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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오페라를 마무리한 다 카포 아리아
[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와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17세기를 보는 시각 중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베스트팔렌 조약을 비롯해 1640년대 후반 유럽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정치적 혼란들을 16세기에 형성된 스페인 중심의 세계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유발된 증상들로 이해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통해 예감한 이러한
과정은 결국 또 한 번 세기가 바뀌던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매듭된다.
이러한 과정을 유럽 역사상 명멸했던 여러 왕가들의 흥망성쇠 가운데 하나로만 넘겨버리기는 어렵다.
대영제국에 앞서 16세기에 이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했던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세계 제국의 꿈이
사라진 것은 뽈 아자르의 책 제목처럼 하나의 기독교 국가라는 중세적 이상이 허물어진 “유럽 의식의 위기”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 루이 14세의 ‘위대한 세기’의 떠오르는 태양과 견주어 볼 때 더욱 초라해 보이는 스페인 합스부르크家의 저물어
가는 석양이 오히려 그 후 벌어질 여러 사건들을 더 잘 비추어 줄 수도 있다.
기존 국제 질서의 붕괴가 차후 야기된 다양한 국지적 현상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설명인 경우가 역사상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삶은 이러한 과정의 전후를 둘 다 비추는 양면경이다.
오페라의 첫 세기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에 의해 마무리된다. 페리와 캇치니의 피렌체의 궁정 오페라가 만토바와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공공 오페라의 꽃을 피웠고, 몬테베르디의 뒤를 이은 카발리, 체스티의 손에 의해 이러한
전통은 이태리를 벗어나 파리와 비엔나로, 그리고 마침내 바다 건너 런던에 이르기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이태리는 오페라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나폴리는 다음 세기 오페라의 향방을 결정했다.
스페인 왕을 대리한 부왕(副王, Viceroy)의 통치를 받았던 나폴리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흥망성쇠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으며,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족적 또한 이러한 나폴리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나폴리의 운명, 작곡가의 旅路
1660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태생인 알레산드로는 음악가였던 부친 사후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갔다.
1679년 열아홉에 발표한 첫 오페라 「닮은 사람들」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알레산드로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궁정 악장에 임명됐다.
30년 전쟁 중 부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2세가 전사하자 1632년 여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크리스티나
여왕은 1654년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왕위를 버리고 스웨덴을 떠난다.
기착했던 여러 도시로부터 반종교개혁의 영웅으로 환대를 받은 후 마침내 다음 해 성탄절 로마에 도착한 크리스티나
여왕은 로마 문화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했다. 1684년 나폴리로 돌아온 알레산드로의 공식 직함은 왕립 예배당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여기에는 부왕 궁정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는 책임도 포함돼 있었다.
새로운 오페라를 부왕 전용 극장에서 먼저 상연한 후 곧이어 대중을 위한 성 바르톨로메오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관례였던 나폴리를 위해 알레산드로는 1702년까지 18년 동안 최소한 서른 두 편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나폴리의 음악적 취향이 더 이상 자신의 것과 맞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감지한 알레산드로는 로마
로 되돌아가 1706년 코렐리 및 파스퀴니와 함께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로마 체류 동안 알레산드로는 피렌체를 통치하던 코지모 3세의 세자 페르디난도 대공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보다 단순하고 대중적인 음악을 촉구하는 대공의 편지들은 후에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에 대해
“너무 음들이 많다”고 평한 요제프 2세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알레산드로가 나폴리를 떠난 것은 카를로스 2세 사후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과 무관할 수
없었다.
1702년 5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영국 및 네덜란드와 함께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그러나 1705년 레오폴트가 서거하고 후임 요제프 1세마저 1711년 사망하자 그때까지 동맹국들이 앙주를 대신할
스페인 왕 후보로 밀었던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등극하게 된다.
카를 5세처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카를 6세가 둘 다 통치하는 사태를 두려워 한 영국과 네덜란드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승인함으로써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마무리됐으며, 이듬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라슈타트 평화조약에 의해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스페인 소유령들은 오스트리아에 넘어가게 됐다. 그러나 나폴리는 이미 1708년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무혈점령 돼 그리마니 추기경이 나폴리 부왕으로 취임한 바 있었다.
