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내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주말에 집에 틀어박혀 채널만 돌리는 내가 무척이나 한심했던 모양이다. 마당에 쌓인 낙엽을 왜 안 쓰냐는 둥, 뒤안에 모아놓은 쓰레기를 언제 치우냐는 둥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하늘에선 새털구름이 한가롭게 뱃놀이를 즐기고 주변의 나무들은 가을볕에 단풍물이 잔뜩 들었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오랜만에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더니 남 집처럼 보통 낯선 게 아니다. 그래서 두 팔을 걷어붙였다. 깍지벌레로 몸살을 앓는 단감나무 가지를 톱으로 쓸어내고 화단도 손봐야 할 것 같다. 화단에도 치울 게 많았다. 제구실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라가는 작물들이나 담장 위 울타리에 휘늘어진 호박넝쿨도 말끔히 걷어내야 한다.
ⓒ2005 유진택 화단이 화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계절은 숨쉴 틈 없이 들어찬 작물을 걷어낸 늦가을이나 겨울뿐이다. 작물에 치여 웅크리고 있던 꽃과 나무들이 확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텃밭구실을 하는 봄철이나 여름보다도 그래도 가을이 즐거운 것은 화단을 가득 채우며 꽃망울을 터뜨리는 보라색 국화 때문이다. 늘 화단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국화가 올해도 탐스럽게 피었다.
녀석은 계절에 맞춰 화단 한 켠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3년이 됐지만 가을마다 어김없이 얼굴을 내민 것이다. 탐스러운 국화향기에 숨이 막혔다. 마당을 가득 채우는 저 향기만 맡아도 배가 부를 지경인데 꽃술 속에 머리를 처박고 꽁무니를 까닥거리는 벌들이 부러웠다. 꽃술 속에 뭐가 들었는지 벌들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이것을 두고 밀월관계라 하는 것인가. 꽃과 벌의 밀어. 그 속삭임이 따끈한 가을볕을 더 숙성시켰다.
보랏빛으로 속살까지 물들은 국화
화단의 국화는 처음 한 뿌리로 새 삶을 틀었다. 3년 전 이웃에게 화분 한 개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다. 보랏빛으로 온통 속살까지 물들인 탐스러운 국화였다. 원래부터 국화 기르기를 좋아한 그는 매년 가을이면 집에 친척들을 초대했다. 자신이 손수 가꾼 국화를 자랑삼아 보여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인데도 타고난 눈썰미 탓인지 국화를 가꾼 솜씨가 제법이었다.
ⓒ2005 유진택 단독주택의 2층으로 올라가는 그 집의 계단과 베란다는 온통 국화 화분으로 넘실거렸다. 키가 껑충한 대국이나 소국 등 여러 국화에는 예술적으로 엮어 만든 철사를 세워 한껏 분위기를 돋워 주었다. 멀리서 날아온 벌들도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분주하게 날개 터는 소리가 가느다란 가을볕에 감겨 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화분 하나 드릴 테니 형님도 한번 길러 봐요. 엄청 신경을 써야 돼요. 형님 집에 주면 제대로나 키울는지 몰라요. 제 때에 꽃을 피우려면 물도 잘 조절해서 줘야하고 보통 손이 가는 게 아닌데.”
숨넘어가도록 꽃망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국화 화분 한 개를 주면서도 미덥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전문가 못지않게 가꿀 자신이 있다며 넙죽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집에 가져오기 무섭게 국화는 시들기 시작했다. 햇살이 몸살 나는 양지쪽에 화분을 세워놓고 그냥 세월만 믿고 있었으니 아무리 건강하게 자란 국화인들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한창 꽃을 뽐낼 시기인데도 화분의 국화는 꼬들꼬들 말라가고 있었다.
ⓒ2005 유진택 그날 저녁 그가 대문을 들어섰다. 얼마 전에 자신이 준 국화를 공들여 잘 키우는지를 확인차 온 듯했다. 지금 한창 물이 올라있어야 할 국화가 찬바람도 불기 전에 시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가 돌아간 뒤 화분에서 국화뿌리를 뽑아 화단에 옮겨 심었다. 좁은 화분에서 숨 막혀 하는 것보다 그래도 많은 자양분이 뒤섞인 화단의 흙이 더 나을 성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 봄 한 뿌리를 비집고 올라온 싹들이 흙을 뚫고 새 생명을 움틔우기 시작했다. 그때 아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로 말했다.
“자기, 이 국화가 얼마나 잘 번지는지 알어. 제대로 키우려면 뿌리를 뜯어내 드문드문 심어줘야 해. 그냥 내버려두면 화단은 얼마못가 국화로 지천일거야”
아내 말대로 뿌리를 잘게 뜯어내 여러 곳에 드문드문 묻어주었다. 그런데 흙이 비좁도록 싹들이 올라왔다. 올라오는 속도도 빨라 여름이 되자 화단 한 켠은 파란 국화 싹들로 뒤덮였다. 그냥 세월만 믿고 있어도 국화는 아무 탈 없이 잘 자랐다. 게으른 우리부부의 손을 타느니 차라리 바람과 햇살 그리고 간간히 내리는 비가 더 감질 맛 나는 모양이었다.
국화가 싹을 틔우고 꽃망울이 탐스럽게 부풀 때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는데도 매년 가을만 돌아오면 국화는 놀랍도록 해맑은 보라빛깔로 가을을 손짓하고 있었다. 이렇게 탐스러운 꽃을 두고 왜 한번도 마당을 둘러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이제 아내가 잔소리를 쏟아내기도 전에 알아서 마당을 둘러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는 탐스러운 꽃에 코를 대고 킁킁 향기를 맡아보는 버릇도 생겼다. 벌들이 머리를 박고 꽁무니를 까닥거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