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9.15일 군에지원 입대 하게된동기 와 정년퇴직
1968.9.15일 군에지원 입대하게된 동기와 만기전역!!!!!!!
1965.5.27 이어서 1965.6.4 이어서 1주일 만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장례들 치르고 나니 집안은 엉망징찬이 되었고 농사일로 내가 17살 나이에 집안에 기둥역할이 시작되었다 농부는 비가와도 걱정이고 비가안와도 걱정하는 농촌에 삶이란 정말
힘들었던 시대였고 그 시기에는 전부 도시로 나가서 기술과 생활환경의 틀이 바뀌어가고 있었고 좁은 동네지만 동네 안에서는 딱 나또래는 나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도시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에 군에서 하사관 징집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여기에 응시들 하려고 하니 구비서류들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의 서류들 위조하고 간단한 면접으로 시험을 3명이 응시 하였고 2명 합격되고
합격한 한친구는 부산에 직장이 생겨서 입대하지 않았고
나혼자만 남몰래 농촌 시골을 도주하여 내인생이 군인으로 바뀌게 뒤었다 군지원 발표하는 날 나는 동네 입구에서 합격이 된 것인지? 안된 것인지? 무조건 우체부가 오는 것을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집 우편물 있냐고? 하여 합격증을 아무도 모르게 소문 없이 빼돌려서 나는 그 길로 혼자서 나 홀로 군인의길을 힘들게 선택하였다 가정형편으로는 도저히 집안을 빠져나올 수가 없는 쳐지였고 군입대는 말로써 꺼낼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군입대하면 동네에서 용돈을 걷어 모아서 군에 잘 갔다 오라고 동민들이 행사까지 해주는 시절이었지만 나는 아무도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이 몰래 야간도주 형식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군입대시에 필요한 용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달 밝은 밤에 당시 먹고살기 위한 쌀주머에서 쌀을 몰래퍼 내어서 신월 초등학교 옆에 있는 쌀장사집에다가 몰래 팔아서 용돈을 만들었고? 쌀 1되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30원으로 10되 정도 팔아야 300원 되는데 입대하는 날 하루 전에 창원훈련소 앞 여관 1박 비용 내고 나니 내손에 10원도 없이 떨어졌고 창원훈련소에 입대하니 용돈은 없고 옆에 같이 들어온 훈련병들이 PX사용하는 것이 정말 부러웠고 나는 1푼도 없는 빈손으로 훈련소에서 비참한 4주간 훈련을 끝나고 충남 하사관학교 20주 교육을 받으려 떠나는 날 어머니는 외가댁 둘째 형님이 당시에 의정부 미군부대에 카츄사로 현역복무 중에 휴가들 나와서 어머니하고 창원기차역에서 잠깐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눈물을 쏟았고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우셨는지?그 이후로 내가 군대생활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참아 내는데 어머님 모습을 생각하면서 큰 힘을 길러주셨다 어려운 여건과 긴 고비들 이겨내면서 충남 예산 육군하사관 학교 기술행정하사관반 기행 20기들 수료하고 김해공병학교 야전공병 14기 후보생으로 16주 교육을 이수하고현역 육군하사로 1970.5.10 임관하여 동해안 경비사령부 1 유격여단 1대대 제3지역대에 배속받아서 군대생활이 시작되었다 유격여단은 북한 김신조 청와대기습 사건 이후 북한특수부대와 같은 특수부대들 만드는 박정희대통령의 국방정책으로 당시에 훈련 강도는 무척 힘들게 실행하였고 그런 훈련을 지금실행 한다면 현역으로 남아서 군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실전같은 훈련을 강하게 하였다 일상생활에 발목에다가 모래주머니 1Kg 양쪽 다리에 항상 걸어 메고 다녀야 했고 식사시간은 검사들받고 식사배식을 하는 철저한훈련으로 무장구보20kg 완군장 으로 8km 40분 안에 주파하는 무장구보 사격, 수영, 스키, 고공강하, 주특기 등 많은 종목의 특수훈련을 숙달시키면서 특전요원을 키우는 과정에 특전사도 월남전에 파병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많은 훈련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당시 파월전쟁에 자원을 3회 걸쳐 지원해서 맹호 공수지구대로 파견되어 그곳으로 약 7개월간 월남전에 참가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베트남으로 오고 가고 하면서 그리고 참전하면서 좀 더 큰 눈으로 군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시에 한국군 하사봉급을 선지급하고 월남에서 받은 봉급으로 현재 소곡리산 87번지 3,300평을 구입해 놓으셨다 그산에 할아버지와 우리 집안의 선영(先塋)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살아 가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조금씩 나오는 돈을 그대로 모아서 표식을 많들어주신 부모님의 그 정성은 나에게는 큰 보물같은 