추기경의 총애를 받았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역시 나폴리로 돌아와 궁정 악장으로 재임명 돼 때로 오페라 작곡과
공연을 위해 로마를 방문하는 경우 외에는 1725년 죽을 때까지 나폴리를 떠나지 않았다.
음악사에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오페라 세리아의 틀을 완성한 인물로 기억된다. 오페라 세리아의 특징 중
이태리 서곡과 다 카포 아리아를 우선 살펴보자. 기존의 느린 두 박 계통 다음 빠른 세 박 계통의 춤곡이 나오는
베네치아식 기악 전주곡을 대신한 이태리 서곡은, 빠르고 경쾌한 첫 부분에 뒤이어 간결한 느린 서정적 부분이
나오며 빠른 춤곡으로 마무리 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화려한 장식음과 성악적 기교
1700년 직전 알레산드로에 의해 확립된 이와 같은 이태리 서곡의 틀은 륄리가 확립한 프랑스 서곡과 더불어 18세기
작곡가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를 제공했다.
또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명확히 구분되는 오페라 세리아에서 아리아란 주로 다 카포 아리아를 의미한다.
잘 알다시피 ‘다 카포’란 ‘머리[=처음]부터’라는 뜻으로서, 두 연의 가사로 이루어진 다 카포 아리아는 첫 연에
뒤이어 대조적인 둘째 연이 나온 후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연주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 보다 화려한 장식음들을 솜씨 있게 붙여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깊이를 더욱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가수의 성악적 기교를 마음껏 뽐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1721년 로마에서 초연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마지막 오페라 「그리젤다」의 아리아는 전형적인 다 카포
아리아이다. 농부의 딸로 왕과 결혼했으나 자신의 사랑이 진정한지 시험해 보려는 왕에 의해 다시 시골 농가로
보내진 그리젤다는
“나와 재회하리, 오 그늘진 숲이여, /
그러나 더 이상 왕비와 신부가 아니라 /
불운하고, 경멸받는 /
양치기 소녀로서. //
저기 내 고향의 산들과, /
여기 친숙한 샘물, /
들판이 있고 강물도 흐르건만 /
나 홀로 예전 같지 않구나”
라고 노래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르네상스 전원극(田園劇, pastoral)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젤다」의 대본은 오페라 개혁의 선구자 아포스톨로 제노(1668~1750)의 것으로, 베네치아 출신의 제노는
공교롭게도 나폴리의 철학자 지암바티스타 비코도 제노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뉴턴과는 달리 나폴리 대학 교수였던 비코가 오페라를 관람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비코의 철학이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를 위시한 동시대 나폴리 사람들이 겪었던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혁의 와중에서 형성됐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변혁기에 난무하게 마련인 수많은 해결책들 중에서도 그 깊이에 있어 단연 돋보인다는 크로체의 평가를
받은 비코의 말들 중에서도 “어떤 사물에 대해서는 이를 만든 존재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남는다.
사람이 만든 사회는 사람이 가장 잘 알기에 사회학이 성립된다는 비코의 생각은 음악과 음악학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울게 하소서”로 잘 알려진 헨델의 「리날도」에 얽힌 사연들을 통해 오페라
세리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유럽의 이목, 바로크 오페라의 꽃에 쏠리다
“그대, 심연의 거대한 힘으로 나를 계율의 천국에서 끌어내려 영원한 고통의 지옥으로 떨어뜨
렸네”란 애통한 가사로 시작하는 ‘울게 하소서’는 ‘라르고’와 더불어 헨델의 작품 중 우리 귀에 가장
친숙한 곡이다. 사라방드의 기품 있는 춤곡 리듬에 실린 이 감동적인 아리아는 오페라 「리날도」에
등장하는 알미레나가 부르는 곡이다.
