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육군사관학교 특별반을 거쳐 미국 포트베닝보병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는 8사단과 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했으며, 지리산토벌군으로 거창양민학살사건에 관여해 유족들과 민중에게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5·16 쿠데타 후에는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1963년 주서독대사를 역임했고, 1967년부터 7대 천도교 교령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이처럼 군 출신으로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승승장구하던 최덕신이 북으로 가게 된 데에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의 극악무도함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미국과 일본·유럽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 나라에서 정치인·지성인·종교인·예술인·학자들이 김대중 석방투쟁을 했고, 박정희 독재를 비판했다. 이때 한국의 군 출신 인사들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합류했다. 최덕신과 최홍희 전 논산훈련소장(국제태권도연맹 총재, 2002년 애국열사릉에 안장), 6군단장을 지낸 김웅수 가톨릭대 교수, 최석남 전 육군 통신감,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용운 제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최덕신은 정권에 비판적이던 단체를 후원했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박정희와 불화를 겪던 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천도교계에서 실권을 박탈당하고 미국·서독·일본 등지를 전전하다가 1986년 9월 북으로 영구 귀국했다. 최덕신이 영구 귀국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아버지 최동오에 대한 북의 예우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북으로 간 최덕신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국통일운동에 헌신했다. 1989년 사망한 그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최동오와 함께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북에서는 그를 모델로 <민족과 운명>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딸 류미영.
류동열이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만주에서 태어난 류미영은 17세에 최덕신과 결혼했다. 1976년 최덕신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함께 미국으로, 1986년에는 함께 북으로 갔다. 1989년 최덕신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지도위원회 고문을 맡았고, 2016년 11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1995년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6·15 공동선언 직후인 2000년 8월15일부터 3일간 북측 이산가족방문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했다. 아버지·시아버지·남편과 함께 나란히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외손자 최인국.
2019년 7월7일 북측 웹사이트 ‘우리 민족끼리’는 “류미영 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아들 최인국 선생이 공화국에 영주하기 위해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최덕신과 류미영에 이어 그도 부모가 먼저 간 길을 선택한 것이다. 최인국은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한 6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는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이렇게 다섯 분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며 “저는 우리 가문이 대대로 안겨 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곧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켜 드리는 길이고 그것이 자식으로서 마땅한 도리이기에 늦게나마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부모님의 간곡한 유지대로 조국통일 위업 실현에 저의 여생을 다 바치려고 한다”고 방북 목적을 알렸다. 이로써 3대에 걸친 분단 장벽 넘기가 이뤄지게 된다. 최인국은 현재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의 최대 과제는 무엇인가
류동열과 그 가족의 선택과 행적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월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 황석영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고구려·백제·신라가 공존하며 서로 다투던 시기를 우리는 뭐라고 부릅니까? 삼국시대죠? 그럼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는 우리 시대를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은 뭐라고 부를까요? 분단시대 아닙니까? 분단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이뤄야 할 시대적 과제는 뭡니까? 당연히 통일이죠!”
우리 시대에 비난과 핍박은 통일을 염원하며 분단을 장벽을 넘어간 사람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문익환·정경모·임수경이 그러했던 것처럼. 뒤집어 말하면 분단의 장벽을 넘어선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옳게 자리매김될 때가 곧 통일시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북을 방문한 사람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 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이 그 하나요, 만수대의사당 앞에 자리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동상이 있는 만수대언덕이 그 둘이요, 북이 추앙하는 항일혁명열사들을 안장한 대성산 혁명열사릉과 사회주의 건설과 통일에 기여한 인사들의 유해를 안장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이 그 세 번째다.
남쪽에서 간 사람들에게는 모두 접근이 ‘절대’ 금지된 구역이다. 북의 최고위급 대표단이 남의 현충원을 찾아 머리 숙여 참배한 마당에 우리만 빗장을 걸어 두고 처벌까지 강행하는 것이 ‘4·27 시대’에 걸맞은 온당한 처사일까?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미 체제 경쟁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판에 무엇이 그리 두렵고 위험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용일 평화철도 정책위원장
남북이 공히 애국자로, 열사로 추앙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분단을 넘어 평화와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는 튼실한 동아줄이다. 안중근의 집안이 그렇고, 류동열의 가족이 그러하다. 남에서 올라간 대표단이 애국열사릉에 헌화하고, 북에서 내려온 사절단이 현충원에 참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때, 그때서야 “드디어 통일시대가 시작됐노라!” 말할 수 있지 않겠나. 내 집에서 윗채 아래채 오간 것을 두고 범죄시하는 일을 두고 먼 훗날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취급할 것이며, 동시대를 사는 인류공동체는 피를 나눈 동족끼리 벌이는 목숨을 건 다툼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그만 짐승의 시대를 끝내고, 사람의 시간으로 돌아가자.
정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