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
송파 15구 선묘성(이태련)
사십여 년 전 화창한 봄날이었다. 똑똑 또르륵 밖에서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마침 대문이 열려있었는지 한 젊은 스님이 마당에 서 계셨다. 스님이 치는 목탁소리였다. 그때까지 나는 스님이 신비로운 존재였고 가까이서 만난 것 또한 처음이었다. 그날의 행보가 탁발인 것도, 손에 든 법구가 목탁인 것마저 나중에 알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목탁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스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보살님 댁에 태기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아들이니 꼭 낳으십시오.”
꿈인지 생시인지 현실감이 없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아들을 원하는지 어떻게 아셨을까. 물론 간절했다. 하지만 확신이 없어 임신을 망설이던 차였다. 듣는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듯싶었다. 스님을 붙잡고 무슨 말이든 더 듣고 싶었지만 무심히 발길을 돌리셨다. 나는 매달리다시피 했다. 연락처라도 주십사 하고. 그렇게까지 했건만 과연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두어 달 후 정말 태기가 있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혼자 노심초사하다 받아놓은 연락처로 전화를 드렸다.
“스님, 정말 아들일까요? 또 딸이면 어떡해요.”
“딸이면 제가 데려다 키우겠습니다.”
서슴없이 답을 주시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태아의 성별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딸 셋을 연이어 낳은 터라 실감나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스님 주변에서도 걱정들이 많았다고 한다.
드디어 그해 세밑에 아들을 출산했다. 누구보다 스님이 소식을 기다릴 것 같아 연락을 드렸다.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로 연거푸 고맙다고 하셨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내가 할 말을 되레 스님이 해주신 거다. 이심전심이란 그럴 때 하는 말이리라.
산욕기를 보내고 스님이 계시는 곳을 물어 찾아갔다. 경기도 남양주시 외곽,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암자였다. 정갈하고 한적했다. 마당 한켠에 우뚝 서있는 불상의 은근한 미소도, 법당에서 울려 펴지는 청아한 목탁소리도 마음의 찌든 때를 씻어줄 것 같았다. 불교가 뭔지는 몰라도 아늑한 절집 분위기가 좋았다.
그날 스님과 마주앉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한번 스치듯 만남은 있었지만 대화의 시간을 갖기는 처음이었다. 참 인자한 분이었고 유난히 큰 귀는 앞마당의 미륵부처님을 닮은 듯 인상 깊었다. 세상사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깊은 신앙심은 당신의 자작시집 상하권 <그대 안에>에 오롯이 담겨있다. 시집을 읽노라면 스님을 뵙는 듯 젖어들곤 했다.
속내를 다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고 따뜻한 말 한마디면 처진 어깨가 올라갔다. 일상으로 내딛는 발걸음 또한 힘이 생겼다. 그렇게 이십여 년, 정초 사월초파일 백중 동지면 절을 찾아갔다. 돌아보면 어떤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기보다 그저 부처님 계신 도량이, 스님의 말씀이 좋아 그랬지 싶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경전 한 구절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침은 무엇인지 그 물음표에 대한 갈증이 나곤 했다.
우연히 법정의 <무소유>를 만나게 되었다. 한 수행자의 청빈한 삶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내 것이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버리는 것,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
정말 내가 끌어안고 있는 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가. 스님의 말씀처럼 가진 만큼 얽매이는 것은 아닌가. 소유의 의미를 곱씹으며 불교사전을 뒤적이던 때가 초발심이었지 싶다.
법정의 저서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법문집>과 <텅 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아름다운 마무리> 그리고 주옥같은 법문을 찾아들었다. 날카로우면서도 다정다감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명쾌하게 제시해 주었다.
“우리는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법을 설하신 스님은 꽃이 다투어 피고 지는 2010년 봄날에 홀연히 떠나셨다. 평소 입은 승복 그대로 다비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법정의 타계 소식은 불자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슬픔이었으리라. 죽음까지 무소유를 실천한 그의 철학과 아름다운 마무리는 시대의 선지식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되돌아보면 한 스님은 아들에 대한 염원에서 맞닿은 인연이었고 또 한 스님은 글이 내 삶 깊숙이 자리했다. 어쩌면 두 분의 묵직한 존재감 때문에 불교 공부가 절실했는지 모른다.
법정의 다비식이 여운으로 이어진 사월, 불광교육원을 찾아갔다. 설렘과 기대로 기본교육을 신청했다. 소 귀에 경 읽기였다고 할까, 돌아서면 잊어먹곤 했지만 처음 접한 불교 공부는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듯 흥미로웠다. 이어서 불교대학은 물론 경전 강의까지 놓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좀더 깊이 있는 공부도 할 겸 포교사 시험에 응시해보라는 본공 스님의 권유가 가슴을 뛰게 했다. 포교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오직 깊이 있는 공부라는 말씀에 꽂혔지 싶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빠져들었다. 제적사찰을 불광사로 원서를 내면서 법등 가입도 서슴지 않았다. 품수를 받기까지 도반들의 힘이 컸을 터. 그들과 함께 하면서 신심의 싹이 텄지 싶다.
나는 바로 서울구치소 ‘교정교화’ 팀원이 되었다. 처음 구치소 방문을 잊을 수 없다. 교정위원 사무실로 들어서자 담당 교도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 차림의 건장한 모습에서 위엄이 절로 느껴졌다. 온몸이 굳은 듯 서있는 내게 목례를 하며 다가왔다. 신분증을 달라고 했다. 잠시 후 그가 내민 것은 출입증이었다.