「리날도」는 륄리의 「아르미데」와 마찬가지로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륄리의 서정 비극에는 알미레나가 등장하지 않아 자연히 알미레나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우선 알미레나는 제1차 십자군의 사령관 고프레도의 딸이자 리날도의 약혼자이며, ‘울게 하소서’는 자신을 납치한
예루살렘의 이교도 왕 아르간테가 알미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자신을 풀어주거나 아니면 울게 내버려두라고
호소하는 노래라는 것부터 알아두자.
전형적인 다카포 아리아인 이 곡의 단조로 바뀐 중간 부분에서 알미레나는 첫 부분의 기품 있는 겉모습 아래 억눌
러온 ‘슬픔’과 ‘고통의 사슬’을 얼핏 드러내지만,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첫 위엄을 되찾는다.
영화 『파리넬리』에도 삽입돼 더욱 널리 알려진 이 곡은 알미레나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절도 있는 리듬 아래 감추
어진 감동은 자연히 이를 작곡한 헨델과 그의 오페라를 둘러싼 주변 여건에 대한 관심을 유발한다.
위엄서린 알미레나의 감동이 환기하는 것
「리날도」는 메리 여왕의 뒤를 이어 앤 여왕이 통치하던 1711년 런던의 퀸즈 극장에서 초연됐다. 대본은 극장
매니저 아론 힐의 초벌을 지아코모 롯시가 이태리 운문으로 옮겼는데, 그 서문에서 힐은 이전의 이태리 오페라들은
영국 무대를 위해 작곡되지 않아 취향과 목소리가 맞지 않았고, 기계와 무대 장치가 없거나 허술해 보는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서문이 반어법적으로 강조했듯 런던을 위해 특별히 작곡됐고, 힐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무대 장치가 곁들
여진 헨델의 첫 런던 오페라 「리날도」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어 1731년 개작된 후에도 계속 공연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리날도」이전의 런던 오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힐이 그런 언급을 했을까.
1695년 퍼셀의 죽음으로 자국민에 의한 영국 오페라의 맥이 끊긴 이후 런던 무대는 외국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태리 오페라가 점차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퍼셀 생전에도 이미 이태리 성악가들이 영국 연주회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이태리어로 부르는 막간극이 무대에
오른 것은 1703년에 와서의 일이었다.
1706년에는 후에 헨델과 라이벌이 될 지오반니 보논치니(1670~1747)의 오페라 「카밀라의 승리」가 영국 가수
들에 의해 무대에 올려 졌는데, 1696년 나폴리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1709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64회나 상연됨
으로써 영국에서 인기를 끈 첫 이태리 오페라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이러한 인기는 이태리 말이 아닌 영어 번역으로 노래해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공연이 지속
되다보니 이태리 가수들이 영국 가수들 틈에 섞여 한 공연이 두 나라 말로 진행되는 경우마저 생겼다.
「리날도」의 성공을 질시한 애디슨이 「스펙테이터」에 “마침내 오페라의 반만 알아듣는데 지친 청중들은, 생각
하는 수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젠 아예 전체 오페라를 못 알아들을 외국어로만 공연되도록 주문했다”고 비꼬는
투로 언급한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렇듯 이태리 오페라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문제가 된 것은 비단 런던 뿐만이 아니라 헨델이 한때 머물렀던
함부르크를 비롯한 다른 곳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85년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1703년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말단 바이올린 주자로 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음
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 상업적 융성을 누려왔던 함부르크는 궁정들을 제외하고는 독일 지역
에서 유일하게 오페라 극장이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런던에서 영어와 이태리어가 공존했듯 함부르크에서도 독일어와 이태리어가 같이 사용됐는데, 그 차이는 런던
에서는 가수의 국적에 따라 다른 말로 불렀던 것에 비해 함부르크에서는 레시타티보는 독일어로, 아리아는 이태리어
로 불렀다는 해결 방식에 있었다.
함부르크에만 머물 수 없었던 헨델에게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대공의 초청은 바라던 이태리 방문의 기회를 제공
했다. 1706년 피렌체로 간 헨델은 이듬해에로마를 방문해 가톨릭교회 음악들을 작곡했으며, 베네치아에서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라의 오페라를 관람하는 한편 자신의 세레나타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베네치아에서 만난 귀족들로부터 하노버와 영국으로 갈 것을 권유받은 헨델은 1710년 6월 하노버의 궁정악장
으로 부임했으며, 한 달 후에는 휴가를 얻어 마침내 영국으로 건너가 「리날도」를 준비하게 됐던 것이다.
