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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_마가20_절망의 시대, 희망의 사람
마가복음 6장 14~29절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배경으로 ‘절망의 시대, 희망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광복 70주년
무더운 여름 날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만 이미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제가 입추였습니다. 입추와 처서(23일) 사이에 가을 무와 김장용 배추를 심는다고 합니다. 24절기는 양력을 따르는데 이것은 농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는데 약 15도씩 움직일 때마다 절기가 바뀌는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맞춰서 6개씩의 절기가 있습니다. 가을의 절기는 입추를 시작으로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으로 끝나고 그 다음이 10월 23일경 겨울이 시작한다는 입동이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속도가 약 1만8천Km로 1초에 약 30km를 달려갑니다. 그러니까 거의 1초에 순천에서 여수정도를 달리는 것입니다. 엄청난 속도입니다. 우리는 달리는 차안에서 일정 속도를 유지하는 등가속운동을 할 때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도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만약 지구가 일정 속도가 아니라 가끔 절기에는 차량방지턱 앞에서 차가 속도를 줄이듯이 그렇게 속도를 줄이고 다시 달리고 하면 어떨까요? 만약 그런다면, 우리는 엄청 멀미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생명체가 지금처럼 살기는 힘들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속도를 줄이거나 빠르게 하지 않고 일정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마 지구는 순천에서 서울정도까지는 움직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게 실감이 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마다 우리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다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지구의 공전속도가 너무 엄청나게 빠르지만 우리는 전혀 감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능력이 너무 크고 엄청나서 우리가 다 감지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도 환경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삶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참 고통스럽습니다. 1926년,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국토를 빼앗긴 식민지배하의 민족현실을 ‘빼앗긴 들’로 비유하면서 봄이라고 하는 계절처럼 조국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꿀 수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구절이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답을 합니다. 국토를 빼앗겼지만 대한민국의 해방이라고 하는 희망까지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일제 치하의 얼어붙은 추운 겨울같은 고난의 계절이 언제 다 지나갈는지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알수가 없었습니다. 1920, 30년대에 일본은 더욱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내면서 세계전쟁을 준비할 정도로 강성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에도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의 꿈이 세계만방에 선포되면서 비록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죽임을 당했지만 아직도 민족 해방과 대한 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도 하고 만주와 중국 전역에서 독립군으로 일본군대와 전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빼앗겼던 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되찾아오는 ‘광복(光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꿈꾸고 헌신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이번 주중의 15일은 광복 70년을 맞는 광복절입니다. 정부는 침체된 내수 경기를 살리겠노라고 14일, 금요일을 광복절 대체휴일로 삼고 금요일부터 광복절인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을 황금연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광복절 70주년을 맞은 대통령 대사면의 명단에는 부정과 비리로 들어간 재벌총수들의 이름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경제를 살리겠다는 돈에 눈먼 정책들과 주장들입니다.
광복 70주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삶의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오히려 친일파의 후손들은 더 잘먹고 잘 살며 여러 가지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분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일본의 사죄와 보상은 없습니다. 정부차원의 활동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직 대통령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가서 ‘일왕을 천황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에 위안부 문제 사과를 계속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느니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발하는 것은 내정간섭 같은 것’이라느니 하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 정부와 여당이 주도적으로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 가운데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내용의 국정교과서로 바꾸려고 한다는 뉴스를 들을 때에 우리가 과연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해방과 광복의 세월이 70년이나 흘렀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할 정도로 절망감이 듭니다.
이러한 절망의 시대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서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거명된 이는 세례 요한입니다. 당시 경건하게 살려고 하던 사람들은 빈부귀천을 가릴 거 없이 모두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게 별로 자랑스러울 게 없는데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은 이유는 그 사건이 명백한 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왕은 헤롯 대왕의 큰 아들인 헤롯 안티바스입니다. 성경에는 그냥 헤롯이라고만 나옵니다. 그는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고대 왕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헤롯이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 거꾸로 헤로디아가 주도적으로 남편인 헤롯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 안티바스와 재혼한 건지, 또는 정략적으로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드러내놓고 비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18절에서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했습니다. 헤롯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그래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발언이었습니다. 요한의 비판을 헤롯보다는 헤로디아가 더 못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따르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 했습니다. 요한이 헤로디아를 직접 비판한 게 아닌데도 그녀가 앞장서서 요한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친 겁니다. 헤로디아는 남편을 들볶았을 겁니다. 요한을 죽이지 않으면 ‘보따리 싸겠다.’고 말입니다. 헤롯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을 죽이라는 아내 헤로디아의 요구를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마음 깊이 두려워하면서 존경하고 있는 요한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요한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는 일단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는 수준에서 이번 일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분이 풀리면 적당한 때 석방시킬 계획이었겠지요.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왕의 생일이라 왕궁 내외 귀빈들이 다 모였습니다.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는 순간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무대 중앙에 등장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의 조카였지만, 헤로디아와 재혼한 뒤로는 딸로 부르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공주가 나와서 춤은 춘다는 것은 당시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대개는 전문 무희들이 관능적인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헤로디아가 일부러 딸을 그 자리에 내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의 춤이라는 파격적인 행위 앞에서 헤롯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헤롯은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이 나라의 반이라고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기껏해야 로마에서 만든 최고급 가죽신이나 인형이나 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소녀는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가서 조언을 구합니다. 헤로디아는 아무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말을 합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24절). 헤로디아는 자기의 재혼을 비판한 선지자 요한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축제가 열리는 순간에도 그녀는 요한을 없앨 궁리에 몰두했습니다. 그 집념이 놀랍습니다. 헤롯은 어쩔 수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의 머리를 베라고 명령을 내렸고, 기계처럼 명령을 수행한 시위병이 피가 흥건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얹어 가져와서 살로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전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마가복음은 왜 세례 요한의 죽음을 이렇게 자세하게 보도하는 것일까요?