“이제 들어갑시다. 오늘은 사형수 접견입니다."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이 건조한 말투였다. 순간 아뜩했으나 교도관의 뒤를 따를 수밖에. 휴대폰과 소지품을 맡기고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첫 문을 통과하는 신분 확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 숨을 고르자 본 건물이 나왔다. 묵직한 철문이 두세 번 열린 뒤에야 재소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긴 행렬도 있었다. 그 통로를 벗어나 작은 법당에 이르자 해맑은 스님이 엷은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가 내놓은 차를 마시면서도 오직 시선은 문 쪽에 가있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스님과 선배의 대화에 귀 기울였지만 대부분 불교에 관한 얘기였다. 한 시간 여의 접견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법당을 나오면서 선배에게 물었다.
“왜 사형수가 오지 않았어요?”
다소곳이 앉아 차를 내던 그 사람이었단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내 눈에 비친 그는 분명 스님이었다. 옷 색깔이 법복과 비슷해서일까. 그보다 티 없이 맑은 동자승 같은 이미지 때문이었지 싶다. 겉모습만으로 단정지은 선입견이라니. 귀가 후에도 떠올려보았지만 스님과 사형수, 두 모습이 분리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사형수는 선배 교정위원의 교화로 일상이 참회와 수행인 신심 깊은 불자로 거듭났단다. 그 사례는 내게도 용기와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혼자 재소자 예닐곱 명과 불교 교리공부를 할 때였다. 건장한 남자들 속이라 두렵고 버거웠다. 그럴수록 한결같이 교화에 정성은 쏟는 선배를 떠올리며 다잡곤 했다. 재소자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고 가장이 아닌가. 표정이 어둡거나 침울해 보이면 궁색한 위로 라도 건넸다. 가끔은 그들도 속엣말을 풀어놓을 때가 있다. 오랜 재판에 지치고 인간관계를 힘들어하는 건 당연하리라. 조용히 귀 기울이는 것 또한 내 소임일진대, 그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일과를 서둘렀다는 얘기까지 듣는 날이면 은근히 힘이 솟곤 했다.
그렇게 구치소 봉사와 '새 법우 교육팀' 활동이 전부인 줄 알았다. 법회에 처음 오신 분을 안내하고 차담을 돕노라면 시원한 스님의 대기설법이 한 주의 피로를 날려 보내는 청량제가 되곤 했다. 법회와 법등 모임은 신심을 성장케 한 자양분이었다. 그런데 2018년 늦은 봄,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평화롭던 사찰이 혼돈 속이었다. 한 수행자의 파계로 불자들이 분노한 것이다. 종국에는 창건주 사퇴를 부르짖는 집회의 불을 지폈다. 유월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두 손피켓을 들고 조계사 앞 도로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쳤다. 나 또한 불광 포교사들과 손목이 아프도록 목탁을 쳤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
“지홍스님이 실망스럽다.”
“불교가 타락한 것 같다.”
“청렴한 스님을 모셔야 할텐데.”
슬픈 현실을 토해냈다. 지홍스님의 참회와 제정 투명화의 목소리는 사찰 안팎이 따로 없었다.
그해 여름, 교정교화 정기모임을 잊을 수 없다. 강사는 선학원 원장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벌인 조계사 앞 시위가 파장이 컸던 만큼 사태의 전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말했다.
“불광이 한국불교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다.”
경종을 울린 것이리라. 순간 불광의 선서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함께 참석한 선배가 ‘박수를 보낸다’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 역시 불광 사태를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광덕스님의 사상이 배어있는 불광사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불광사 신도인 것만으로도 믿음이 간다고 했다. 당시 교정위원과 국제포교사로 활동하면서 사찰 신도회장을 맡고 있던 분이었다. 그가 보낸 박수는 곧 불광 가족의 부르짖음을 응원한 것이리라. 지금도 곳곳에서 많은 격려의 메시지를 듣곤 한다.
그럼에도 해결의 기미가 요원하니 그저 안타깝다. 아무리 정상화를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요, 안개 속이다. 지홍스님이 물러난 지 거의 육 년, 지금도 여전히 창건주 사퇴와 제정 투명화를 부르짖고 있다. 방울물이 큰 바위를 뚫는 격이랄까. 이즈음은 일인 시위까지 펼치고 있다. 나 또한 미력이나마 보태고 있다. 외롭고 힘든 묵언의 수행(일인 시위)은 어디까지일지.
어느덧 불광법회 가족이 된 지 십여 년, 그동안 나름의 정진이 헛되지 않았는지 어떤 역경도 수행이라 여기면 두렵지 않다. 무상과 윤회 인과응보를 믿고, 기쁨 슬픔 괴로움 모두 마음의 작용임을 아는 불자로 뿌리내린 듯싶다. 하지만 믿고 의지한 불교가 왜곡되는 현실이 슬프다. 부처님은 오직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그 외의 모든 일은 재가자에게 맡겼거늘 승단의 독주가 심화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대로 가면 불교가 망한다는 말까지 돈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으려는 재가자의 목소리는 당연하리라. 의식 있는 불광가족이 앞장서서 청정한 승가를 위해 앓는 작금의 몸살은 어쩌면 시대의 요구인지 모른다.
나는 불광법회를 믿는다. 어떤 장애든 부딪칠수록 더 강해지는 숨은 저력이 살아 숨쉬는 한 반드시 정상화의 염원은 이뤄지리라. 지금도 수행정진하는 스님들과 법정, 그리고 광덕 대선사의 올곧은 정신을 계승하려는 우리 앞에 결코 어두운 그림자는 머물 수 없으리라.
불교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그날을 기대하며 불기 2567년 여름, 선묘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