「리날도」는 당시의 모든 이태리 오페라들이 그렇듯이 나폴리의 오페라 세리아를 본보기로 삼는다.
오페라 세리아를 또한 ‘번호 오페라’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규칙적으로 쉽게 번호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무척 단조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구성 방식은 등장인물에 따른 아리아의 배정과
이들의 배열에 대한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둔 관습적 규칙들에 의해 백년 이상 지속된 나름대로의 예술적 성과를
거뒀다. 후에 극작가로 명성을 날린 골도니는 젊을 때 겪었던 오페라 작가로서의 실패담을 회고하던 중 다음과 같이
오페라 세리아의 관습들을 정리했다.
“극의 주인공들인 주역 소프라노 카스트라토, 여가수 및 테너는 하나는 비장하고, 하나는 기교적이고, 하나는 말
하는 것 같고, 하나는 성격이 섞여 있고, 하나는 눈부신 다섯 곡의 아리아를 각각 불러야만 한다.
조연급의 남자와 여자는 각기 네 곡, 마지막 남자는 세 곡, 그리고 혹시 극이 일곱째 인물을 요구한다면 그 역시
같은 수의 아리아를 불러야 한다. 주역들의 열다섯 아리아들은 같은 색깔의 두 곡이 바로 뒤따르지 않아 각 가수
들의 아리아들이 서로 대조를 이루도록 배치돼야 한다.”
골도니가 제시한 큰 틀의 정신은 모든 오페라 세리아를 어김없이 관통하고 있다.
아리아 선호도, 18세기 사회변화와 맞물려
흥미로운 것은 ‘울게 하소서’나 ‘라르고’를 비롯해 현재 우리가 즐겨 듣는 바로크 시대의 아리아들은 모두 골도니가
비장하다고 한 아리아 칸타빌레들 일변도이며, 당시 오페라 세리아에 가장 많이 사용된 힘차고 기교적인 아리아
브라부라는 모차르트 「마적」에 나오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만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아리아 유형에 대한 선호도의 변화는 18세기 이후 빚어진 사회 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 서곡에서 보았듯 으뜸가는 목표가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어진 ‘영광’이었던 군주들로서는 아리아 브라
부라에 담긴 결연한 투지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마음가짐이었겠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민의 신분을 획득한
예전의 피통치 계급으로서는 사랑과 미움의 절절함을 담은 아리아 칸타빌레만이 오페라 세리아의 아리아 유형들
가운데 유일하게 마음에 다가왔을 것이다.
헨델의 「리날도」에는 알미레나의 ‘울게 하소서’ 외에도 리날도가 알미레나에게 부르는 ‘사랑하는 신부여(Cara
sposa)’와, 알미레나가 부르는 모방(simile) 아리아 ‘노래하는 새들과(Augelletti)’ 같은 유명한 아리아들이 들어
있다. 특히 ‘노래하는 새들과’의 전주 부분에는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에 못지않게 생생한 새들의 모습이
플루트와 피콜로를 비롯한 목관 악기들에 의해 소리로 그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애디슨은 이 아리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화도 하나 남겨 놓았다.
그가 「리날도」의 초연을 보러 극장으로 가던 중 새들로 가득한 새장을 들고 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새들은 바로
‘노래하는 새들과’가 연주될 때 극장 안에 풀어놓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아가 끝난 뒤에도 멋대로 극장 안을 누비며 노래를 불러대던 새들은 애디슨에 의하면 ‘청중의 머리 위에 불편을
끼치는’ 일마저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헨델은 「리날도」이후 삼십년 동안 런던 무대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1728년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의 성공과 뒤이은 왕립 극장의 파산으로 영국에서의 이태리 오페라의
인기가 하락하자 1741년 이후로는 ‘영국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전념한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구별하기 어렵다. 잘 알려진 「메시야」를 보더라도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번갈아 나오는 방식은 오페라 세리아와 같으나, 레치타티보-아리아 뒤에 합창이 추가되어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페라 세리아를 접할 기회가 많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는 「메시야」가 오페라 세리아의 전통적 짜임새와 아리아
유형들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음 글에서는 후에 ‘대왕’으로 불리게 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오페라 극장 건립에 대해 살펴보도록
‘대왕’의 꿈과 역사의 아이러니
1742년 12월 7일 아직 채 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베를린 오페라 극장 무대에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악장 카알 하인리히 그라운이 작곡한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와 체자레」가 올려졌다.