선물이 되어 있었다 월남에서 귀국하여 한국군으로 복귀하니 고된 훈련과 각종보급품 및 급식이 월남에서 미군보급기준으로 지원받은 것보다 부실하였고 힘들어서 군생활이 염증을 느끼고 전역지원서들 올렸고 모든 업무들 인계하고 전역을 대기하면서 놀고 있을 때 육군본부에서 당해연도 전역취하 결정이 표되어서 나는 다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취소이유는 북한 김일성이가 1975년도에 부산에서 자기 회갑을 하고 남북을 통일시킨다는 정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는 느낌으로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을 때 여단본부에서 보직자리가 나왔는데 여려 사람들을 추천받아서 군수참모가 심사하였는데 그중에서 내가 선발이 되어서 군수처에서 또 새로운 근무들 하게 되었다 업무도 중책이어서 자리들 비우기가 힘들어서 대체로 힘든 군사훈련은 받지 않고 서도 계속 군생활을 할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직 속에서 힘들었고 어려운 시기에 인간관계들 유지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군생활을 34년까지 무난하게 하게되었다 근무 중에는 여려가지 좋았던 추억도 싫었고 힘들었던 추억도 많이 있지만 기억에 생생한 것으로 몆 가지만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줄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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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남에서 잠자고 있는 막사 취사장 배수로들 베트공이 침입하여 B-40m 휴대용 박격포 공격으로 당시 옆팀 중사 이우순 현장사망 (국립현 충원 묘지번호 2-2 묘비번호 3497번) 그때 구조헬기가 야밤중에 연병장으로 착륙하는 것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2. 군수처 근무당시에 여단탄약고 도난사건 (태권도선수 000)
3. 군수처 특수장비창고 도난사건
4. 부. 마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군
4. 부. 마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군
5.12.12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군
6. 광주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군
7,15대대 주임원사 근무 시 강릉 무장공비침투 사건
8. 대대 권총 분실사건 (회수함)
9. 사망사건(음주운전 1. 구타 1. 무장구보중1) 3명
10. 특전대 행보관 근무 시 현지 탈영 1명 (원대복귀 후 정상 전역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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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 없이 있었으나 군생활은 자기 성질만 앞세우면 힘들고 연속하지 못한다 리드는 항상 여려 전우들의 공감할 수가 있도록 소신을 가져야 하고 성숙하지 못한 지휘관 만나면 정말 힘든 생활이 된다 군생활은 조직상 혼자 특별하게 티어 나지 않고 성실하고
자기 소신을 죽이고 남을 많이 이해하고 배려하여야 잘 버티나 갈 수가 있었다 그르나 자유들 구속하는 조직체에서 34년간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은 첫째는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이 있었기에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서 외길로 오늘의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기간 중에는 전역지원서 2회가 육본에서 심사들 받았고 한 번은 부대사정으로 취소되었고 한 번은 내가 취소한 일이 있었다 지금생각하면 2번 취소는 잘 결정된 일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고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군 생활 중에 내가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군에 첫발을 디디면서 부터서 시작하여 끝날때까지 조금이라도 잊어 수가 없는 괴로움 연속이었고 죽을 때까지 남아 있겠지만 당시 고등학교 자퇴하고 있던 동생을 학업연장을 이어놓은 것은 지금생각해도 잘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고향을 지킨 동생이 있었기에 집안을 떠나 군생활을 그 끝까지 하였고 한시도 집안 걱정을 떠나본 적은 없었다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이 오직 외길로 막달려 오고 보니 이제 시간이 많이많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살고 있다는 게 무서워진다 내가 살아온 경험을 뒤돌아 보면은 후회도 많고 아쉬운점도 많고 다시 태어 난다면 좀 반듯한 인생을 남길수가 있을것 같다 지금이라도 형제간에 友愛가 있고 화목한 집안이 되었으면 한다
2024.04.19
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