우선 초기 기독교 안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행 19장24절 이하에 아볼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리더십을 보이던 인물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 성령의 세례는 몰랐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 파에 속한 사람들이 에베소에도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 1:37).
초기 기독교가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다른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이게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한 목소리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3:3절만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은 제사장 계급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목수였던 요셉을 아버지로 하는 예수님과는 출신 성분이 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와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이 친척지간이라고 했습니다(눅 1:36). 사촌지간인지 육촌지간인지는 모릅니다만 어쨌든지 예수와 요한의 관계가 완전히 남남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나이도 동갑입니다. 요한이 여섯 달 먼저 태어났습니다. 요한이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당시 그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에서 가장 큰 공통점은 죽음입니다. 둘 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젊어서 죽었고, 둘 다 악한 세력의 음모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전개 과정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죽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이 나서서 예수는 신성을 모독하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위협한 인물이니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로디아가 헤롯을 부추겼고, 결국 음모를 꾸며서 요한을 없애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선지자인 요한이 악한 세력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선지자도 제거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도 제거되었습니다. 악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이땅은 절망의 시대, 어둠의 시대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은 그 가운데 아무런 일도 행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요?
절망의 시대, 희망의 불빛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가운데 칠흑같은 어둠의 시대에 희망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야기했습니다.
14절,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까?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였습니다. 14절 앞의 12,13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막6:12-13,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헤롯왕이 듣고 두려워했던 소식은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증거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4절 말씀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는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어두운 배경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지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 해방과 로마 식민지배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메시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 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예수 이름이 드러난지라’하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얼마 안있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희망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류 역사를 BC와 AD로 구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나라가 꺽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책임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빛이 돌아오는 광복을 맞이하고 해방의 새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진짜 자주 독립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방은 맞이했고 광복 70주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일제의 식민주의적인 생각이 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살지 못한다면 해방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식민지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셀마’라고 하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국에 개봉하는 극장이 많지 않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전주와 광주, 단 두곳에서만 개봉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골든그러브와 아카데미에서 주요 작품상에 후보로 올라갈 정도로 내용이 좋은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흑인의 참정권이 헌법에 보장됐음에도 백인들의 차별과 협박으로 흑인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던 1960년대 미국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이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앨라배마주 셀마로 내려가 실질적인 흑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1965년 3월 7일의 1차 행진을 비롯해서 3차에 걸쳐서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행진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의 선거 참여가 정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우리를 그 시대의 현장으로 이끌어 줍니다. 흑인들이 정치참여를 제한받고 투표하지 못하며 그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희망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하늘빛교회, 희망의 사람들
저는 원래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또 하나의 교회가 더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교역자로 평생을 보낸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조금씩 불편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교회 세습, 정치적 보수화, 자본주의 물신숭배, 보수적 이념 속에 기득권을 유지하는 대형교회들, 선교지향적이지만 반십자가적인 모습들 ... 이 생각은 작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교회들의 일반적인 반응을 보면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한국 교회도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무능력과 한국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절망감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뭐라도 해보려고 해야 하는지... 마침내 저는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한 고통스러움 보다는무능력함을 하나님께 대한 의지로 바꾸는 모험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교회 개척을 결심하게 된 동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벌써 8개월째 입니다. 저는 참 무모하게도 도전을 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게 준비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걸음씩 하나님을 의지하고 걷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절망의 시대에 또 절망스러워 보이는 교회의 현실에 대해 무엇인가 변혁적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일들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사람으로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성령을 힘입어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걷고 싶습니다. 주님의 길을.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사람으로 그렇게 쓰여지기를 소원하면서 걷고 싶습니다. 하늘빛교회 성도님들, 같이 이길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걷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함께 절망의 시대, 희망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희망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