유진 헬름의 「프리드리히 대왕 궁정에서의 음악」에 의하면 “외부 장식도 없었고, 곳곳이 공사 중이며,
영구적이 아닌 임시 설비가 많은데다가, 첫 관객들은 건설 자재가 적재된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극장을 그득 메운 사람들에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대에는 그라운이 이태리를 직접 방문해 초빙해 온 가수들과 프랑스 사람들로 구성된 발레단, 그리고
왕세자 시절부터 키워온 앙상블이 핵심을 이룬 독일 연주자 위주의 관현악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휘자의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무대와 가까웠던 로얄 박스에는 1차 슐레지아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갓 서른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가 뿌듯한 표정으로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 프리드리히 2세가 건립한 베를린 오페라 극장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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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오페라가 마지막으로 공연된 것이 프리드리히 2세의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 시절
이었으니, 거의 30년 만에 자신이 건립한 극장에서 처음 상연되는 오페라를 바라보는 프리드리히
2세가 뿌듯하게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자신이 처음 오페라를 접했던 것은 왕세자
시절인 1728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따라 드레스덴 궁정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때 보았던 오페라는 한때 하세의 「클레오피데」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태리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던 하세가 드레스덴 궁정을 위한 첫 오페라 「클레오피데」를 무대에 올린 것은 1731년
의 일이었기에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이 하세의 「클레오피데」를 베를린 오페라 무대에 올리
도록 한 데다가, 아리아 한 곡은 플루트를 위해 편곡했고, 심지어 경험이 모자란 가수에게 아리아에
장식을 넣어 부르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는 기록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클레오피데」는 당시 오페라 대본을 뜻하는 드라마 페르 무지카의 최고 인기 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메타스타지오의 「인도의 알렉산더 대왕」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서 헨델 역시 같은 작품에 기반한
오페라 「포로」를 런던 무대에 올린 바 있었다.
하세가 오페라 제목을 포로의 상대역인 「클레오피데」로 붙여 주인공으로 삼은 데는 자신과 갓
결혼한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 파우스티나 보르도니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시작한 극장 건축
키가 육척이 넘는 거인들로만 이루어진 근위대를 거느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군인 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위 계승 후 궁정 음악가들을 해고해 버렸을 정도로 심각했던 이러한 거부감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대 의상을 입고 오페라와 발레에 참여해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던 뼈아픈 기억이
깔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은 자신의 맏아들을 ‘플루트나 부는 여성화된 낙오자’라고 깔보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강압을 견디다 못한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1730년 마침내 두 군대 친구들과 함께
탈영을 도모한다.
모의가 발각돼 감옥에 갇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눈앞에서 연인이자 친구인 카테 중위의 목이 잘리는
모습을 직접 목도해야만 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 왕세자는 1732년 룹핀에서 음악가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1736년 자신을 위해 새로 건립한 라인스베르크의 궁전으로 옮긴 후에는 17명으로 구성된 뛰어난 실내
악단을 유지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왕세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장차 자신이 건립할
오페라 극장에 대한 구상이 날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1740년 아버지의 서거로 마침내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가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꿈을 구체화 하는 것이었다.
극장 설계와 시공은 라인스베르크 궁전을 건축했던 크노벨스도르프에게 맡겨졌다.
그가 한 베를린 신문에 쓴 기사에 의하면 “기둥들이 늘어선 극장 전면에 라틴어로 ‘아폴로와 뮤즈들의
왕 프리드리히’라고 새겼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은 오스트리아의 어린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슐레지아를 탈취하기 위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으나, 전장에서도 오페라 극장 건축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해 직접 지시를 내릴 정도로 오페라 극장 건립에 온 힘을
기울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오페라 극장은 한 세기를 겨우 넘긴 1843년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재건축된 건물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번이나 파괴됐으나, 1955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은 원형대로 복원됐다.
이때 복원을 주관한 동독 정부가 프리드리히 대왕을 기리는 위에 소개한 문구를 지우고 크노벨스도르프의
업적을 새겨 넣도록 조치하는 바람에 음악 감독으로 계약했던 에리히 클라이버가 사임하는 소동이 벌어
지기도 했다.
봉건절대군주인 ‘대왕’보다는 ‘노동자’인 건축가를 내세우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분출된 해프닝
이었지만, 크노벨스도르프 자신이 작위를 받은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마저
느끼게 된다.
1742년의 개장 이래 프리드리히 대왕의 오페라 극장은 1756년 다시 오스트리아와의 칠년 전쟁의 발발로
위축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그 중에서도 1755년 초연된 「몬테주마」는 신대륙을 배경으로 한 주제와 더불어 프리드리히 대왕 자신의
프랑스어 시나리오를 번역한 이태리어 대본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이미 언급했듯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페라의 모든 사항에 대해 세부에 이르기까지 직접 간여했고,
특히 주제 선택은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프랑스 비극에 바탕을 둔 대본들의 비중이 유난히
높았던 것 역시 그의 취향 때문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체자레」의 대본도 피에르 꼬르네이유의「폼페이의 죽음」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1724년 초연된 헨델의 「줄리오 체자레」를 위해 하임이 쓴 대본과 닮은 점도 상당히 많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통치 하에 있던 할레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던 헨델보다 자신의 궁정악장으로
거느리고 있는 그라운의 음악이 더 탁월하다는 언급을 남겼는데, 이러한 의견이 얼마나 진솔한 것인지
궁금하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2세가 작곡한 플루트 협주곡과 교향곡들을 들어보면 헨델의 명확하지만
날선 성격 표출보다는 원만하고 부드러운 중용의 테두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 그라운의 음악과 닮아
있어 그의 의견이 왜곡된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왕세자 시절부터 서신을 교환했으며 1750년부터 53년까지 왕의 궁정에 머무르기도 했던 볼테르가 프리
드리히 2세를 ‘대왕’이라고 부른 진의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 호칭이 후대에까지 이어졌다는 것만
으로도 프러시아 역사에서의 그의 비중을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처한 역사적
한계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한 예로 오페라 극장에 뒤이어 1747년 완성된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은 이미
프랑스에서는 유행이 지나버린 1720년대의 건축 양식으로 건립됐다고 한다.
이처럼 유행이 지난 양식을 뒤늦게 받아들이게 되는 일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려면 어쩔 수 없이 겪는
현상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오페라 극장 프로젝트 역시 당시 오페라 세리아의 흐름에 합류하려는 뒤늦은
몸짓으로 읽혀질 수 있다.
마이클 탤벗은 “18세기 이태리의 후진성과 음악의 뛰어남은 둘 다 봉건적 사회관계가 지속됐다는 데 그
근본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귀족 사회가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기는 했으나 시민 사회가 자리 잡는 것은
아직 한참 후의 일이었기에, 귀족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교회 기부, 오페라 후원 및 음악가들을
고용함으로써 계속 음악이 번성하는 경제적 뒷받침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행 지난 양식을 받아들인 까닭
이러한 오페라 후원의 대열에 뒤늦게 뛰어들기는 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프랑스 비극에 바탕을 둔
대본을 선택했던 것 자체가 이미 메타스타지오로 대표되는 드라마 페르 무지카의 경직성에 대한 반발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추후의 오페라 개혁과도 맥이 닿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절정에 있는 글룩의 오페라들은 비엔나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이 두 도시가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극복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조들의 수도였다는 점에서도 역사의
아이러니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 한국교원대·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